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13)
제천대성과 20대 모습의 황지호가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숨어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바람에 시야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둘이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공기가 무거운 게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다.
‘황지호는 도시후의 능력을 아니까 무지기와 뭔가 관계가 있다는 걸 짐작했겠지.’
그리고 제천대성이 여기에 있다는 건 그도 무지기와 도시후 사이의 관계성을 알아 낸 게 분명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머릿속에서 여러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봤다.
긍정적인 생각을 하기 어려웠다.
‘최악의 경우엔 제천대성과 교전하게 되겠지.’
사전에 대책을 세우고 함정과 계략을 준비했다면 모를까, 정면에서 제천대성과 싸우면 힘들어질 거다.
황지호가 도시후를 위해 원족과 척질 각오를 하고 제천대성과 싸워 준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하지만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12지 동맹에는 상호 불가침 조약이 있잖아. 그런데 지금 도시후는 제천대성의 손에 있으니까, 황지호가 강제로 도시후를 탈환하려 들면 호족이 먼저 원족을 친 게 돼.’
제천대성은 황지호에게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긴고주를 담보로 건 적이 있다.
만약 제천대성이나 원족이 불가침 조약을 깨고 12지 동맹을 배신한다면, 황지호는 긴고주를 얻게 된다.
그러나 제천대성도, 원족도 현재 12지 동맹의 불가침 조약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만약 도시후를 두고 싸우게 되면 장남욱하고 유상훈이 싸우려 들 텐데 어떡하지.’
황지호한테 장남욱과 유상훈을 데리고 빠져 달라고 부탁해야 하나?
우선 두 사람의 안전을 확보할 방법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어? 지호도 와 있었어? 오랜만이다!”
대참사가 발생했다.
장남욱이 밝은 목소리로 인사해서 긴장감을 박살 냈다.
순수하게 반가움을 표했을 뿐이었지만, 저 말이 미친 여파는 굉장했다.
‘장남욱은 저 20대 모습을 한 황지호가 황지호로 보이나? 아니, 맞는 말이긴 한데…….’
장남욱은 천리안의 파생 스킬, ‘별 처녀의 눈’을 가지고 있다.
현재 스킬 레벨이 어느 정도로 향상되었을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본 고등학생 황지호와 현재 눈앞에 있는 황지호가 동일 존재라는 건 알아볼 정도로 높은 건 분명했다.
“혹시 키 크지 않았어? 분위기도 많이 어른스러워졌다.”
“오랜만이군, 너도 키가 조금 큰 것 같은데.”
저 노친네는 왜 말을 돌리지 않고 저 말을 받아 주고 있는 건가.
그런데 장남욱은 처음 입학 실기 시험을 치를 때에도 키가 컸는데 그새 더 컸나 보다.
키가 큰 건 축하할 일인데, 장남욱의 저 인사말 때문에 문제가 발생했다.
“……?”
20대의 황지호를 반갑게 대하는 장남욱, 또 거기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노친네를 본 유상훈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학교가 달라 자주 볼 일이 없는 장남욱이라면 저렇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학년 0반의 옆 반, 1반 소속 유상훈은 황지호와 자주 마주친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거다.
저 노친네는 유상훈이 보고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지금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제천대성이긴 하지만, 정체도 좀 숨겨야 하지 않나?
“저자는 왜 너와 함께 온 거냐.”
“응? 아, 사관학교 밖으로 나올 때 우연히 만났어. 시후 지인이라고 하던데.”
제천대성이 도시후 지인?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러자 제천대성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지인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단지 뒤에 업고 있는 이를 알고 있다 했을 뿐.”
“네? 알고 지내는 사이면 지인 관계 아닌가요? 하여튼 이동 중에 이분이 도와주신다고 해서 도움을 받았어.”
장남욱의 말을 듣고 있던 황지호가 어처구니없어했다.
황지호는 곧 신랄한 말투로 장남욱을 나무랐다.
“한밤중에 나타난 초면의 존재, 그것도 눈을 가리고 있는 미심쩍은 무언가에게 네 친구를 맡기다니, 제정신이냐.”
