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숨겨야 하는 것 (1)
1학년 0반 교실.
문을 여니 권레나가 보였다.
권레나는 눈을 비비면서 홀로그램을 보는 중이었는데, 집중하고 있는지 내가 온 것도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평소에는 시간이 나면 바이올린 연습을 하지 않나? 시험 기간은 아직 멀었는데…….’
지금 들여다보고 있는 홀로그램도 공부 관련은 아닌 것 같다.
언뜻 크게 ‘남궁’이란 단어가 보인 걸 보면 신문 기사로 추정되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권레나 쪽으로 다가가 인사했다.
“안녕.”
“……어, 의신아, 안녕.”
반응이 좀 늦긴 하지만 권레나가 웃으며 인사했다.
권레나는 밝은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피로가 묻어났다.
최대한 돌려서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일찍 등교했네. 바이올린 연습하려고 이르게 등교한 거야?”
“음, 권제인 선배님께 아침 일찍 레슨을 받긴 했는데…….”
이렇게 이른 시각에?
원래 권레나는 오후에 레슨을 받았던 것 같은데.
권제인의 일정에 맞추느라 시간을 조정한 건가.
권레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망설이는 것 같았으나 곧 입을 열었다.
“……바이올린 레슨은 오후에 받을 예정이야. 아침엔 다른 레슨을 받았어.”
“다른 레슨?”
“응, 이능 바이올린으로 이능파를 다루는 연습을 했어. 권제인 선배님이 바쁘시다 보니까 추가 레슨은 밤늦게나 아침 일찍 하고 있어.”
요새 피곤해 보인다 했더니 그런 일이 있었구나.
그런데 원래 바이올린 레슨 중에 이능파를 다루는 법도 조금 배우지 않았나?
굳이 시간대를 나눈 이유가 뭘까.
혹시 본격적으로 이능파를 다루는 연습을 시작한 건가.
“채찍으론 다른 애들 전투 수준에 따라가기 힘들지만, 이능 바이올린을 잘 다루게 되면 같이 싸울 수 있을 것 같아서.”
권레나는 조금 분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저번에 방송국에서 같이 싸우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그렇게 따지면 김유리, 목우람도 무기가 없어서 싸우지 못했는데.
문득 권레나가 기숙사 옥상에서 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내 친구도 있었는데 나는 그걸 보기만 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난 아무것도 못 했다고 했잖아!
그날, 권레나는 사월세음을 두고 아무것도 못 했다며 자책했다.
염준열의 모습으로 위장한 나를 구하려고 한 건 잊었었나 보다.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었는데.’
그때도, 지금도 권레나가 친구를 소중히 여기고, 자책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다른 게 있었다.
“연주랑 이능파 관리를 동시에 하는 게 어려워. 그래도 다음에 그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 반 애들이랑 싸우고 싶어.”
권레나는 변하려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잠도 줄이고 저렇게 노력하는 거다.
‘피곤해 보이는데, 그래도 말리기도 그렇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과 권레나의 건강 걱정이 뒤섞였다.
아마 권제인도 비슷한 심정일 것 같다.
“사실, 레슨보다는 뉴스를 보는 데 시간이 많이 들고 있어. 검색하는 게 좀 어려워서…… 요즘 언니가 연락이 잘 안 돼서. 무슨 일이 있나 알아보려고.”
남궁 그룹은 저번 사건으로 플레이어 협회의 조사를 받고 있으니까 바쁠 거다.
하물며 권레나의 양언니 이여름은 사건 당시 그 자리에 있던 사원이니까.
“문새론이 만든 기사 검색 애플리케이션인데, 써 볼래?”
“응? 그런 것도 있어?”
문새론이 광고주나 포털 사이트의 입맛에 따라 멋대로 순위가 매겨지고 순서가 정해지는 걸 극혐하여 기사 검색 애플리케이션을 만든바 있다.
신문부 홈페이지에 올려도 그리 관심받지는 못했지만, 나는 애용 중이다.
