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라이벌 (7)
포모르 마족의 가든이 되어 이계화된 공간.
예기치 못한 공간의 변화로 두 사람의 추적이 더 길어졌다.
이계 내부의 에너미와 조우할 때마다, 지도와 달라진 내부 구조를 확인할 때마다 문새론의 파생 스킬 ‘집중 취재’를 몇 번이나 다시 사용해야 했다.
‘원래 계획대로 취재가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
문새론은 기사를 쓰기 위해 파생 스킬을 습득했다.
문새론은 가변적인 환경 속에서 직접 취재를 해 왔기에 스킬도 그런 취재 환경에 맞춰 개발했다.
그래서 한정된 정보 속, 갑작스럽게 등장한 변수에도 유연하게 대처해 새롭게 최적의 추적 루트를 계산하는 것이 가능했다.
지금 이 상황처럼.
‘천동하의 ‘건곤(乾坤)을 품은 눈’처럼 직접 눈으로 보는 것에 비해선 적중률이 떨어지지만, 효율은 훨씬 나아.’
몇 번의 추적 루트를 수정하며 이동한 결과.
‘집중 취재’는 몇 번을 다시 사용해도 한 방향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괴도 네온의 이능파가 느껴진다!’
처음 유리창을 부수고 괴도 네온이 등장한 순간, 폭죽처럼 허공에 뿌리던 그 특유의 이능파가 느껴졌다.
괴도 네온은 이능파에도 괴도다운 개성을 줘야 한다며 이능파를 튀게 만드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기에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이능파가 느껴지는 방향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이 서 있었다.
“겉과 속 모두가 아름다워야 진정한 괴도가 될 수 있는 거야.”
“난 괴도가 아니라고 했잖아!”
“부정하지 않아도 된다. 너도 나처럼 훌륭한 괴도가 될 수 있어!”
괴도 네온은 그사이에 구슬비를 상대로 괴도 타령을 하고 있었나 보다.
괴도 네온은 은광고 외부에서 활동했기에 플마고 속에서 구슬비와는 접점이 없었다.
그래도 괴도 네온이 괴도 운운할 것이란 건 쉽게 예상이 됐다.
딱히 구슬비가 상대가 아니라고 해도 괴도 네온은 기승전괴도 논리를 내세워 대화를 이어 갔을 거다.
손가락이 닳아 없어질 것 같은 과장된 어조로 괴도 철학을 설파하는데 점점 머리가 아찔해졌다.
‘괴도 네온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굉장하지만, 정말 근본이 없구나.’
괴도 네온이 모티브로 삼고 존경하는 괴도는 ‘괴도 신사 아르센 뤼팽’.
아르센 뤼팽은 천의 얼굴을 가진 불살주의의 괴도 신사로, 프랑스 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소설에서 등장한다.
괴도 네온의 모티브는 프랑스인.
그러나 정작 예고장을 날려 별명이 붙은 곳은 영국이다.
한편, 현재 그가 착용 중인 눈부신 투우복은 스페인의 전통 의상이다.
‘하지만 괴도 네온은 한국인이야. 진짜…… 중구난방인 설정이구나.’
이러한 설정에도 불구하고 괴도 네온은 당당했고 구슬비는 그런 괴도 철학에 휘둘리지 않고 맞섰다.
“난 괴도가 아니야! 괴도보다 더 멋있고 위대한 드루이디스라고!”
구슬비는 그 말을 하곤 드루이디스의 마법을 선보였다.
정교하게 바닥에 그린 마법진과 절묘하게 움직인 마나의 흐름 속에 구현한 빛의 나무.
그 위력 속에 에너미들이 허무하게 스러졌다.
그런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도 구슬비는 여유가 있었고, 괴도 네온은 기죽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실력이 출중해. 이게 단순한 이계라면 둘이서 충분히 공략했을 거야.’
그러나 이곳은 포모르 마족의 소굴이며, 현재 포모르 마족의 정점에 서 있는 자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둘은 예고장을 통해 포모르 마족의 은밀한 경매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파티의 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등장해 제대로 찬물을 끼얹었다.
마왕은 침입자를 살려 두는 관대함이나 살아서 붙잡아 정보를 캐낸다는 여유를 부리지 않을 거다.
‘포모르 마족의 얼굴에 대대적으로 먹칠을 했으니 빠르게 말살하려 할 거야.’