“어…… 그렇긴 한데…….”
“……말이 심하군.”
황지호의 말에 장남욱이 동의하자 제천대성이 조금 시무룩해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장남욱은 변명하듯 답했다.
“내 눈에 이분의 기운이 너무 선하게 느껴져서 의심할 생각을 하지 못했어.”
그야 투전승불(鬪戰勝佛)이라며 부처로도 불리던 손오공의 기운이니까.
장남욱의 변명은 계속되었다.
“이분이랑 만나기 직전에 시후 상태가 많이 안 좋아졌어. 다시 규연이한테 돌아가야 했나 싶었는데, 이분이 이능파를 흘려 넣으니까 시후 상태가 다시 좋아졌어. 그래서 여기까지 같이 와 달라고 부탁한 거야.”
장남욱이 숨도 안 쉬고 긴말을 마쳤다.
장남욱의 말만 들으면 마치 제천대성이 도시후를 보호한 것처럼 들렸다.
황지호도 그렇게 생각한 건지 처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온 거지? 동생 일로 바쁠 텐데.”
“이 제천대성의 능력을 잊은 건 아니겠지? 나 제천대성은 한 번에 10만 8천 리를 달리는 근두운을 다루고, 8만 4천 개의 분신을 부를 수 있다. 동생 곁에 분신을 여럿 붙여 놨으니 문제없다.”
“제천대성? 어? 어……! 서유기에 나오는 그 진족?”
장남욱은 처음으로 자신의 옆에 서 있는 존재가 제천대성이라는 걸 알았는지 경악한 목소리를 내다 굳어 버렸다.
정신없는 상황 속에서 도움을 준 선한 기운을 가진 도시후의 지인 정도로 생각했나 보다.
“분신의 숫자가 늘어나면 정교함도, 부릴 수 있는 도술의 수도 줄어드니 숫자를 언급해도 딱히 와닿지 않는군. 여기에 온 건 본신인 것 같으니 그걸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만.”
“하하하, 그렇게 경계하지 마라. 나쁜 뜻으로 이 아이를 따라온 건 아니었으니까.”
“네 동생을 지금까지 봉한 힘의 원천이 도시후라고 생각해 여기에 달려온 게 아니더냐. 어찌 나쁜 뜻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겠나.”
황지호의 말이 끝나자, 방 안은 정적에 잠겼다.
장남욱과 유상훈, 두 사람은 나나 황지호만큼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았기에 더디게 상황을 파악했지만, 지금 황지호의 말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완전히 이해한 것 같았다.
장남욱과 유상훈이 눈에 띄게 경계하는 게 느껴졌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고 경계하는 게 당연하겠지.”
제천대성이 그 말을 하면서 웃은 것 같았다.
왜 웃는 건지 알 수가 없어 혼란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무지기의 치료가 끝나자 나는 내 동생을 속박한 사슬이 어디로 이어졌는지 따라갔다.”
풀썩.
도시후를 안아 든 채로 천천히 걷던 제천대성이 도시후를 긴 소파 위에 눕혔다.
제천대성이 도시후에게 완전히 손을 떼자 스위트룸 안의 분위기가 한결 나아졌다.
“무지기의 원념이 이 도시후라는 아이를 기억하고 있더군. 힘이 봉인당한 직후부터 이 아이를 사로잡고 있던 모양이다.”
“원념이라, 내가 전에 도시후를 봤을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광림의 사슬 속에 그 원념이 묻어 있었다. 아마 광림이 발동하는 순간이 아니면 너라도 알아보기 힘들었을 거다.”
그렇게 말하던 제천대성이 이쪽을 봤다.
나와 유상훈이 몸을 감추고 있던 방향이었다.
“거기에 있는 어린 인간들은 이 아이들의 친구인가? 나와도 된다. 이 제천대성은 어리고 약하며 무고한 존재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제천대성에게 이미 숨어 있는 곳을 들켰다면 더 숨는 게 무의미했다.
