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00화 (399/925)

61. 라이벌 (11)

가든의 밖은 파티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시 마족과의 교전이 이어질 가능성을 생각해 긴장했지만, 아무도 없었다.

발로르를 지나쳐 오리라고 예상하지 못한 건가?

아니면 단순히 그 죽음의 눈에 휘말리는 것을 염려해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반드시 추적하러 오겠지.’

발로르는 신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루의 창에 눈을 꿰뚫린 게 아니다.

잠깐 빛을 뿜어 그 눈을 멀게 했을 뿐.

발로르가 회복하고, 가든의 주인이 상황을 전달해 명령을 내밀면 추적하러 올 것이다.

과정이야 어쨌든 괴도 네온이 예고장에서 언급한 천재의 그림이 탈환되었고, 경매에 올릴 신보 역시 눈앞에서 빼앗겼다.

‘경매는 중단되겠지…… 이만한 초대객 앞에서 망신을 준 꼴이 되었어. 훔친 물건으로 경매를 하려 했으니 자업자득이지만.’

그러나 포모르 마족이 가장 정신을 크게 빼앗긴 건 경매나 ‘이무기의 귀천’이 아닐 것이다.

포모르 마족의 현 수장이자 최대 전력인 마왕 발로르와 상극인 신보, 루의 창이 넘어간 게 컸다.

아무도 다루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으니 경매에도 내놓고 다소 허술하게 보관했을 텐데, 내 손에서 빛을 발한 루의 창은 발로르의 눈을 멀게 했다.

‘‘만물 사용’ 스킬 레벨이 높은 편이었고, 미처르의 서포트가 있던 덕에 이 정도로 다룰 수 있던 거겠지.’

발로르의 영향권에서 벗어난 직후, 나는 루의 창을 카드화하여 아이템창에 넣어 뒀다.

마음 같아서는 마족의 영역, 아니, 영국을 벗어날 때까지 루의 창을 손에 쥐고 있고 싶었지만, 정신력 소모가 심했다.

신화 속에서도 피를 요구하는 루의 창을 재우기 위해 양귀비가 필요하다 하지 않았는가.

‘내가 포모르 마족이라면 나를 쫓겠지. 그리고 가장 큰 단서는 괴도 네온과 구슬비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은 내 걱정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기색이 조금도 없었다.

머리 좋은 둘이라면 이런 사정을 이해하고 있을 텐데, 둘은 옥신각신하기 바빴다.

“루의 창이 발산하는 힘을 고려했을 때…… 신보는 내가 다룰 물건이 아닌 것 같아. 멀린 스승님은 이래서 나보고 신보를 그냥 보고만 오라고 한 걸까.”

“포기가 빠르군. 괴도는 쉽게 포기하지 않는 법이야!”

“그러니까 난 괴도가 아니라고! 그런 너는 괴도 주제에 선수를 빼앗겼잖아. 네가 노리는 물건은 쟤가 가져갔다면서?”

“아픈 곳을 찌르는군. 하지만 촌철살인 같은 독설 또한 괴도가 가져야 할 덕목이다.”

“독설이 덕목이라는 건 무슨 소리야.”

저 괴도 논란에 휘말리는 걸 막기 위해 최대한 말을 삼가고 있었지만, 입을 열기로 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오랜만에 입을 열어서 그런지 괴도 네온과 구슬비가 바로 말을 멈추고 내 말에 귀 기울였다.

두 사람은 마치 짜고 친 것 같은 딱 맞는 움직임으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입을 연 건 구슬비였다.

“아이들을 데리고 후퇴할 거야. 도와주는 대신 멀린 스승님의 꿈에 인도하기로 했거든.”

구슬비는 머뭇거리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고마워. 네가 없었으면 무사하지 못했을 거야. 뭔가 보답하고 싶은데, 버프랑 디버프 효과가 걸린 물약 정도는 만들 수 있는데…….”

“나도 감사 인사가 늦었군. 괴도로서 받은 은혜를 잊어선 안 되지.”

둘은 나에게 답례품을 주고 싶은 눈치였다.

감사 인사만으로도 충분한데,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은 마음 씀씀이가 남다르다.

‘굳이 보답을 하고 싶다면, 다른 걸 부탁하고 싶은데…….’

보답이라는 말에 머릿속에 미처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에탄을 되찾았지만, 그녀와 보낼 수 있었던 추억과 시간들은 영원히 되찾지 못했다. 내 아이가 같은 일을 겪지 않도록 도와다오.

