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감시 (1)
TC 연구소의 존재는 예전부터 신경 쓰였다.
아직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과 깊게 연관되어 있으니까.
‘TC 그룹에 직접 연관된 도씨와 천씨, 도원우와 천동하. 그리고 유상희도 엮여 있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아닌 이들도 엮여 있다.
유상훈이 그렇고 또 일단은 지인 관계인 도시후도 있으니까.
“황호 님과 의신이 형 반응을 보니 TC 연구소에 뭔가 있나 봐요. 설명해 주시겠어요?”
“그 게임에선 없던 내용인가 보군.”
“속칭 ‘4대 그룹 암투 시나리오’가 발발할 예정인 건 알아요. 거기에 TC 그룹이 엮이는 것도요. 하지만 TC 그룹의 규모가 만만치 않다 보니 어느 계열사가 어떻게 어디까지 그 암투에 관계되는지는 몰라요.”
‘4대 그룹 암투 시나리오’라는 단어에 황지호가 반응했다.
그러나 황지호는 그 시나리오에 관해 캐는 것보다 정보 전달을 우선시하려는지 질문을 삼켰다.
“그 시나리오에 관해서 묻는 건 나중으로 미루지. 이 몸이 TC 연구소에 관해 알게 된 계기는 다소 복잡한데, 무엇부터 이야기하면 좋을까…… 그래.”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황지호가 좋은 생각이라도 떠올랐는지 밝은 어조로 운을 뗐다.
“아, 먼저 적호가 부상을 입었던 이야기부터 해야겠군.”
“적호 님께 무슨 일이 있었죠?”
은호의 목소리는 다정다감했지만 엄격하게 들렸다.
‘하필 적호가 없을 때 이 이야기가 나오다니.’
적호는 은호의 후예들을 보러 간 건지, 아니면 오늘 정신적으로 고생한 아들을 보러 간 건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황지호는 적호가 없는 틈을 타고 신나게 고자질을 시작했다.
옆에 조용히 앉아 상황을 주시하는 백호군과 가볍게 입을 움직이는 모습이 비교되었다.
“12지 동맹 중 감히 호족을 배신한 돈족의 감시를 명했을 때의 일이다. 적호의 적연이 누군가에 의해 간파되었고, 적호가 공격당했지.”
그 사건 당시, 상보심금파의 갈래에 꿰뚫려 적호는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적호는 웬만한 치유 스킬도, 아이템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김신록이 몰래 신보를 가져다가 적호에게 사용하는 죄를 범한 이후, 적호는 큰 제약을 자처해 짊어졌으니까.
그때 도움을 준 게 유상희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이곳의 유상희는 여전히 치유의 여신 판아케아…… 아니, 아케아와 연을 맺고 있었을 테니, 도움을 받을 수 있었겠네요.”
“유상희에게 도움을 받은 건 그때뿐만이 아니다. 여름방학 때, 청소년 수련회 당시 이 몸이 실수를 범해 부상자가 나왔는데…….”
부상자라고 하면 그때 이능독에 당한 아이들과 송대석, 노영미를 말하는 건가.
그런데 그건 딱히 황지호 잘못만이 아니다.
플마고를 통해 안 정보를 바탕으로 계획을 짠 건 나였으니까.
변수의 존재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내 잘못이 더 컸다.
나는 황지호가 말을 쉬는 틈을 타 입을 열어 그러한 사실에 관해 설명하려 했으나 눈치 빠른 노친네가 계속 말을 끊어 먹었다.
또 눈치가 빠른 건 노친네뿐만이 아니었다.
“의신이 형, 그때 부상자가 발생한 건 형 잘못이라고 말씀하고 싶나 봐요.”
“하하하! 과연 호족의 첫 수장답게 현명하군. 은인의 뜻을 바로 헤아렸구나.”
인간으로 지낸 세월이 있다고는 하나 은호도 옆에서 처웃고 있는 노친네 못지않게 매우 오래 산 탓일까.
아직 나는 본론도 꺼내지 않았는데 철저하게 반박당했다.
은호는 황지호의 설명만 듣고 청소년 수련회 사건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훤히 파악했다.
