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믿음과 시험 (15)
도시후는 자신이 떠올린 이야기를 말했다.
도시후와 다른 이들은 담담했는데, 장남욱은 그렇지 못했다.
장남욱은 그런 일이 도시후의 기억 속에 묻혀 있었다는 게 믿을 수 없고, 또 괴로운 모양이었다.
황지호가 도시후에게 물었다.
“네 광림을 강제로 발동시킨 이는 잡혔나?”
“그때 잡힌 범인들은 다 아는 분들이었어요. 하지만 그때 들은 목소리는 낯설었어요.”
“붙잡힌 납치범 중에 네 이능을 강제로 발동시킨 존재는 없나 보군.”
도시후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강제로 광림을 발동한 이후, 선박왕이 나서서 직접 도시후를 구출해 ‘도시후 유괴 사건’은 종결되었다.
구출 과정에서 선박왕은 후유증이 남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게 되었고,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 이후로 도시후가 노려지는 일은 없었다.
모두가 도시후의 납치 원인을 TC 그룹 내의 이권 다툼이라고 생각했기에, 선박왕이 일선에서 물러나 도시후가 표적이 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겼다.
실상은 전혀 달랐지만.
‘도시후가 다시 납치당하지 않았던 건 무지기를 봉인한다는 목적을 달성했기 때문이겠지. 또 은밀하게 다시 도시후를 표적으로 삼았어.’
이후 도시후의 뱃멀미와 맥주병 증상이 심해졌다고 한다.
도시후 본인을 비롯해 다들 도시후가 배에 납치된 트라우마 탓이라고 여겼다.
‘어쩌면 도시후가 물에 약한 이유는 어린 시절에 무지기의 원념이 새겨진 탓일지도 몰라.’
아마 이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닐 거다.
도시후와 물의 처절한 사투를 보고도 엮어서 생각하지 않는 쪽이 더 이상하다.
도시후가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물에 뛰어들어 장남욱과 도원우의 속을 다 헤집어 놓은 걸 생각하니 괜히 울컥한 기분이 들었다.
“…….”
한편, 도시후가 이야기를 마칠 때까지 제천대성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시후는 제천대성이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렸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침묵이 이어지자 먼저 말을 꺼냈다.
“동생분에게 이능을 써서 죄송…….”
“그만.”
마침 생각을 정리한 건지, 제천대성이 도시후의 말을 끊었다.
제천대성은 흠칫하고 말을 멈춘 도시후에게 다정히 말을 걸었다.
“네 잘못이 아닌 일로 사과하지 마라. 그러면 나도 10년 가까이 동생의 원념에 너를 묶어 둔 걸 사과해야 한다.”
도시후에게 죄가 없다는 걸 알아도 저렇게 곧바로 마음을 다잡기 어려울 텐데.
과연 오래전 깨달음을 얻은 존재의 배포는 남다른 것 같다.
제천대성은 여전히 미안해하는 얼굴을 한 도시후를 보며 말했다.
“무지기가 정신을 차린 후에 얼굴을 보자. 내가 중재하면 그 녀석이 네 말에 귀 기울일 거다.”
……정말 그걸로 끝인가?
무려 긴고주를 걸고 찾으려 했던 동생 아닌가.
오히려 도시후가 무지기의 원념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하고 있다니.
20대의 모습을 한 황지호가 확인하듯 물었다.
“이자는 내가 비호하려 했던 자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 손을 대려는 건 아니겠지?”
“하하하! 내가 그런 짓을 한다면, 너를 배신하는 꼴이 되겠군.”
웃으며 한 말이었지만 그 말의 무게는 어마어마했다.
도시후를 공격하는 행위는 황지호를 배신하는 꼴이 된다.
그 말은 제천대성이 도시후를 공격하면 황지호는 긴고주를 손에 얻는다는 뜻이다.
황지호가 제천대성을 떠보기 위해 한 말에 족쇄를 걸어 되돌려 준 셈이다.
장남욱, 유상훈, 도시후 이 셋은 저 말의 뜻을 몰랐지만, 나나 황지호는 당혹과 경악을 숨기기 위해 표정 관리를 해야 했다.
그 무거운 말을 던진 제천대성은 아무 일 없다는 것처럼 도시후와 대화했다.
“다음 비정기 오찬회에는 나오도록. 네 친구들이 네가 오는 걸 고대하고 있더구나.”
그 이후론 제천대성과 우리는 잡담을 나눴다.
