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귀갓길 (12)
귀국한 후, 성국언은 일정을 소화하기 바빴다.
대부분 예정에 없던 일정들이었는데, 성국언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프로 플레이어 팀 마스터 혹은 간부진들과의 회동이 그러했다.
이 상황을 두고 성국언의 수석 보좌관 전무영이 이렇게 평가할 정도였다.
“그날 일찍 귀국해서 다행입니다. 의원님이 0반 후배 덕을 이렇게 보는군요.”
“하핫! 내가 사람 운은 따르는 편이지.”
영국에 체류 중일 때, 두 사람은 홍경복 화백을 통해 1학년 0반 학생들이 조의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싶어 한다고 전해 들었다.
그래서 둘은 후배들을 위해 일정을 당겨 이르게 귀국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이 귀국한 직후, 갑작스럽게 연락이 쏟아졌고 바쁜 일정이 이어졌다.
그런 상황은 주말을 지나 주중까지 계속되었다.
월요일 하루만 해도 성국언은 시간을 쪼개 오찬을 몇 차례나 가져, 오늘 성국언의 점심은 늦은 오후가 돼서야 끝났다.
말이 오찬이지 이제는 저녁 식사 시간에 가까운 시각이 되어 있었다.
“한국으로 거점을 옮기는 프로 플레이어 팀이 늘었군. 수가 많다 보니 고작 식사 한 번 하는 것도 쉽지 않아.”
“앞으로 더 바빠지실 겁니다.”
현재 한국의 국회의원 중 플레이어는 성국언 하나뿐이다.
또 그의 의원직과 관계없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은광고의 선후배 플레이어도 한둘이 아니다.
한국을 거점으로 삼는 프로 플레이어 팀이 증가할수록 성국언이 바빠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더 바빠지기 전에 영국 건을 마무리지어야겠군.”
“이무기의 귀천과 포모르 마족 중 어느 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전무영은 현재 조의신에게 맡긴 ‘이무기의 귀천’과 성국언에게 어떤 의뢰를 하려는 포모르 마족을 생각하며 물었다.
“후자 쪽이다. ‘이무기의 귀천’은 엄밀히 따지면 영국 건이라 볼 수 없지. 처음부터 이 나라의 일, 은광고에서 나온 단서와 관련 있으니까.”
“그렇군요. 확인해 보겠습니다.”
전무영은 서류 가방에 들어 있던 디바이스를 하나 꺼내 새로 온 메시지를 읽었다.
전무영이 홀로그램을 보는 시간이 길어지자 성국언이 물었다.
“포모르 마족이 연락했나?”
“네. 차명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다누 신족이 나서리라 생각했는데, 돌의 회수는 실패했나 보군.”
전무영이 성국언에게 전송한 홀로그램엔 포모르 마족의 메시지가 떠 있었다.
포모르 마족은 성국언에게 팔의 돌을 파괴해 줄 것을 다시금 청했는데, 단어 선택이나 어조가 전부 정중했다.
성국언은 무덤덤한 눈으로 메시지를 읽으면서도 이를 가증스럽게 여겼다.
인간이 신보를 파괴하도록 꾀어내려는 진족이 곱게 보일 리가 없었다.
“……의원님?”
전무영이 말을 걸자 성국언이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고 냉정함을 되찾았다.
성국언은 잡념을 떨쳐 낼 겸 자신의 생각을 읊었다.
“왕의 정통성을 입증하는 ‘팔의 돌’은 직접적인 쓸모는 없다고 해도 그 상징성은 다른 신보보다 앞선다. 다누 신족이 쉽게 포기했을 리가 없어.”
“동감합니다. 탈환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거라면, 조만간 재시도하겠죠.”
전무영이 동의를 표한 뒤로 잠시 대화가 끊겼다.
성국언은 잠시 말을 아끼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생각을 바꿔 볼까. 다누 신족은 돌을 회수하는 대신 다른 안배를 준비했을 가능성이 있다.”
“다른 안배라면 어떤…….”
“그 단서를 잡기 위해선 포모르 마족을 만나 보면 되겠지. 하지만 우리가 포모르 마족과 다누 신족 사이의 일에 이 이상 관여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지금은.”
‘지금은’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걸린 전무영이 되물었다.
“……필요가 생기면 관여할 예정이십니까?”
“물론이다.”
성국언은 그렇게 말한 후, 홀로그램을 전개해 자료를 읽기 시작했다.