내 예상이 맞은 건지, 강렬한 이능압과 존재감이 느껴졌다.
보통 가든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는 가든을 지배한 주체지만, 지금 힘을 발산하는 무언가는 가든의 주인이 아닌 것 같았다.
지금 이 주변을 짓누르고 있는 힘은 가든의 규모에 비해 훨씬 거대하고 무거웠으니까.
‘황지호가 호족이 소유한 가든의 주인이 아닌 것처럼, 포모르 마족도 그 마왕이 아닌 다른 마족이 가든을 관리하는 건가……!’
끼이익! 쿠구구구······!
도르래가 움직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동시에 벽이 위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힘의 근원은 벽 뒤에 있었다.
포모르 마족의 마왕.
이계화된 공간.
열리는 벽과 동시에 전개되는 강력한 힘.
두 사람을 향한 적의.
이 모든 것을 고려해 보니 결론이 나왔다.
‘……외눈의 마왕 발로르의 눈꺼풀이 열리고 있는 건가!’
외눈 거인 발로르의 죽음의 눈, 사안(死眼).
발로르의 눈은 강력한 힘을 품어 시야에 닿는 모든 것에게 죽음을 안기고 파괴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거대한 힘 탓에 발로르는 늘 눈을 감고 있다고 하는데, 발로르의 눈꺼풀을 들어 올리기 위해선 장정이 넷 이상 필요하다고 전해진다.
‘벽을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도르래로 뒤에서 눈꺼풀도 열고 있는 거야.’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을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나는 열리려는 벽 앞으로 뛰어들며 외쳤다.
“눈을 감아!”
발로르의 사안(死眼)의 영향력이 가장 크게 발휘하는 것은 각 개체의 눈이다.
파괴를 부르는 눈에 신체 부위가 닿는 것 자체가 위험하지만, 눈과 눈이 마주치면 사안(死眼)에 사로잡혀 그대로 죽음을 맞이한다.
‘우선 새로운 벽을 세워야겠지……!’
〈광림,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합니다.〉
광림으로 어떤 능력을 써서 이 상황을 막을지는 곧바로 떠올랐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라이벌을 구하기 위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능력을 발휘한 이가 있었다.
라이벌이라곤 해도 한쪽이 일방적으로 그렇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뿐이지만.
‘평소에는 풀 쪼가리 하나 제대로 부르지 못했는데.’
자칭 염준열의 라이벌, 마진승이 제대로 광림을 발휘하게 된 건 염준열의 목숨이 노려지던 순간이었다.
그날, 염준열의 전력을 깎기 위해 흑막은 비를 불렀다.
홍룡과 불꽃의 힘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어 염준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천동하는 마진승에게 어떤 제안을 했다.
마진승은 천동하의 제안을 망설임 없이 받아들여 광림을 사용했다.
‘말이 제안이지, 그냥 대신 죽어 주자는 것과 다름없었는데…….’
3학년이 된 천동하와 마진승은 은광고와 한반도를 노리는 음모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 음모에 대항하기 위해선 자신들보다는 염준열이 적격이라는 것도.
그래서 천동하의 ‘건곤(乾坤)을 품은 눈’을 통해 암살자들의 위치와 염준열의 퇴로를 고려해 풀의 벽과 미로를 배치하고 마진승 본인은 미끼가 되었다.
그 결과, 그가 부른 풀의 벽과 미로는 흑막과 암살자들의 눈을 가리고 추적을 막아 염준열의 활로를 뚫었다.
마진승은 염준열을 대신해 암살자의 손에 쓰러지고 사후 ‘초원의 귀공자’라는 이명을 받게 되었다.
그가 사망한 후, 덩굴로 된 벽과 미로는 사라졌으나 폭우로 진흙탕이 된 허허벌판 위에 생긴 초원은 여전히 남은 탓에 그런 이명이 붙은 것 같았다.
〈해당 캐릭터의 광림, ‘초원을 부르는 함성’을 사용합니다.〉
하아아압!
광림의 발동과 동시에 내 목에서 마진승 특유의 큰 목소리가 우렁차게 흘러나왔다.
마진승의 광림은 그가 내지르는 목소리에 따라 초원을 이 자리에 부르는 것.
평소 마진승은 목소리만 컸지 광림은 제대로 발동시키지 못했고, 은광고의 개구쟁이들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그러나 라이벌을 위해 광림을 쓰기로 결심한 직후, 마진승의 목소리에 응해 초원이 등장하게 되고 그는 라이벌을 구하는 데에 성공한다.
