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35화 (434/925)

64. 믿음과 시험 (14)

도시후의 이능파는 상당히 불안정했다.

눈을 뜬 직후에도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멍한 얼굴로 허공을 봤다.

나쁜 꿈이라도 꾼 걸까?

나는 꿈을 안 꿔서 좋은 꿈, 나쁜 꿈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시후야, 괜찮아?”

장남욱이 다급히 도시후의 곁에 다가갔다.

눈을 끔뻑이던 도시후가 장남욱을 발견하자 정신을 좀 차리곤 몸을 일으켰다.

아는 얼굴이 보이니 안심이 되나 보다.

“어…… 여긴 어디야?”

“너 기절한 사이에 잠깐 밖에 나왔어.”

장남욱은 현재 위치와 외박계 처리 여부, 사관학교 생도들의 협력 과정에 관해 간략히 설명했다.

제천대성이 바로 옆에 있는데 기수장으로서 할 일을 하는 게 참 장남욱다웠다.

“이능파가 좀 불안해 보이는데…… 아까 있던 일은 기억해?”

“……응?”

“갑자기 광림을 발동시킨 거. 그 뒤로 기절했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해 줘.”

도시후는 바로 답변하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마치 기억을 더듬는 듯한 모습이었다.

시간상 1시간도 지나지 않았을 텐데, 다른 생각에 밀려 방금 있었던 일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기절한 사이에 뭔가를 봤거나, 겪은 건가?

곧 도시후가 기운 없는 목소리로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원우 형한테 메시지를 보내려고 했는데, 갑자기 멋대로 광림이 발동되었어.”

도시후의 의지로 광림을 발동시킨 게 아닌 건가.

어쩐지 그건 무지기의 원념 탓일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막 풀려난 무지기의 힘이 봉인 중에 원망을 쏟던 상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그리로 향했을지도 모른다.

“광림이 발동하자 머릿속에 어떤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그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몸이 무거워지고 숨이 안 쉬어져서…….”

“시후야…….”

도시후가 말꼬리를 흐리다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런 도시후를 본 장남욱이 크게 걱정했다.

“괜찮을 거다. 내 힘으로 잠시 무지기를 달래 주었으니까.”

도시후가 깨어난 후부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던 제천대성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무지기의 원념을 온전히 거둔 건 아니다.”

“……무지기?”

“네 힘으로 봉인한 진족의 이름이다. 그리고 나는 무지기의 오라버니, 제천대성이다.”

제천대성이란 말에 처음에 도시후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믿을 수 없어 하며 주변을 둘러봤는데, 장남욱, 유상훈, 나를 돌아보곤 놀란 얼굴을 했다.

우리 셋이 제천대성이란 이름을 걸고 장난질할 성격이 아니란 걸 도시후도 알 거다.

“……정말로?”

“그래.”

내가 대답하자 제천대성이 손뼉을 한 번 쳤다.

제천대성은 자신의 상징 중 하나, 근두운을 불러 그 위에 걸터앉아 도시후와 시선을 맞추었다.

도시후는 천으로 가린 눈 위에 얹힌 긴고아를 보고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 눈앞에 제천대성이 있다는 게 실감이 난 것 같다.

‘……그런데 투전승불 자리에 올랐으면 긴고아가 사라져야 할 텐데.’

서유기의 종장.

서천행을 마치고 투전승불이 된 제천대성이 긴고아를 벗겨 달라고 청하자, 삼장법사는 웃으며 네 머리에는 이미 긴고아가 없으니 머리를 만져 보라고 말한다.

제천대성이 머리에 손에 올려 보니 삼장법사의 말대로 긴고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제천대성이 인간의 세계로 내려오면서 제약이 생긴 건가?

그것도 아니면 상위 존재가 아닌 진족을 택한 패널티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네가 내 동생을 봉인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다오. 거짓을 고하면 절대로 용서하지 않겠다.”

언뜻 듣기에는 무서운 말이었지만, 사실을 고하면 용서할 수도 있다는 것처럼 들렸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지 장남욱은 한결 긴장이 풀린 기색이었다.

곧 도시후가 조심스럽게 옛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기절했을 때, 꿈을 꿨어요. 그때 잊어버린 걸 봤다고 생각해요.”