자료의 내용은 켈트 신화와 그 전승.
그중에서도 포모르 마족과 다누 신족에 얽힌 것들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최근 수면을 거의 취하지 못한 탓에 자료를 보는 성국언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전무영이 생수를 건네며 말했다.
“의원님, 오늘은 이만 들어가 쉬십시오.”
“하핫, 아직 해도 안 졌는데 쉬라니. 아, 이번 주 이계 공략이나 할까.”
성국언은 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번엔 플레이어 협회의 이계 경보 페이지까지 열고 있었다.
‘……쉬셨으면 하는데.’
전무영은 성국언을 쉬게 하기 위해서 꾀를 내었다.
성국언이 쉴 생각이 없다면 조금이라도 부담이 덜 가는 일정으로 조정하면 될 것이다.
적어도 켈트 신화의 전승 자료를 원서로 읽는 것보다, 이계 공략을 하는 것보다 단순하고 기력이 덜 소모되는 일정.
전무영이 스케줄 표를 뒤적거리다 그럴듯한 걸 발견했다.
‘마침 그 초등학생이 친척 집에서 돌아온 것 같군.’
광일초등학교 잠입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임무를 수행하던 당시, 그의 은신 스킬을 꿰뚫어 보던 초등학생이 있었다.
그 초등학생이 소속한 반의 담임이 사라진 경위나, 보유한 잠재력이 심상치 않아 성국언에게 보고했더니 그가 관심을 보인 바 있었다.
성국언은 그 초등학생과 직접 만나려 했지만, 친척 집에 머무는지 계속 부재중이라 좀처럼 만나기 어려웠다.
그리고 오늘, 그 초등학생의 주소상 등록된 곳에서 등교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이계 공략을 하는 것보다는 재능 있는 초등학생과 만나는 게 심신적인 부담이 적겠지.’
그렇게 판단한 전무영이 제안했다.
“의원님, 저번에 말씀드렸던 광일초등학교의 학생이 오늘은 집으로 귀가할 것 같습니다.”
“그 아이가? 지금 가도 늦지 않나?”
“네, 아직 여유가 있습니다. 오늘은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이더군요.”
다행히 성국언은 이 제안을 기껍게 받아들였다.
전무영이 의도한 대로 성국언은 광일초등학교의 수업이 끝날 때까지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광일초등학교의 방과 후.
제법 늦은 시각이 되었으나 그들이 만나고자 하는 학생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초등학생들 대부분이 귀가를 하지 않았나, 예정보다 늦는군. 무슨 일이 있는 것 아닌가?”
“……확인해 보겠습니다.”
전무영은 그렇게 다시 초등학교에 잠입하게 되었다.
다행히 이번 잠입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전무영은 대상, ‘황유호’의 안부를 확인한 후 곧장 복귀했다.
“오늘은 황유호 학생의 친척이 마중 나온다고 하는군요. 마중 올 때까지 기다리는 중이라 합니다.”
“마중?”
“나이 차이가 꽤 나는 사촌 형이라고 들었습니다.”
“사촌 형이라…… 자료에는 없던 것 같은데. 나중에 다시 알아봐야겠군.”
그 사촌 형의 정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알게 되었다.
곱상한 눈을 한 초등학생과 나란히 걷고 있는 이는 그들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전무영은 환한 얼굴로 말했다.
“김신록 선생님과 황유호 학생이 친척 사이인가 봅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것 같은데.”
“족보상 꼬일 수도 있죠. 세상이 좁네요. 우연을 가장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성국언은 얘기하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둘을 보며 잠시 침묵했다.
이목구비도 다르고 나이를 고려해도 맞지 않고, 뒤를 캐 봐도 엮인 바가 없는데 자꾸 옛 스승이 연상되었다.
김신록은 왼쪽 눈을 긴 머리로 조금 가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옛 스승을 생각나게 했다.
머리 모양 외에도 겹치는 부분이 있긴 했다.
‘……용제건이 선생님을 귀찮게 했었는데. 그것 때문에 그런가.’
성국언은 기시감을 억누르며 전무영의 뒤를 따랐다.
전무영은 김신록에게 얼른 인사하러 가고 싶은지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전무영은 김신록 앞에 서서 바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선생님, 또 뵙습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말씀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김신록은 어쩐지 긴장한 얼굴로 전무영을 바라봤다.