괜히 몸을 감추고 있다가 의심을 사고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보다 당당히 나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유상훈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내가 나가서 인사하자 유상훈도 뒤에 따라 나와 고개를 꾸벅였다.
인사를 받은 제천대성이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인사성이 밝구나. 나는 예의 바른 아이를 좋아한다.”
아이들을 모아 비정기 오찬회를 연다는 걸 들었을 때부터 느꼈지만, 정말 아이들을 아끼는 것 같았다.
후예가 없어서 그런 걸까 그동안 동생이 실종된 상태에 있어서 그런 걸까.
나도 동생 생각에 애들을 보면 간식 하나 더 챙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드니 이해는 되었다.
하지만 더 신경 쓰이는 게 있었다.
‘……나는 몰라도 유상훈은 알아볼 것 같은데.’
나는 체격도 바꾸고 목소리도 숨겼지만, 유상훈은 달랐다.
제천대성 정도 되는 눈썰미를 가진 이가 보면 바로 알아볼 것 같았다.
“네 누나에게는 신세 졌다.”
“아…… 네.”
역시나, 제천대성이 바로 유상훈을 알아보고 말을 걸었다.
유상훈은 자기 정체가 바로 드러날 거라 예상한 건지 별로 당황하지도 않았다.
유상훈 저놈도 참 보통 담력이 아니었다.
“너희도 이 아이…… 도시후의 친구인가?”
“……그런데요.”
유상훈이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후의 농담은 재미가 없고, 농구도 뭣같이 하지만 어쨌든 자주 부딪치고 이야기하다 보니 미운 정 비슷한 게 들었다.
친구라고 해도 될 거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 제천대성이 도시후를 해치진 않을까 걱정할 정도로 미운 정이 들었으니까.
나도 고개를 끄덕이자 제천대성이 씨익 웃었다.
“내 동생을 구속한 존재를 벌하는 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다. 하지만, 저 아이가 도시후라는 걸 알고 마음을 바꾸었다. 저 아이의 친구들을 봐서라도 그래야지.”
도시후의 친구들?
나나 유상훈, 장남욱을 칭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제천대성이 말하는 건 다른 사람들 같았다.
“이 몸이 여는 비정기 오찬회에는 수많은 아이들이 온다. 자질이 부족한 아이, 영민한 아이, 착한 아이, 품행이 불량한 아이, 선한 아이……. 그중에도 유독 눈에 들어오는 아이가 있었지.”
“누구를 말하는 거지?”
“주수혁. 너희도 알 것 같군.”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나왔다.
플마고의 타이틀 히어로의 이름이 여기에서 나올 줄이야.
여기에 있는 이들 모두가 주수혁의 이름을 알았으나 지금 제천대성이 그 이름을 말할 줄은 상상도 못 한 듯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 아이는 재능도, 성품도 뛰어나다. 영웅호걸이 될 존재지. 늘 관심 있게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 아이가 친한 친구로 도시후를 꼽고, 늘 그 아이의 이야기를 하더구나.”
제천대성의 말은 계속되었다.
“주수혁뿐만이 아니라, 도원우, 남궁규연, 오혜지…… 도시후의 이야기를 한 아이들이 많았다. 다들 착하고 영특한 아이들뿐이었지. 그 아이는 사교 모임에 잘 오지 않는다고 했지만, 늘 화제에 올랐다. 그래서 언젠가 얼굴을 보고 싶었다.”
제천대성이 도시후를 발견하고도 바로 손을 쓰지 않은 건, 지금까지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었던 탓이었나 보다.
플마고 속, 도시후는 이름도 나오지 않지만 그 존재는 분명히 드러난다.
4대 그룹 암투 편, 주수혁을 구하기 위해 위험한 다리를 건너다 결국 목숨을 잃는 사관학교 소속 친구.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시후는 주수혁을 구했고, 또 주수혁은 도시후를 구한 듯했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 아이들의 친구라면,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때, 제천대성과 도시후 사이에 서 있던 황지호가 입을 열었다.
“곧 도시후가 눈을 뜰 것 같군.”
황지호가 말을 마치자, 도시후의 눈꺼풀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