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395화 (394/925)

61. 라이벌 (6)

‘드루이드의 위대함과 멋짐을 알려야 할 장소에서 선수를 빼앗겼어. 분해……!’

구슬비는 괴도 네온의 예고장을 본 순간, 분한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자신은 예고장을 보낼 생각을 못 한 걸까?

멀린에 이어 역사에 이름을 남길 위대한 드루이디스가 정체불명의 괴도에게 지명도가 밀려선 안 되는데.

‘아니야, 아직 괴도는 예고장에서 훔칠 예정이라고 밝혔던 ‘용이 되지 못한 천재의 산물’을 훔치지 못했어!’

예고장을 보내지 않은 실책을 범했으나 게임이 끝난 건 아니다.

아직 괴도는 예고장에 언급한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구슬비도 멀린이 낸 과제를 달성하지 못한 건 마찬가지긴 했지만.

‘멀린 스승님은 왜 그런 과제를 낸 걸까.’

멀린이 영문을 알 수 없는 과제를 낸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긴 했다.

그래도 이번 건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탈환이 아닌 수색이라니…….’

멀린이 구슬비에게 낸 과제는 포모르 마족의 손에 들어간 다누 신족의 신보 수색.

강탈, 탈환이 아니었다.

꿈속에 나타난 멀린이 과제의 대상으로 제시한 고성의 위치, 신보의 모습을 보여 주며 말했다.

―그들의 경매장에서 신보를 수색하고 오거라.

―신보를 가져오면 되는 건가요? 알겠습니…….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단다. 무리해서 가져올 필요는 없다.

멀린은 길게 늘어뜨린 로브 자락을 휘날리며 허공에 띄운 신보의 환영을 지웠다.

후드로 깊게 얼굴을 가린 탓에 멀린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구슬비는 지금 멀린이 웃고 있으리라고 확신했다.

―운치 좋은 곳에 성을 지었더구나. 가서 바람 좀 쐬고 신보를 살펴보면 된단다.

멀린은 그렇게 아주 쉽고 간단하고 의문스러운 과제를 냈다.

구슬비는 거기에 그칠 생각이 없었다.

‘가져오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발견하는 즉시 탈환해 올 거야! 투어허 데 다넌은 스승님과도 연이 있으니, 신보를 되찾으면 기뻐해 주시겠지.’

구슬비는 이를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멀린은 그녀가 무모한 짓을 하리란 걸 눈치챈 것 같았다.

그걸 알면서도 말리지 않는 게 멀린다웠다.

대신 멀린은 조언을 한마디 남겼다.

―만일 만약의 경우가 발생한다면 그땐 꿈으로 몸을 피할 필요는 없다. 꿈속으로 도망치는 것보다 덜 번거롭고 안전한 방책이 있으니까.

―꿈보다 안전한 곳이 있다고요?

―그 상황에서는.

구슬비가 멀린이 했던 조언을 떠올리는 사이에도 괴도 네온은 옆에서 계속 뭐라고 중얼거렸다.

내면의 괴로움을 절절한 독백으로 한참을 표현하던 괴도 네온이 결연한 얼굴을 했다.

자기 최면이라도 거는 듯한 말로 기나긴 독백이 마무리되었다.

“……그래, 이것도 진정한 괴도로 거듭나기 위한 시련 중 하나겠지. 나는 극복할 수 있어!”

진정한 괴도? 시련?

괴도 네온이 하는 말은 구슬비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위대하고 멋진 드루이디스인 내가 이해하지 못할 정도라니…… 정말 이놈은 이상해!’

괴도 네온의 말을 흘려들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구슬비가 가장 참기 힘든 건 괴도 네온이 저 허무맹랑한 독백을 다 한국어로 했다는 점이었다.

“뭐라고 하는 거야. 한국말로 중얼거리는데 이해가 안 가네. 혹시 한국이 싫어서 한국인인 척하는 거야?”

안티들은 간혹 신분을 위장한 상태로 어그로를 끌어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이 반감을 사도록 유도하곤 한다.

구슬비가 괴도 네온이 한국인이 아닐 가능성을 상정했지만, 그 기대는 금방 깨졌다.

“나는 한국인이다. 한국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건 그쪽의 언어 능력이 부족한 탓이겠지. 모자란 건 기품만이 아니었나 보군.”

“국제 망신이니까 아까처럼 그냥 영어로 말해.”