*    *    *

도시후의 인생에서 최초로 겪은 시험이었다.

도시후는 납치범의 수작질로 인해 광림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자력으로 탈출하는 건 여전히 불가능했다.

하물며 여기는 배 위다.

도시후는 뱃멀미도 심했고, 수영도 못하니 도망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 와중에 납치범이 어떤 제안을 했다.

―그 광림으로 네 앞에 있는 존재를 봉인하라.

그 당시, 도시후가 자신의 광림을 써 본 적은 단 한 번뿐이었다.

바로 플레이어로서 각성한 순간.

이능을 각성한 순간 도시후는 저도 모르게 출근하는 아버지를 붙잡았다.

도시후의 사슬에 구속당한 선박왕은 힘으로 그 사슬을 떨쳐 버린 후 도시후와 함께 플레이어 협회로 향했다.

그 후엔 왼손에 광림 봉인술식이 새겨져 광림을 쓸 수 없게 되었다.

도시후는 자신의 광림이 이능을 봉인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왜 저 납치범이 자신의 광림을 알고 있고, 무엇을 봉인하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내 광림을 저 사람들한테 알려 준 걸까? ……집에서 일하는 분들 중 한 분일까? 아님 친척?’

도시후는 차마 광림을 쓰지 못하고 머리만 계속 굴렸다.

도시후가 머뭇거리고 있자, 납치범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아버지와 달리 뱃멀미도 있고, 수영도 못하지.

―뱃멀미를 없애 주고, 수영할 수 있게 해 주마.

―그 대신 그때그때 필요한 존재의 광림을 봉인시켜 다오.

어린 도시후에겐 그게 아주 멋진 제안으로 들렸다.

물에 관련된 상위 존재들이나 진족이 나타나 도시후에게 그런 가호를 내려 줬으면 좋겠다고 기도할 정도였다.

‘광림 봉인술식을 지울 수 있을 정도면, 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어린 도시후는 오래도록 고민했다.

고민 끝에 도시후는 눈을 꼭 감은 채로 입을 열었다.

―전 좋은 일을 하기 위해 물을 극복하고 싶어요.

―누군가를 다치게 하면서까지 잘하고 싶지는 않아요.

도시후는 조금씩이지만 배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또, 수영 교실에서 도원우가 도와주기 시작하자 물에 뜨는 시간도 몇 초씩 길어지고 있었다.

아주 고통스럽고 힘들지만, 언젠가 도시후의 힘으로 물을 극복할 수 있을 듯했다.

도시후는 힘든 길을 택하기로 했다.

―다루기 힘든 타입의 인간이군.

―죽일까요?

아무렇지 않게 자신을 죽이겠다는 발언에 도시후는 저도 모르게 눈을 뜰 뻔했다.

도시후는 벌벌 떨면서도 광림을 쓰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니, 살려 둬라. 지금 죽으면 언제 이런 광림을 타고난 이가 이 땅에 나타날지 모른다.

―도씨 집안의 인간들은 유독 사슬과 연관된 광림을 많이 타고나지 않습니까. 조금만 기다려 보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 다음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얼마나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냐.

누군가가 도시후 가까이로 걸어왔다.

누군가의 발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무겁고 축축해지는 것 같았다.

―오래 기다려도 이능파를 제어하는 광림을 타고난 이가 없어 실망스러웠다. 여기에서 쉬이 죽일 수 없다.

―그걸 쓰실 겁니까? 하지만, 그건 아직 불완전해서 1회용에 불과한데…….

―아깝긴 하지만 한 번이라도 써먹어야 되지 않겠느냐.

누군가가 도시후의 머리채를 낚아챘다.

두피에 고통이 느껴져 도시후가 짧게 비명을 질렀지만, 상대는 신경 쓰지도 않았다.

―운이 좋구나. 무지기가 네 사슬과 이 땅에 묶여 완전히 힘을 잃을 때까지는 살려 두마.

그 이후로 도시후의 기억은 희미해졌다.

기억나는 거라곤 도시후의 멋대로 발동한 사슬과 사슬에 직격당한 누군가의 원망어린 목소리뿐이었다.

*    *    *

늦은 시각, 용족의 영역을 나서는 김신록의 기분은 그리 좋지 못했다.