권레나의 디바이스에 애플리케이션을 깔아 줬더니, 검색하기 한결 편해졌다며 감사 인사를 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고마워.”
아마 권레나는 자기 힘으로 해결하려고 하겠지만, 일단 그렇게 말해 뒀다.
다시 권레나는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마침 요즘 방윤섭이 흡연 빈도가 늘어나서 빵셔틀 이용 횟수가 늘었는데, 그때 맞춰서 권레나에게 줄 간식을 사 오게 하는 게 좋겠다.
MITRON의 신작 메뉴를 살펴보고 있으니 교실 자동문이 열렸다.
위잉!
“다녀왔습니다!”
아침에 등교했을 때 할 인사말은 아닌 것 같은데.
목우람은 씩씩하게 인사했다.
“아, 우람아. 어서 와.”
권레나의 반응을 보니 목우람은 정말로 어디에 다녀왔나 보다.
잘 보니 목우람 책상 쪽에 책가방이 걸려 있는 게 보였다.
목우람은 일찍 등교했지만, 잠시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나 보다.
“어디 갔다 왔어?”
“기숙사에 다녀왔습니다. 레나의 상태를 보고 필요할 것 같은 게 있어서요.”
목우람은 또 어디에서 이상한 걸 산 게 아닌가?
권레나도 비슷한 생각을 한 건지 보고 있던 홀로그램에서 눈을 떼고 걱정스레 목우람을 바라봤다.
“……이상한 거 산 거 아니야?”
“아닙니다. 산 게 아니라 길 가다가 우연히 만난 친절한 분께 무료로 받은 거예요.”
……어쩐지 더더욱 수상해졌다.
은광고 최고의 호구 목우람에게 순수한 호의에서 무료로 뭔가를 주는 사람은 교사, 학생 자치 기구 임원, 반 친구들 정도다.
목우람은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꺼내든 건 빳빳한 종이로 된 전단이었다.
전단에는 검증되지 않은 성분이 들어갔으나 효과를 과장해 설명한 광고 문구와 촌스러운 색의 사진이 가득했다.
“여기에 눈 피로에 좋다는 건강식품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먹기만 하면 혈액과 이능파 순환에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몇 달 절약하면 제가 살 수 있는 금액인데, 감사하게도 친절한 분이 분할 납부가 가능하다고 제안해 주셔서…….”
“……우람아! 대체 어디에서 그런 사람을 만나서 그런 걸 받은 거야. 학교에서 만난 건 아니지?”
“잠시 외출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먼저 그분이 말을 걸어 주셨습니다.”
목우람이 학교 밖으로 나가 있는 시간은 기껏해야 한 시간 남짓일 텐데, 그때 잡상인에게 붙잡히다니 그것도 놀라운 재주다.
권레나의 탄식이 들렸다.
목우람이 권레나의 걱정거리를 늘리기 전에 제안했다.
“종이 쓰레기는 분리수거함에 넣자.”
목우람은 내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권레나가 상세하게 분리수거함 위치를 일러주자 순순히 그 말에 따랐다.
황지호에게 학교 주변 잡상인 단속을 더 철저히 해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 * *
점심시간.
몇몇 학생이 결석하긴 했지만, 학교는 평화로웠다.
결석한 학생들의 대표 주자는 물론 우리 반의 등교 거부자였지만, 도원우와 유상희, 유상훈 셋이 등교 안 한 건 소소하게 화제가 되었다.
도원우의 추태를 알고 있는 이들은 유상희와 유상훈이 드디어 도원우를 처리했나 싶어 아주 조금 걱정했다.
하지만 그 셋에게 주목하는 건 소수였다.
‘여전히 독고미로를 보러 온 사람들이 많네.’
최소 한 주 동안은 홍역을 치를 것 같았다.
독고미로는 점심도 학생 식당에서 못 먹고 반 아이들과 도시락을 먹었다.
그 반 아이들 중에는 한이도 있었다.
‘대련이 끝난 후에 두 사람 사이가 어떻게 될지 걱정했는데.’