괴도 네온은 신분이 특정되는 걸 피하고 싶었던 건지, 구슬비의 말을 들어주기로 한 건지 다행히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뭔데?”

괴도 네온은 구슬비에게 한 걸음 성큼 다가갔다.

괴도 네온은 괴도의 옷차림, 기품 운운하는 것만큼 많이 신경 쓴 차림새였다.

보석으로 장식된 예술품 같은 백조 가면과 은실과 크리스털 비즈로 정교하게 수놓은 투우복이 눈이 부셨다.

구슬비도 한순간 ‘또라이 같지만, 눈에 띄고 멋있어. 진짜, 진짜 또라이 같긴 하지만…….’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괴도 네온과 구슬비가 눈이 마주쳤다.

괴도 네온은 가면 뒤로 우수에 젖은 눈을 하고 있었다.

“왜 땔감을 얼굴에 걸고 있는 거지?”

괴도 네온의 시선이 구슬비가 착용한 떡갈나무 가면에 닿았다.

구슬비가 일순 감상에 젖었다고 생각한 눈은 그저 딱한 것을 보는 시선이었을 뿐이었다.

구슬비는 욱해서 말했다.

“땔감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이건 파티에 맞춘 가면인데? 눈 부분도 뚫려 있잖아!”

“세상에…… 장작더미 사이의 나무껍질을 주워서 착용한 게 아니라 직접 만든 것이었나?”

울컥한 기분이 들었지만, 괴도 네온의 말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괴도 네온이 착용한 백조 가면과 구슬비의 떡갈나무 가면을 나란히 두면 확실히 저런 표현이 나올 법했다.

그래도 구슬비는 자신의 가면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 가면은 떡갈나무 가면이야. 드루이디스에게 잘 어울리는 가면이지. ‘드루이드’에는 ‘떡갈나무를 아는 것’이라는 의미가 있으니까!”

“소재가 아니라 가공 과정에 큰 문제가 있는 것 같은데…….”

“진정한 위대함은 겉모습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상관없어.”

구슬비의 말을 듣던 괴도 네온이 한걸음 다시 다가왔다.

어느새 두 사람은 손이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이 서 있었다.

구슬비가 경계하며 뒤로 물러나려 했는데, 그녀의 등 뒤는 벽이었다.

구슬비는 벽을 등지고 멀린이 직접 만들어 준 떡갈나무 소재로 된 드루이디스의 지팡이를 움켜쥐었다.

“뭐야, 싸움 거는 거면 받아 준다.”

“괴도는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이유 없는 결투는 하지 않아.”

팡!

괴도 네온의 손가락 끝에서 화려한 빛의 이능파가 터졌다.

작은 이능파 불꽃에 시선을 뺏긴 사이, 괴도 네온은 순식간에 트럼프 카드 뭉치를 꺼내 들었다.

마술이라도 쓰는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트럼프 카드에 이능파가 서려 있어. 단순한 카드가 아니야. 무기 아이템이야!’

괴도 네온의 무기는 트럼프 카드 형태를 한 듯했다.

비록 그가 사람을 해치지 않고 이유 없는 결투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신뢰하지 못했다.

구슬비의 부모도 그녀가 착하게 굴면 때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결국엔 온갖 트집을 잡아 때리지 않았던가.

괴도 네온이 무기를 드는 것을 보고 구슬비는 경계심을 굳혔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하면 드루이디스의 비전(祕典)으로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휘리릭!

괴도 네온은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트럼프 카드를 셔플했다.

공중에서 빠르게 카드를 섞은 괴도 네온은 멋들어진 손놀림으로 검지와 중지 사이에 트럼프 카드를 한 장 끼웠다.

“위대함과 아름다움은 가꾸고 꾸밈으로써 더 그 빛을 발휘하는 법.”

팡!

카드를 다루는 솜씨에 잠시 시선을 빼앗겼을 때,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가 폭발했다.

폭발한 카드는 순백의 장미꽃으로 변해 있었다.

괴도 네온은 하얀 장미를 구슬비가 착용한 떡갈나무 가면의 틈에 살짝 꽂아 넣었다.

“아쉽게도 떡갈나무 꽃은 준비하지 못해서. 그래도 훨씬 낫군!”

하는 말이나 행동 모두가 오글거렸는데, 갑자기 마술쇼를 선보이고 새하얀 장미꽃을 내미는 게 아주 조금은 멋있었다.

마지막 말만 아니었다면 그랬었을 것이다.