언뜻 듣기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지만, 미처르가 칭한 ‘내 아이’의 상황을 떠올려 보니 대충 짐작이 갔다.

‘이대로 가면 두 사람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냥 지나가 버리겠지.’

미처르가 말하는 아이는 괴도 네온 하나겠지만, 둘 다 등교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였다.

물론, 나는 등교하지 않겠다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선택을 존중한다.

‘두 사람이 학교를 다닐 필요는 없긴 해.’

한 명은 이미 웬만한 프로 디자이너보다 나은 솜씨를 가지고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유명한 멀린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

필요한 스펙을 갖추고, 관심 있는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 학교에 다닐 필요는 없는 셈이다.

‘그래도 두 사람이 학교에 나와 줬으면 좋겠어.’

괴도 네온이 학교에 나오기 시작하면 내 손발이 다 닳아 없어질지도 모르나 그래도 등교했으면 좋겠다.

최편득이나 부정 입학자 같은 쓰레기들이 있는 학교라면 내가 말리겠지만, 은광고는 다르다.

고등학생 시절은 인생에서 단 3년뿐.

유급을 하면 더 길어지긴 하겠지만, 3년에서 크게 늘지는 않을 거다.

그 시간 동안 같은 또래의 친구를 만나고 생각지 못한 분야의 지식을 배우기도 하면서 두 사람의 세계를 넓혔으면 좋겠다.

“아쉽지만 이번에는 완패했으니, 다음을 기약하겠다. 제 손으로 한반도의 화가들에게 그 그림을 돌려주지 못한 건 아쉽지만, 중요한 건 그게 아니니까.”

다행히도 둘 다 마족의 소굴에서 버틸 생각은 없나 보다.

나는 계속 머릿속에서 생각하고 있던 화제를 입에 담았다.

“후퇴한 다음에는? 등교할 생각은 없어?”

등교라는 말에 괴도 네온이 백조 가면이 일그러질 정도로 놀란 얼굴을 했다.

“내 정체를 간파하고 있었나!”

괴도 네온이 과장된 어조로 답하며 비틀거렸다.

구슬비는 저만큼 호들갑을 떨진 않았지만 떡갈나무 지팡이를 꽉 쥐었다.

“아직 젊은 괴도인 나는 성장을 마치지 못해 고등학생 티가 나긴 하지. 너도 마찬가지다. 우린 괴도로서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어!”

“저 괴도는 자기 입으로 고등학생이라고 다 까발리네.”

“너희가 고등학생이란 건 알고 있어. 두 사람 다 은광고 학생이잖아.”

정확히 말하면 은광고의 0반 소속일 거다.

괴도 네온의 학년은 모르지만, 구슬비는 명실상부한 1학년 0반이다.

“어떻게 그걸 알았지?”

“만우절에 정문 시계탑에 네가 장난질했잖아. 빅 벤에 한 거랑 비슷했어.”

“크윽, 진부한 예술이 괴도의 발목을 잡았구나! 하지만 너무 멋진 작품이었기에 모티브를 버릴 수가 없었다!”

“쟤는 그 괴도 짓거리를 학교에서도 했구나…….”

괴도 네온이 괴로워하는 걸 보며 구슬비는 질린 목소리를 냈다.

큰일 났다, 구슬비는 등교할 마음이 더더욱 사라진 듯하다.

“……멀린 스승님이 널 따라가라고 한 이유가 있나 보네. 그래서? 왜 학교 얘기를 꺼낸 거야?”

“은광고는 멋진 학교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국 본질은 학교. 정해진 시간과 규칙에 속박되어 인생의 황금기를 낭비하고 싶진 않다!”

“쟤 생각에 100% 동의하는 건 아닌데, 딱히 학교에 갈 필요 없으면 가기 싫은데. 별로 좋은 기억이 없어. 단체 생활이란 명목으로 싫은 장소에 싫은 사람과 같이 있어야 하잖아.”

두 사람 다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본질을 따지면 ‘자유’에 관한 이야기였다.

‘자유라…….’

은광고는 자유를 존중한다.

시험을 치러서 자신의 능력만 증명하면, 출석을 전혀 하지 않더라도 졸업이 가능하다는 파격적인 교칙을 가지고 있다.

은광고등학교는 이계 충돌 후에 플레이어 특목고, ‘은광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등학교’가 되기 전부터 저 교칙을 유지했다고 한다.

처음엔 말이 많았다고 하나 은광고를 창립한 창시자가 무슨 로비를 했는지 몰라도 저 교칙을 밀어붙이는 데에 성공했다.