분석을 끝낸 은호는 그 사건에서 내 잘못이 아닌 이유에 관해 조목조목 늘어놓은 후, 말을 마무리 지었다.
“이상이에요. 제가 잘못 이해한 부분이 있나요?”
“아니, 은호 네 분석 중에 틀린 부분은 없다.”
“그렇군요.”
노친네가 얄밉게 한마디씩 거들고 은호가 결론을 내리니 내가 끼어들 구석이 없었다.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한 채 은호가 건네는 차를 마셔야 했다.
“의신이 형의 뜻은 잘 알겠어요. 하지만 형이 그렇게 말씀하셔도 소용없어요. 저나 황호 님은 절대 형 탓이라고 생각 안 할 거니까요.”
“그래, 은인 탓이라고 생각도 안 했고, 생각을 바꿀 마음도 없다.”
호족의 옛 수장과 현 수장은 죽이 아주 잘 맞나 보다.
누가 천 년 단위의 절친 아니랄까 봐 합이 척척 맞았다.
은호와 노친네는 내가 입을 다물고 있자 만족하고 다시 유상희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럼 다시 유상희에 관해 이야기해 주세요. 황호 님께선 유상희에게 은혜를 갚는 과정에서 뭔가를 알게 되신 것 같은데, 제 생각이 맞나요?”
“그래. 유상희가 TC 연구소와 진로 문제를 두고 곤란해하더군. 동생인 유상훈의 목숨 빚이 있어서 쉽게 거절하지도 못했지.”
“……동생의 목숨 빚.”
은호는 목숨 빚이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플마고의 1학년 파트를 플레이 한 플레이어들은 동생의 복수를 하겠다며 전선으로 뛰어든 3학년 선배에 관해 기억하고 있을 거다.
그 선배, 유상희가 치유의 여신 대신 복수의 여신을 택해 복수의 길을 걸은 것도.
유상희의 복수 대상은 모든 마수종 에너미였고, 그녀는 마수종 에너미의 절멸을 위해 생명을 태웠다.
다소 염세적이고 삐딱한 유저는 이걸 일종의 캐릭터 설정 붕괴라고 주장했다.
꽤 오래도록 플마고 팬카페에 남아 비판 글을 주기적으로 올리던 빠인지 까인지 모를 유저가 그랬다.
‘……한국 최고의 명문고에서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던 학생이 택한 복수 방식이 비상식적이라고, 말도 안 된다고 했지.’
그 유저의 말대로 유상희가 택한 복수는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했다.
그녀의 동생, 유상훈이 당한 일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방식이었다.
그럴 정도로 유상희는 가족을 소중히 여겼던 거다.
은호도 그런 유상희를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제가 알고 있는 유상희는 동생의 목숨과 관련되어 있다면 어지간한 제안은 승낙할 거예요. 유상희가 고민을 하는 이유가 있겠군요.”
“TC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관해 설명하지.”
황지호가 전개한 홀로그램 위,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매우 제한된 방식으로 인간계에 간섭하는 상위 존재.
그 거대한 힘을 이 땅의 존재가 제 뜻대로 부려 보겠다는 욕심이 느껴졌다.
광오한 타이틀 밑에 적힌 개요를 순식간에 읽은 은호가 차를 마시며 잠시 표정을 숨겼다.
“이 땅에 이리도 어리석고 오만한 존재들이 있다니.”
찻잔을 내려놓은 은호의 표정은 평소대로였지만, 짧은 말에서 깊은 분노가 묻어났다.
상위 존재 중 하나인 천신과 깊은 연을 맺었던 호족의 입장에선 저 프로젝트에 분노를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을 거다.
분노를 억누른 은호가 사고를 계속했다.
그리고 은호는 사고의 결과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이 프로젝트는 어쩌면, 신역을 노리는 ‘그자’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흑막의 행보를 고려했을 때,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는 심상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이 프로젝트의 방향성과 흑막이 추구하는 바가 겹치는 게 단순한 우연인지 아닌지는 지금으로선 판단하기 힘들었다.
‘동결형 이계가 연구소 주변에 잠복되어 있는 걸 보니 우연이 아니라 의도된 결과물일 가능성이 더 크지만.’
어쨌든 흑막이 이 프로젝트의 존재에 관해 알고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 올 가능성이 컸다.
