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귀갓길 (13)
은호는 탄복한 목소리로 이무기의 귀천을 극찬했다.
“한반도 유수의 플레이어가 이계에서 나온 재료로 만든, 카드화가 가능한 아이템답군요. 미적인 가치만 있는 게 아닌 듯합니다.”
‘지도’라는 단어에 순간적으로 은호에 관한 정보와 ‘이무기의 귀천’을 엮어서 생각해 봤지만, 바로 답이 나오지 않았다.
힌트를 준 건 다른 호랑이였다.
“통찰계 스킬로 보면 숨겨진 내용물이 보이게 되는 구조인가 보군.”
그렇게 말한 황지호의 눈에 황금빛 이능파가 스쳤다.
파아아……!
그걸 본 후에야 뒤늦게 알아챘다.
주요 호족들은 모두 보유한 ‘안광’ 스킬을 사용한 듯했다.
‘은호는 호족이니까 ‘안광’ 스킬을 쓸 수 있겠구나.’
은호의 눈에 이능파가 감도는 것까지 느꼈는데 왜 바로 알지 못한 걸까.
은호가 호족의 일원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인지했는데도 아직 내 머릿속 어딘가에선 천성헌 시절의 인상이 강한 것 같다.
나는 뒤늦게 호랑이들을 따라 ‘안광’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스킬이 발동하자 이능파가 눈으로 밀려드는 감각과 동시에 시야가 변했다.
눈앞이 선명해지고 안구의 움직임에 따라 주변의 이능파 흐름이 바뀌는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이 상태로 ‘이무기의 귀천’을 바라보니, 확실히 안광 스킬이 없을 때와는 다른 게 보였다.
‘이무기의 몸체 곳곳에 뭔가 보이긴 하네.’
이무기의 비늘 일부가 이능파를 머금어 그림 곳곳에서 빛을 내고 있었다.
‘그냥 점하고 선 같은데…… 이걸 지도에 대입하기는 어렵지 않나.’
비유하자면 별자리 그림 곳곳에 박힌 별과 별자리를 알아보기 쉽게 별 사이에 그어 둔 선들처럼 보였다.
지도라고 우기면 우길 수 있겠지만, 어딘가 마음에 걸렸다.
‘이걸 어떻게 지도라고 보는 거지? 다른 단서가 더 있나?’
자세히 들여다봤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단순히 내 안광 스킬의 레벨이 낮아서 지도가 보이지 않는 것뿐인지, 아니면 은호가 다른 지식을 바탕으로 이걸 지도라고 판단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지도라…… 은호 네 눈에는 저 그림이 지도로 보이나? 이유를 묻지.”
안광 스킬 레벨이 높을 게 분명한 황지호가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후자인 듯하다.
눈에서 이능파를 거둔 은호가 말했다.
“저에게 천기(天機)를 읽는 능력이 있었다는 것, 기억하세요?”
은호는 내 쪽을 보며 말했다.
천기라는 단어에 이 세계에서 은호가 눈을 떴던 날, 황지호와 그가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천기라도 읽었느냐? 신화의 시대는 지금과 달라서 변수가 많았을 텐데······.
―저에게 더 이상 천기를 읽는 능력은 없어요. 천기를 거스르는 대죄를 범해서요.
하늘과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와 중대한 기밀을 의미하는 천기(天機).
이 세계에서 천기란 아주 쉽고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미래’를 의미한다.
천기로 읽은 것을 무조건 미래로 이어진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는 것 같았지만.
‘플마고에서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았고, 이 세계에선 학문상 용어로 존재하는 수준이라 잘 모르겠네.’
세계관에 천기라는 단어가 존재하고 사전상 의미는 알고 있었지만, 은호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기 힘들었다.
이미 은호에게서 사라진 능력인 듯했으니, 알아도 별 소용은 없을 거다.
사실 그 천기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굳이 말하자면 천기를 읽는 능력을 잃었다는 계기, ‘천기를 거스르는 대죄’ 쪽이 신경 쓰여.’
신경 쓰이긴 했지만 은호에게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대죄라 표현할 정도면 보통 일이 아닐 테니, 함부로 물어선 안 될 것 같았다.
나는 의문을 접고 있는 사실만을 말했다.
“저번에 이야기하는 걸 들어서 기억해.”
“역시 의신이 형은 기억해 주고 계셨군요.”
은호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기는 하늘만 알아선 읽을 수 없습니다. 땅과 그사이의 존재에 통달해야 비로소 하늘의 뜻도 보이는 법이지요. 셋은 결국 하나니까요.”