이유는 복합적이었는데, 가장 큰 건 임무가 잘 풀리지 않는 스트레스였다.

‘신화 속에 이름을 남긴 진족은 과연 달라. 고통을 느끼고 있을 텐데도 내색을 잘 하지 않아서 가감하기 어려웠어.’

카드모스의 심문이 생각보다 잘 진행되지 않았다.

용족과 붉은 사자가 애먹을 정도였으니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었지만, 마치 바윗덩어리를 쇠바늘로 찔러 고문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결국 신경 가닥을 직접 건드려 가며 작업을 했는데, 신체를 해체하는 과정도 까다롭고 신경에 손대는 것도 복잡해 꽤 고생했다.

‘그래도 이건 일이니까 참을 수 있어.’

김신록을 화나게 하는 건 또 있었다.

갑자기 염준열과 외출해야겠다며 사라진 용제건의 존재였다.

유희계 용족이 심문 과정을 참관하는 게 그리 내키지 않아 처음엔 몇 번 거절했다.

하지만 용제건이 수업에 방해가 될 정도로 귀찮게 굴면서 조르길래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

용제건은 오랜만에 고문을 직접 구경하겠다며 하루 내내 들떠 있었다.

‘그렇게 될 줄 알았으면 수락하지 말걸.’

그러나 막상 김신록이 용족의 영역에 오니 학생회 일로 나가 본다는 염준열을 따라 훌쩍 사라졌다.

약이 오른 김신록이 용제건의 뒤통수에 커터 칼날을 투척하려 했지만, 이미 그는 사라진 이후였다.

‘망할 용…… 카드모스를 심문하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 말하라는 둥, 여차하면 옆에서 도와준다는 둥 입에 발린 소리를 늘어놓더니 그렇게 가?’

사실 용제건이 있어 봤자 용살자 앞이라 위험하기만 했지 별 도움이 못 된다.

그래도 쉽게 했던 말을 바꾸고 일하는 저를 두고 놀러 가 버린 용제건을 생각하면 주먹이 울었다.

김신록은 내일 일찍 등교해 용제건의 개인 용품에 압정을 숨겨 둬야겠다고 다짐했다.

‘슬리퍼, 방석, 서랍 손잡이…….’

용제건을 골탕 먹일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여태까지 용제건이 김신록의 함정에 걸려든 적은 없다는 사실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자주 뵙는군요.”

통행하는 사람이 적은 밤거리, 성국언이 혼자 서 있었다.

성국언은 편한 차림을 하고 있었고, 옆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전무영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국회의원 성국언보다는 자꾸 옛 제자 성국언이 떠올랐다.

김신록은 뒤늦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무영이는 잠시 자리를 비웠는데, 제가 선생님과 마주친 걸 알면 아쉬워하겠네요.”

성국언은 날씨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가벼운 태도로 물었다.

“이 주변엔 붉은 사자의 팀 빌딩이 있죠. 혹시 그 유희계 용족을 뵈러 오신 겁니까?”

시험해 보는 듯한 말이었다.

김신록의 신경이 곤두서서 그런지 ‘왜 일개 교사가 용족의 영역에 드나드냐.’고 의심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급해진 김신록은 여기에선 용제건의 이름을 파는 게 좋을 것 같아 긍정하기로 했다.

“……네, 약속이 있어서요.”

“…….”

성국언은 김신록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홀로그램을 하나 켰다.

홀로그램은 플레이어 협회 공식 홈페이지 중, 이계 공략 현황판을 비추고 있었다.

최근 업데이트 기록을 본 순간, 김신록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방금 플레이어SAT-K가 발표한 이계 공략에 참가한 플레이어 명단에 그 유희계 용이 있었습니다.”

“아…….”

그 망할 유희계 용은 이계 공략을 하러 간 건가.

김신록은 잠시 패닉에 빠졌다.

뭐라 변명할지 떠오르지도 않았다.

또, 말을 길게 하면 성국언이 제 능력으로 자신의 정체를 간파할지도 몰랐으니까.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김신록을 살피던 성국언이 등을 돌렸다.

“이만 가 봐야겠군요. 다음에 뵙겠습니다, 선생님.”

성국언이 먼저 자리를 뜬 이후에도 김신록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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