제천대성이 우리의 신상을 묻고 덕담을 나누는 게 고작이었지만, 처음 등장했을 때 흐른 긴장감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온화한 분위기였다.
서로 이름을 묻고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하고 나니 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애들은 잘 자야 잘 큰다. 어서 자라.”
“애를 키워 본 것처럼 말하는군. 후예도 없는 주제에.”
“하하하! 말도 없이 방문한 것 때문에 아직도 화가 난 건가. 무례를 용서해 다오.”
두 수장은 우리의 눈이 신경 쓰이지 않나 보다.
장남욱과 도시후는 둘을 보면서 묘한 얼굴을 했다.
“지호랑 제천대성이랑 아는 사이야?”
“응, 쟤가 지호라고? 1학년 0반 황지호?”
“안 본 사이에 키 많이 컸지?”
“……그 수준이 아닌 것 같은데.”
이런 방면에선 장남욱보다 도시후 쪽이 눈치가 더 빠른 것 같다.
나름 재벌가 자제인 도시후는 황명 그룹에 관련된 소문도 알고 있을 테니 어느 정도 눈치챘겠지만.
“…….”
황지호의 10대, 20대 모습을 확실히 분간 가능한 유상훈은 이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유상훈은 해가 뜨면 우리 반에 와서 황지호의 모습을 확인해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굳이 말하지 않으면 지적하지 않을 것 같다.
계속 나를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까마귀 가면을 빼앗아 쓴 모습과 비교되었다.
아까도 저렇게 모르는 척하고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남욱이랑 시후는 오늘 나와 호텔에서 묵자. 시후의 상태를 더 지켜봐야 할 것 같구나.”
“아, 네!”
“호텔비는 지불했다. 내일까지 자유롭게 쓰도록.”
제천대성, 장남욱, 도시후는 호텔에 남고 다른 이들은 돌아가게 되었다.
유상훈은 부모님이 출장 중이라 집을 비워서 유상희의 보호자로 협회에 갈 예정이라고 한다.
나도 갈까 했는데 가족이나 담임 교사, 변호사만 면회가 가능하다는 말에 일단 물러났다.
‘협회 연줄을 이용하면 억지로 갈 수는 있긴 한데…….’
내가 가면 가뜩이나 심적으로 궁지에 몰린 유상희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다.
상황을 보다가 유상희와 도원우에게 안 좋게 돌아간다 싶으면 찾아가야겠다.
스위트룸 밖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의신아, 너도 아까 그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방심시켜 두고 반응을 보려 한 건지 제천대성이 기습적으로 질문을 날렸다.
이건 어떻게 답변해야 하지?
유상훈과 같이 있던 까마귀 가면과 내가 동일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건 마땅한 수순이었다.
유상훈을 더 철저히 변장시켜서 못 알아보게 했어야 했나?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늦었다.
제천대성은 확신을 품고 말하고 있었다.
“만약 그렇다면 상당한 레벨의 변신술 능력자로군. 다른 사람으로밖에 보이지 않아.”
“쓸데없는 소리로 귀찮게 하지 마라. 애들은 잘 자야 잘 큰다고 하지 않았나. 늦었으니 얼른 쉬게 하는 게 좋겠군.”
20대 모습의 황지호가 제천대성의 말을 끊었다.
황지호가 나를 도와주는 모습에 제천대성이 흥미롭다는 듯 웃었는데, 어쩌면 저게 더 악수가 될지도 모르겠다.
“지호야, 그럼 다음에 보자.”
“그래, 다음에 보자.”
장남욱은 끝까지 20대의 모습의 노친네를 황지호라고 생각했다.
* * *
다음 날 아침, 기숙사 내 방.
눈을 뜨자마자 뉴스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메인 뉴스에 어젯밤 일이 실리진 않았다.
가장 주목받는 화제는 여래훈의 싱글 성적 관련 기사였다.
여래훈의 데뷔 싱글은 국내에서 음원 신기록을 세우고 해외 차트 상위권에 진입했다고 한다.
여래훈의 소속사와 그리 좋은 관계가 아닌 언론사가 일부러 스님 시절의 민머리 사진을 올리고 부정적인 관측을 줄줄 읊었지만, 역효과가 났다.
승복 차림의 여래훈 사진을 올리는 바람에 ‘내장산의 성자’인 걸 몰랐던 사람들에게 선전하는 꼴이 됐으니까.