황지호와 은호의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 예전에 부탁한 건에 관해 물었다.
“도원우 선배님의 감시는 계속하고 있어?”
“감시하는 중이다. 도원우가 뛰어난 플레이어다 보니 감시의 강도가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계속 감시해 줘.”
“어느 정도로 감시하면 되지?”
마음 같아서야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체크해 주길 바라지만, 어렵다는 건 잘 알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최저선을 정해 말했다.
“도원우 선배님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파악할 정도로. 선배님이 단독 행동할 상황이 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단독 행동이라…… 도원우는 은퇴했다고는 하나 학생회장 출신에 TC 그룹의 자제다. 혼자 움직일 일이 드물 거다.”
“그 드문 순간이 없게 해 줘.”
황지호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곤 한마디 더 덧붙였다.
“알았다. 그 대신, 너도 단독 행동을 삼가도록.”
왜 갑자기 화살이 내 쪽으로 돌아온 건가.
딱히 혼자 움직일 생각은 없었지만, 필요에 따라선 그렇게 할 계획도 있었는데.
“하하핫! 그 얼굴을 보니 뭣하면 혼자 움직일 생각이었나 보군. 너는 도원우가 위험해질까 봐 단독 행동을 삼가게 하지 않았나. 너도 마찬가지다.”
노친네가 내 생각을 읽어 내곤 처웃었다.
내가 혼자 움직이는 거랑 도원우의 단독 행동을 막는 거랑 이야기가 다르지 않나?
아니, 어찌 보면 같은 맥락인 건가?
좀 더 잘 생각해 보고 따지면 반박의 여지가 있을 것 같아 곰곰이 생각해 봤지만, 은호의 말에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의신이 형도 혼자 움직일 생각이 없으니 그런 부탁을 하신 거겠죠. 그렇죠? 형은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강요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은호가 웃으면서 저렇게 말하니 뭐라고 반박하기 어려웠다.
그 뒤로 앞으로 어떻게 대처할지 좀 더 논의하려 했지만, 은호가 어두워진 창밖을 흘끗 보곤 자리를 파하자고 제안했다.
“오늘은 다들 피곤하실 테니 여기까지 하죠. 아침에 마저 이야기해요.”
“그러는 게 좋겠군. 조의신,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두 호랑이는 내가 저택에 묵고 가는 걸 기정사실처럼 말했다.
아직 주중이고 또 이틀이나 연속으로 묵고 가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 같아 기숙사로 돌아가겠노라고 말할 참이었다.
앙증맞은 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왕왕!
천사의 입에 어제와 다른 새 올무용 베개가 물려 있었다.
호랑이들과 대화하는 사이에 계속 심심해하고 외로워하던 천사가 애교를 부리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결국 올무를 안아 들고 호랑이들에게 인사했다.
“……잘 자.”
황지호는 이 장면을 보고 뭐가 웃긴지 계속 처웃었다.
은호는 ‘의신이 형은 정말 변한 게 없네요.’라고 말했다.
대체 어떤 점이 변하지 않았다는 건지 모르겠다.
“하하하하! 신수가 조르는 대로 새 베개를 사 주길 잘했군. 그래, 푹 자고 아침에 보도록 하지.”
“안녕히 주무세요.”
“…….”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백호군을 마지막으로 인사하고 나는 어제 묵었던 별채의 방으로 향했다.
씻고 잘 준비를 마치니 금방 졸음이 쏟아졌는데, 디바이스에 계속 긴 메시지가 날아와서 자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해 보기로 했다.
메시지를 날린 건 장남욱이었다.
[장남욱] 졌지만 잘 싸웠다고 생각해.
비교적 짧은 문장으로 시작한 메시지는 점점 길어졌다.
‘아, 한국시리즈 결과 말하는 건가.’
내가 영국에 간 사이, 한국시리즈가 끝났다.
주오 드래곤즈와 SZ 스타즈는 7차전까지 대접전을 벌인 결과 패배했다.
‘주오 드래곤즈가 또 준우승을 했으니까 팬 입장에선 뼈아프겠지.’
장남욱의 길고 긴 메시지를 읽으며 위로의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발신자는 유상훈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