‘……태만한 와중에도 저 교칙만은 건드리지 못하게 했지.’

저 교칙은 황지호의 본질과도 관계가 있다.

개천신화 속에서 황지호는 천신에게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게 부탁하였다.

그리고 황지호가 그런 소원을 빈 이유는 게임 속에서 주수혁과의 대화를 통해 풀린다.

플레이어 마이스터 고등학교, 주수혁이 2학년이 된 시점.

제 정체와 나이를 숨긴 플마고 속 황호가 고등학교 2학년생 다운 말투로 묻는다.

[수혁아, 뭐 해?]

[응? 개천신화를 읽고 있었어.]

[개천신화? 어느 부분?]

플마고 속의 황호가 묻자 주수혁은 읽고 있는 홀로그램을 직접 보여 줬다.

황호가 홀로그램의 텍스트를 빠르게 읽으며 말했다.

[……백호가 외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홀로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을 향하는 장면이구나.]

[응, 이 부분에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어서.]

[어떤 부분이야? 아는 내용이면 설명해 줄게.]

게임 속 노친네는 경험담이니 다 알고 있을 텐데도 아는 내용이면 설명을 해 주겠다는 말로 돌려서 저렇게 표현한다.

주수혁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얼마 없는 반 친구의 호의를 기쁘게 생각한다.

[왜 백호가 혼자 이곳으로 향했는지 모르겠어. 청호는 이후에 신인을 지키다가 사경을 헤매게 된다는 구절이 있지만, 황호나 다른 호족은 어떻게 됐는지 설명이 없어.]

플마고 속 황호의 대사는 바로 나오지 않았다.

잠시 뜸을 들이다 황호가 입을 열었다.

[……이때 웅족이 외적의 편을 들었어. 호족은 병력을 나눠 웅족을 억누르면서도 외적을 토벌하고, 신인을 지켜야 하며, 한반도를 덮은 어둠의 근원을 지워야 했을 거야.]

게임 속의 노친네는 일순 여태껏 보이지 않던 표정으로 그렇게 잠깐 말한다.

말투는 간신히 덜 노친네스럽게 말하긴 했지만, 옛이야기를 꺼내다 보니 추억에 잠긴 얼굴이 나오나 보다.

[백호는 가장 위험한 길을 택해 홀로 어둠의 근원을 지워 한반도에 빛을 되찾기로 했고, 청호는 신인의 곁을 지키겠다고 했다.]

[그럼 황호는?]

[선택을 해야 했겠지. 황호가 제아무리 강력한 힘을 가졌다 한들, 이때는 어디에도 존재할 수 있는 은총을 받은 게 아니었잖아.]

[그렇네. 열린 하늘에서 천신이 내려와서 은총을 내린 건 이 전투로 외적이 완전히 사라진 이후였어.]

플마고의 황호는 주수혁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계속 그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황호는…… 청호와 함께 신인을 지키는 길을 택했겠지. 신인을 죽이고 싶어 하는 웅족과 외적이 넘쳐 났을 테니까.]

[신인은 한반도의 상징이었지. 제일 먼저 노려졌겠구나.]

이때, 플마고 속 황호가 고개를 조금 숙였다.

플마고 속 황호는 얼굴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황호가 가담한 결과 신인을 지켰다. 청호도 사경을 헤맸지만 살아남았어. 하지만 다른 곳은 그렇지 못했을 거야.]

[……지호야?]

이때, 플마고 속 황호의 CG는 어둡게 처리되어 일순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플마고 속 황호는 몇 초 후 다시 고개를 들고, 뻔뻔하게 고등학생 연기를 다시 시작했다.

[나는 이 학교의 교칙이 마음에 들어. 이곳에 소속한 학생들은 등교하느라 원하는 곳에 가지 못할 일은 없으니까.]

[하하하, 지호네 친척이 이사장님이었지? 나도 자율 등교는 좋은 교칙이라고 생각해.]

[이 학교가 폐교하는 날까지 그 교칙이 바뀔 일은 없을 거야.]

은광고에서 황지호가 이사장으로 있는 한, 두 사람이 걱정할 만한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다.

내가 머릿속으론 플마고 이야기를 회상하며 은광고의 교풍을 열심히 설명하니 두 사람이 납득했다.

“기간 한정이라면 괜찮을지도 모르겠군. 생각해 보겠다.”

“……나도 생각해 볼게.”

어쩌면 이제 두 사람이 등교해 줄지도 모르겠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01)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