은호가 말하는 하늘과 땅, 그사이는 삼재(三才)를 가리키는 듯했다.
천기를 읽는 자는 삼재에 능통해야 했나 본데, 그게 은호가 봤다는 지도와 관련이 있나 보다.
은호는 말을 잠시 멈추고 ‘이무기의 귀천’ 옆에 홀로그램을 하나 띄웠다.
홀로그램에는 한반도의 지도가 출력되어 있었다.
“천기를 읽기 위해서는 이 땅에 관해 잘 알아야 했습니다. 한반도에 충만한 지력을 잇는 지맥에 관해서도요.”
“설마 지금 여기에 보이는 건…….”
황지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지도와 ‘이무기의 귀천’을 번갈아 바라봤다.
은호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곤 홀로그램 위에서 손을 놀렸다.
“신화의 시대가 지나고 지맥은 사라지거나 감지하기 어렵게 되었을 거예요. 상위 존재와 진족의 존재처럼, 지력도 이 세계에서 흐릿해졌겠죠. 이계 충돌이 발생할 때까지는.”
하얀 손이 홀로그램 위에서 움직일 때마다 선이 새겨졌다.
은호는 손을 움직이면서 황지호에게 말을 걸었다.
“황호 님도 한반도의 지맥 위치를 전부 파악하지는 못하시죠?”
“그래, 기록에 남지 않았으니까. 은광구 내의 지맥을 파악하는 게 고작이었다.”
은호와 황지호의 말대로 지력 개발은 난항을 겪고 있다.
지력이 품은 힘에 비해 정확한 지맥의 흐름을 파악하기 어렵고, 다루기도 까다로웠던 탓이다.
그나마 지맥의 형태가 제대로 파악된 건 은광구 정도였다.
‘정부나 협회가 호족 정도로 지맥을 파악하진 못했겠지만, 지력 터미널을 개발할 정도론 그 흐름을 알아챘지.’
이 사실은 4대 그룹 암투 사건의 중심에 있던 사업 중 하나, 은광구 광일동의 ‘지력 터미널’ 개발로 이어졌다.
차후 또 다른 지맥을 파악해 내리란 장담이 없었기에 지력 터미널 개발을 두고 4대 그룹이 암투를 벌이게 된다.
이 세계에선 은광한빛보육원과 남궁 그룹에 얽힌 사건에서 그 전조가 보인 바 있다.
황지호도 그걸 떠올렸는지 잠시 표정을 굳혔다.
“은호, 네가 말한 지도가 그 파악이 안 된 지맥과 관련이 있나 보군.”
“네, 직접 보시는 게 빠를 거예요.”
은호가 대답을 한 시점엔 한반도 지도 위에 별자리가 그려진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리고 은호가 그린 선은 이무기의 귀천에서 보았던 것과 일치했다.
“이 선은 한반도 내에 존재하는 지맥의 흐름을 정확하게 그리고 있어요. 이 선을 남긴 사람은 저만큼이나 지맥과 지력에 통달했을 거예요.”
“조의신의 말에 의하면, 이 그림을 그려 달라고 의뢰한 이는 옛 한국 지부장이라고 했지.”
홍경복 화백은 이 그림을 옛 한국 지부장의 의뢰를 받아 그렸다고 한다.
옛 한국 지부장은 이무기의 크기와 사용할 재료에 관해 아주 꼼꼼하게 의뢰했다고 한다.
민그린이 미완성이었던 그림에 덧칠하는 변수가 생기긴 했지만, 홍경복 화백은 옛 지부장이 의뢰한 내용을 정확히 지켜 밑 작업을 마친 상태였다.
“의신이 형, 이 그림은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단서라고 하셨죠.”
“……그래.”
이계 충돌이 발생한 직후, 인력도, 정보도, 아이템도 부족했던 어둠의 시대.
이능을 타고난 플레이어조차 몸을 사리던 절망스러운 시기에 한국의 플레이어 대표 자리에 있던 옛 한국 지부장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한반도에서 수작을 부리려는 진족과 거래해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옛 한국 지부장은 계약서에 혼이 묶인 상황에서도 기지를 발휘해 단서를 남기는 데에 성공했다.
‘아니, 그 옛 한국 지부장의 공만이 아니야.’
홍경복 화백이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그림의 밑 작업을 완벽하게 해 두지 않았더라면.