지금 내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지키기 위해 초원을 부르는 것처럼.
파아아앗……!
내 발치에서 무서운 속도로 덩굴과 풀이 뻗어 나와 초원이 형성되고 덩굴의 벽이 만들어졌다.
여전히 도르레가 마왕의 눈꺼풀과 그 사이의 벽을 들어 올리고 있었으나 그보다 더 빠르게 새로운 벽이 만들어졌다.
내 말에 따라 눈을 감았던 괴도 네온과 구슬비가 초원의 벽이 형성된 걸 알아채고 다시 눈을 떴다.
“굉장해……! 꿈속에서 눈 한 번 깜빡했을 때 풍경이 바뀌는 장면 같아! 마법인가? 아니, 이 정도의 규모면 광림이겠지!”
구슬비가 ‘초원을 부르는 함성’이 바꾼 주변 광경을 보고 감탄했다.
이능파가 밴 풀들은 웬만한 충격이나 이능에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했지만, 불에 약했다.
도망갈 시간은 벌 수 있지만, 이 능력에 관해 몰라도 겉모양이 식물인 만큼 약점을 쉽게 간파당할 수 있으니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가자. 미로를 복잡하게 만들어 둬서 탈출 루트가 좀 길어. 빨리 이동을…….”
“……나타날 줄 알고 있었다.”
괴도 네온이 혼잣말을 툭 뱉었다.
툭하면 괴도 철학과 신사도를 표방하는 괴도 네온이 무례하게 말을 끊을 리는 없으니 저도 모르게 뱉은 소리인 듯했다.
괴도 네온은 뒤늦게 ‘실례했군.’이라며 사과했다.
“뭐야, 너. 저 까마귀 가면이랑 아는 사이야?”
“물론이다. 모르는 사이일 리가 없지.”
아니, 모르는 사이인데.
그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내가 일방적으로 플마고를 통해 알고, 괴도 네온의 예고장을 통해 알고 있긴 했지만 우리는 모르는 사이다.
부정하기 전에 네온이 ‘그 단어’를 말해 버렸다!
“나보다 한반도에 이름을 날린 괴도, 라이벌이 될 숙명의 존재. 적벽괴도!”
각오는 했지만, 괴도 네온으로부터 ‘그 단어’를 듣는 건 상상 이상으로 오글거렸다.
지금 내가 부른 초원의 벽이 내 이능파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면 시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잘 보니까 표면이 조금 굽은 게 내 오그라든 감성의 영향을 받은 것 같기도 했다.
괴로움에 말을 잇지 못하고 있을 때, 연신 감탄하며 나를 보던 구슬비가 실망한 어조로 말했다.
“뭐야…… 또 괴도야? 적벽괴도? 아, 그러고 보니 그런 괴도도 있었네. ……붉은 벽의 괴도라니, 특이한 이름이라고 생각했어.”
“괴도 네온에 비해 적벽괴도는 낭만과 격이 떨어지는 이름이긴 하지.”
“엄청 적벽괴도를 의식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 봤자 아직 아무 실적도 없는 너에 비해 적벽괴도는 이미 이름을 날린 지 오래야.”
왜 ‘그 단어’가 없으면 이 둘은 대화를 못 하는 것인가!
괴도 네온이야 괴도라는 단어가 없으면 스스로 존재 의의가 반 이상이 사라진다고 믿고 있으니 그렇다 쳐도, 왜 구슬비는 저 괴도 놀이에 어울려 주는지 모르겠다.
화제는 또 내 쪽으로 돌아왔다.
“방금 우리는 큰 위기에 처했던 것 같았어. 구해 줘서 고맙다, 적벽괴도. 하지만 괴도로서의 승부를 양보할 생각은 없어!”
그런 승부는 처음부터 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괴도 네온이 이긴 걸로 하고 다시는 ‘그 단어’를 입에 담지 않으면 안 될까?
“……이 자리에서 벗어나는 걸 우선시하자.”
괴도의 화제를 돌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제안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래, 이동 중에 괴도로서 품고 있는 격을 확인할 겸 대화를 나누어 볼까. 우선 괴도 철학으로 승부를 내자, 적벽괴도!”
나는 이동하는 내내 ‘그 단어’의 압박에 시달려야 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3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