옛 제자와 만난 스승의 태도라고 생각하기 어려워 성국언은 그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한편, 그 옆의 초등학생은 눈을 반짝거리며 인사했다.
전무영에 이어 성국언에게도 꼬박꼬박 인사를 하는 게, 초등학교에서 한때 고립되었던 아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밝은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이 아이는 묘하게 들떠 보이는데.
성국언은 마음에 걸렸지만, 어린아이가 하는 인사를 무시할 수 없어 마주 인사했다.
성국언은 초등학생에 이어 김신록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또 뵙습니다. 김신록 선생님.”
성국언은 붙임성 있게 인사했으나 만난 지 얼마 안 되는 타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차 한잔 하는 게 어떻습니까. 먹고 싶은 건 있나?”
“전 아이스크림이 좋아요.”
“하핫, 그래. 먹으러 가자!”
성국언은 자연스럽게 초등학생과 말을 나누며 자리를 바꿨다.
김신록은 훌쩍 자라 어른이 된 옛 제자를 씁쓸하게 응시했다.
그 옆에서 아무렇지 않게 초등학생으로서 성국언을 상대하는 호족의 수장, 황호를 보니 더더욱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 *
황명호 대저택 별채.
황지호 이 노친네는 신나게 웃기만 할 뿐 제대로 말을 전해 주지 않았다.
황지호는 별채로 이동할 때까지 제대로 된 말을 전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뭐, 별거 없었다. 오늘은 식사를 함께했지. 성국언이 아이스크림을 사 주더군. 녹차와 초콜릿의 조합도 나쁘지 않았다.”
“그건 안 물어봤는데.”
저녁 식사를 마친 후에야 아주 영양가 없는 정보를 노친네가 흘렸다.
아니, 저 노친네는 뻔뻔하게 초등학생 모습으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아이스크림을 얻어먹었나 보다.
“성국언은 진족과 인간을 구분하는 능력이 있는 걸로 아는데요. 그 능력을 썼나요?”
식사하는 내내 반찬을 밀어 주거나 사소한 잡담만을 할 뿐, 내가 궁금한 내용에 관해선 도통 입을 열지 않던 은호가 처음으로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다.
황지호 저 노친네는 얄밉게도 은호의 말에는 순순히 답했다.
“안 썼다기보다는 쓸 타이밍을 잡지 못하는 것 같더군. 전무영은 김신록을 완전히 신뢰하고 있으니, 차마 쓰지 못하는 거겠지.”
김신록의 옛 제자인 전무영의 신뢰가 꽤 두터운 모양이다.
황지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그래도 이번 기회로 이 넷이서 한 번 더 만날 기회가 생겼다. 아마 둘은 광일초등학교의 그 교사에 대해 궁금한 것 같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그때 더 할 수 있겠지.”
황지호의 말에 납득을 하면서도 화가 조금 났다.
아니, 별 얘기 없었는데 뭔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끌었단 말인가.
답답했지만 속으로 눌러 참고 다른 얘기를 꺼내기로 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이 얘기를 하기 위해서였으니까.
“식사도 마쳤으니 내가 영국에 간 이유에 관해 말하고 싶은데.”
다행히 이번엔 은호도, 황지호도 내 입을 막으려 들지 않았다.
“그럼 들어 보지. 이미 비행기 안에서 ‘이무기의 귀천’의 탈환을 위해서란 건 들었지만.”
노친네가 쓸데없는 사족을 덧붙이긴 했지만, 나는 영국에서 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설명을 마친 후, ‘이무기의 귀천’을 꺼냈다.
“이 그림에 ‘동결형 이계’와 관련된 단서가 있을 가능성이 커.”
말보다 직접 보는 게 빠를 것이다.
나는 설명을 하며 아이템창에서 ‘이무기의 귀천’을 꺼내 실체화했다.
이능파를 꺼내자 UR급 아이템 특유의 색을 내며 카드가 그림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파아앗!
그림이 나타나고, 구름 사이로 승천하려는 이무기의 위용이 드러났다.
“멋지군……! 이게 한국 최고의 화백이 그린 작품인가.”
황지호가 감탄사를 뱉는 사이, 은호는 조용히 그림을 관찰했다.
은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그러지?”
황지호의 질문에 은호가 뒤늦게 답했다.
‘이무기의 귀천’을 보는 은호의 눈에는 이능파가 실려 있었다.
“제 눈에 이 그림은…… 지도로 보입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