그림을 완성할 의욕을 상실한 홍경복 화백을 대신해 신동 민그린이 그 그림을 완성하지 않았더라면.
두 화백이 없었다면 이무기의 귀천이 존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 성국언을 비롯한 비밀 결사 출신 은광고 학생들은 다른 진족들로부터 학교 지하에 남은 비밀을 지켰다.
그들이 비밀을 지켰기에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내가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메시지를 찾아낸 것이다.
‘지맥을 읽을 줄 모른다면 절대 정확한 좌표를 집어낼 수 없을 텐데.’
옛 한국 지부장은 은광고에 단서를 남겼다.
굳이 플레이어 협회가 아닌 은광고에 단서를 남긴 건, 언젠가 재능 있는 후배들이 이를 알아봐 주리라 믿었던 걸까.
‘은호가 은광고에 입학할 예정이긴 한데…… 진족이니까 그 장소에는 가기 어려웠겠지.’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옛 한국 지부장이 준비한 안배는 완전하지 못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조의신 너는 한반도에 ‘동결형 이계’를 심은 진족이 있고, 그 숫자와 위치에 관한 단서가 이 그림에 있을 거라고 했지.”
황지호는 다시 한번 ‘이무기의 귀천’을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처음에 예술품으로서 이 그림을 봤을 때와는 다른 의미로 감탄한 듯했다.
“대범하고도 신중하구나. 한국이 자랑하는 화백의 그림에 단서를 남기고, 범인(凡人)은 알지 못하게 안배를 남겼다. 과연 어둠의 시대를 헤쳐 나온 의인이 남긴 단서로다.”
“그럼 단서를 완성해 볼까요.”
은호는 자신이 그린 선 위에 점을 하나씩 찍기 시작했다.
한반도 위에 그려진 지맥의 선 위로 그림 속에서 보았던 점이 옮겨졌다.
은호가 손을 멈췄을 때는 한반도의 지도 위에 수십 개의 점이 찍힌 후였다.
그리고 그 수십 개의 점 중 두 개는 내가 알고 있는 위치에 찍혀 있었다.
‘하나는 석촌 호수에, 다른 하나는 주오 아일랜드 주변…… 이건 그때 그 위치야.’
나비령이 남긴 좌표를 통해 권제인과 함께 찾아낸 석촌 호수의 동결형 이계.
3학년 0반의 부트 캠프 중, 강한 담임 임연화가 격파한 주오 아일랜드 동결형 이계.
이 두 동결형 이계의 위치가 정확하게 일치하니 의심할 겨를이 없었다.
이 지도는 동결형 이계의 좌표를 가리키고 있었다.
“틀림없군. 그동안 발견한 동결형 이계의 위치와 일치한다. 다른 곳도 확인해 보면 확실해지겠지.”
한반도 위에 찍힌 점을 바라보며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눌렀다.
머릿속에 지도를 그리며 분신을 움직이나 보다.
은호는 말없이 지도를 다시 훑어보다가 어느 한 지점이 신경 쓰이는지 한참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황호 님, 이 지점부터 확인해 주시겠어요? 세 개의 점이 아주 가깝게 찍혀 있네요.”
“세 개의 동결형 이계가 잠복해 있을 가능성이 크군…… 잠깐.”
황지호가 말을 멈췄다.
은호가 가리키는 지점을 보는 나도 순간 흠칫했다.
“……여기 TC 연구소가 있는 위치 같은데.”
“조의신, 네 말이 맞다.”
삣.
황지호의 대답에 이어 은호가 홀로그램 옆에 지역 정보를 띄우자 확실해졌다.
동결형 이계가 세 개 위치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은 TC 연구소가 있는 지역이었다.
“공교롭군.”
황지호는 TC 연구소의 존재 외에도 거슬리는 게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비정기 오찬회에서 제천대성의 의뢰를 받아 움직이고 있던 것 기억하나?”
“어.”
무려 원족의 수장이자 서유기의 제천대성이 긴고주를 담보로 한 제안인데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나는 제천대성이 넘겨준 단서를 근거로 그의 동생, 무지기의 행방을 찾던 중이었지.”
황지호가 홀로그램을 몇 개 띄웠다.
그곳에는 이능파 관측 기록부터 철새의 움직임이나 날씨의 변화 같은 자잘한 기록이 남아 있었다.
그 기록들의 가장 끝에는 좌표가 하나 첨부되어 있었는데, 그 좌표가 가리키는 곳은…….
“그 단서가 이어진 곳이 저 TC 연구소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