‘……지금은 이걸 볼 때가 아니지!’
TC 연구소 사건이 메인 기사에 오르지 않아 안심했던 걸까.
홀린 듯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활약 기사를 읽다가 뒤늦게 검색창에 ‘TC’를 입력했다.
검색을 해서 찾아보니 기사가 나긴 났다.
‘TC 연구소의 정전에 관한 기사와 이계 공략 관련 기사가 떴어. 이건 막을 수 없었겠지.’
기사에는 단순한 사실만이 적혀 있었다.
TC 연구소에서의 정전, 갑작스러운 다중 이계 발생, 신속한 공략으로 피해자는 0, 정전 건에 관해서는 조사 중.
기사 댓글도 평범한 사건 사고에나 달릴 법한 내용들만 적혀 있었다.
‘피해자가 없어 다행이다’, ‘공략 수고하셨습니다’ 등, 눈에 띄는 댓글이 없었다.
‘……협회에서 잘 묻어 준 모양이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은 산적했다.
어젯밤에 알게 된 사실 중, 걸리는 게 많았다.
‘유상훈의 각성 시기, 도시후의 강제 광림 발동…… 둘 사이에 연관성이 있지 않을까.’
외부의 힘으로 이능을 자극한다.
이 메커니즘을 기준으로 생각해 보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존재했다.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건 TC 그룹과 결탁한 마족이겠지.’
이번 사건으로 붙잡은 마족은 제천대성의 손에 들어갔다.
이번 마족은 아바리티아의 사제보다 격이 낮은 마족이니, 심문 과정이 다소 수월할지도 모른다.
‘제천대성의 연락처를 받았으니, 나중에 힌트를 얻을 기회가 있겠지.’
준비를 마치고 등교하는 길에도 눈에 띄는 기사가 없나 살폈다.
여래훈의 기사 사이,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었다.
‘신예 플레이어에 관한 기사다! 주수혁과 안다인의 이명이 실려 있네.’
둘은 자잘한 사건을 해결하고, 이계를 공략하며 착실하게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플마고에 있던 대량 학살 사건이 몇 개 사라졌으니, 게임 속만큼 빠르게 명성을 얻진 못하고 있지만.
두 사람에게 미안하지만 이것만큼은 나도 어찌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주인공답게 보이는 곳에서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람들을 구하고 있구나.’
어제만 해도 안다인이 학생회 임원들을 이능독으로부터 보호했고, 주수혁의 우정이 도시후를 구했다.
역시 타이틀 히어로와 히로인답다.
두 사람의 기사를 좀 더 찾아보려 할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 잘 잤나?
[황지호] 네 숙면을 위해 보내 줬으니 부디 잘 잤길 바란다.
……다시 기사나 읽을까.
메시지를 본 순간 반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답변하기로 했다.
‘어제 일에 관해 할 얘기가 많으니까 어쩔 수 없지.’
어젯밤, 황지호는 그대로 나를 호랑이 저택으로 데려가려고 했으나 겨우 내뺐다.
늦은 시각이니 방문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혼자서 생각을 정리하고 쉬고 싶다는 말로 둘러댔다.
할 얘기는 많긴 했지만, 요새 호랑이 저택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길어진 것 같았으니까.
[황지호] 오늘 아침, 용제건과 연락이 닿았다. 계속 협회에 있었다는군.
용제건은 이계 공략을 마친 후, 협회 사람들과 합류했나 보다.
갑자기 등장한 이계를 공략한 플레이어이자 도원우와 유상희의 보호자 명목으로 계속 협회에 있었다고 한다.
용제건도 교사다운 일을 하는구나.
……그냥 본인의 재미를 위해 협회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지만.
[황지호] 용제건의 말로는 ‘눈’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더군.
[황지호] 마족은 보는 걸 좋아하지만, 보여지는 건 좋아하지 않나 보더군. 그들이 있는 장소엔 ‘눈’이 없던 모양이다.
가장 걱정하던 문제 중 하나가 해결되었다.
보는 건 좋아도 보여지는 건 싫다니.
어처구니없는 이유였지만, 학생회 임원들이나 유상훈의 모습을 누군가 보지 않아서 다행이다.
교실에 거의 도착했을 무렵, 황지호가 메시지를 추가로 더 보냈다.
[황지호] 오늘 화백 둘과 ‘이무기의 귀천’에 관해 이야기할 예정이다. 너도 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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