“겉과 속 모두가 아름다워야 진정한 괴도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놈의 괴도 소리.

구슬비는 진절머리를 내며 외쳤다.

“난 괴도가 아니라고 했잖아!”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도 나처럼 훌륭한 괴도가 될 수 있어!”

크르르……!

둘이 무의미한 대화를 하는 사이, 에너미가 접근했다.

괴도 네온의 이능파에 반응하여 이쪽으로 온 듯했다.

“네가 이능파 같은 걸 터뜨리니까 에너미가 왔잖아. 왜 갑자기 카드쇼를 하고, 장미꽃을 꺼낸 거야!”

“괴도의 잠입은 은밀해야 하지만, 우아함과 멋을 가르치기 위해 샛길로 갈 수도 있는 법이지.”

“난 괴도가 아니야! 괴도보다 더 멋있고 위대한 드루이디스라고!”

구슬비와 괴도 네온이 아무 소득 없는 말싸움을 하는 사이에도 에너미는 그들을 향해 접근해 왔다.

에너미의 희귀도는 그리 높지 않아 보였으나 숫자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구슬비와 괴도 네온은 딱히 당황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둘 다 마족의 성에 잠입할 만큼 자신이 넘쳤던 탓이다.

“드루이디스의 멋짐을 설파할 좋은 기회네.”

구슬비는 떡갈나무 지팡이를 움직였다.

구슬비가 지팡이 끝으로 바닥에 마법진을 새길 때마다 이능파가 소용돌이쳤다.

마법진의 정중앙에서 구슬비가 이능파의 압력을 견디며 서 있었다.

“괴도의 카드 마술쇼와는 비교도 안 되는 마법을 보여 주지!”

구슬비의 머릿속엔 멀린이 직접 전수한 주문과 수식이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마법이 작동하는 기본 과정, 캐스팅은 3단계.

첫째, 마나 운용 수식의 이해.

둘째, 그 이해에 따른 롯드, 지팡이의 움직임.

셋째, 이능파로 인한 마나의 흐름 변화.

이 캐스팅 과정이 끝나면 시전자가 약속된 언어로 주문을 외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드루이드와 드루이디스의 마법은 달랐다.

“주문이 없다니, 그런 마법도 있었나!”

괴도 네온이 경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드루이드와 드루이디스의 비전(祕典)이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데에 반해, 마법의 완성에는 말로 하는 주문이 아닌 정교한 마법진의 작성이 필요했다.

언어만으로 마법진의 모습을 전달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기에 그들의 마법은 위력은 강력해도 습득하기가 몹시 어려웠다.

파아아앗!

구슬비가 전개한 마법진에서 맹렬한 빛과 함께 거대한 나무가 등장했다.

나무가 뿌리는 빛의 씨앗에 닿을 때마다 에너미들이 차츰 녹아 사라졌다.

구슬비가 부른 빛의 씨앗은 피아 구분을 명확하게 하는지, 괴도 네온이나 구슬비에게 씨앗이 닿으면 온기만을 전할 뿐, 어떤 데미지도 입히지 못했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조용히 녹아 없어지는 에너미를 보며 괴도 네온이 감탄했다.

“이게 드루이드의 마법인가……! 괴도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군.”

“난 괴도가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을 해야 알아들어! 드루이디스의 위대한 마법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

“다음 에너미는 내가 직접 처리하마. 진정한 괴도의 카드 마술쇼의 위력을 보여 주지.”

“너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하는 거지?”

괴도 네온과 구슬비가 티격태격하며 말다툼을 할 때였다.

갑자기 두 사람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 이 공간이 이계화됐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무거운 압력이 느껴졌다.

“이게 뭐야……!”

“뭔가 오는군. 대비하자.”

구슬비가 자신이 아는 것 중 가장 강력한 마법을 캐스팅할 준비를 하고, 괴도 네온이 이능 트럼프 카드를 펼쳐 손에 쥐었다.

그사이에도 압박감은 점점 커졌다.

그때였다.

끼이익! 쿠구구구……!

순간 벽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리가 들리는 쪽을 보니, 도르래가 굉음을 뿜으며 벽을 들어 올리려 하고 있었다.

벽이 조금씩 들어올려질 때마다 그들을 짓누르는 이능압이 더욱 커져 갔다.

그때였다.

“눈을 감아!”

두 사람의 앞을 까마귀 가면을 쓴 누군가가 가로막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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