둘은 표면적으로는 잘 지내는 것처럼 보인다.
일방적으로 독고미로가 친근하게 대하고 한이가 그걸 용인하고 있는 수준이지만.
‘그런데 그건 황지호도 마찬가지 아닌가?’
마찬가지라고는 해도 한이는 황지호가 장난질할 때 대놓고 싫은 얼굴을 하니까 어떤 의미로 더 나쁜 건지도 모른다.
딩동.
식사를 마치고 소화도 시키고 생각을 정리할 겸, 혼자 걷고 있을 때 메시지가 도착했다.
새로 도착한 메시지는 내 제자가 보낸 메시지였다.
아침에 스승과 후배에게 각각 안부 인사와 날씨 예보를 해 줬는데, 또 따로 할 말이 있나 보다.
[염준열] 스승님, 어제는 불러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염준열] 아침에 메시지를 보내 놓고 생각해 보니 감사 인사를 안 한 것 같아서요.
[염준열] 다음에도 꼭 불러 주세요!
[염준열] (스탬프)
감사 인사는 그때 만나서 했으니까 안 해도 되는데.
학생회 임원 덕에 에너미를 쉽게 처리했으니 나도 도움받은 입장이라 감사 인사를 받을 처지도 아니고.
그래도 착하고 성실한 내 제자는 ‘고마워!’라는 글자 앞에서 손을 흔드는 홍룡 스탬프까지 첨부해 보냈다.
‘불러내서 일을 시킨 걸 두고 이렇게 기뻐할 줄은 몰랐네.’
앞으로 자주 부르는 게 좋을까?
아니, 그래도 염준열을 위험하게 하는 건 좀 그렇다.
또, 어제 일이 알려지면 염방열과 청룡이 나를 불태우러 올지도 모른다.
점심시간이라서 그런지 메시지는 계속 도착했다.
[장남욱] 얘들아, 어제 얘기는 제천대성 씨한테 전해 들었어. 정말 고생이 많았다. 사전에 말해 줬으면 나도 같이 갔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워. 다음에는 꼭 나도 잊지 말고 불러 줬으면 좋겠다.
[유상훈] ㅇ
협회에 있는 유상훈도 지금은 메시지를 확인할 여유가 있는 건지 확인하고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ㅇ’이라니.
무슨 일이 있으면 장남욱을 부를 생각인가.
장남욱은 쉬지 않고 긴 메시지를 보냈는데, 저렇게 메시지 쓸 기운이 있는 걸 보니 사관학교 쪽엔 별일 없나 보다.
도시후 건이 무사히 수습되어 안심했는데, 별로 안심되지 않는 메시지가 추가로 도착했다.
[장남욱] 아, 혹시 까마귀 가면이 필요한 거면 내 몫은 미리 준비할게. 디자인은 제천대성 씨가 자세히 알려 주셨어. 시후도 같이 만들기로 했어. 무슨 일이 있으면 시후도 너희와 함께 싸우고 싶다고 하더라.
……뭘 만들어?
장남욱이 말도 안 되는 짓을 하려 들기에 말리려고 했지만, 여기에 유상훈이 기름을 끼얹었다.
[유상훈] (사진)
[장남욱] 오, 사진도 있구나. 고마워, 상훈아. 이 사진을 참고해서 까마귀 가면을 만들게.
유상훈은 그날 까마귀 가면을 가져가 버렸다.
무슨 일이 있으면 또 꺼내서 쓸 생각인 듯했는데, 바로 이런 데다 써먹다니.
대체 저놈은 뭔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일단 장남욱을 말려 보기로 했다.
[나] ㄴㄴ
만들지 말라는 뜻에서 메시지를 보냈는데, 장남욱이 멋대로 내 말을 해석했다.
[장남욱] 아, 완전히 똑같으면 좀 그렇지. 디자인을 조금 다르게 하는 게 좋을까? 알았어. 나름의 차별성을 둬서 만들도록 할게! 지금 도구를 사러 갈 예정이야. 다음에 완성하면 메시지 보낼게!
[유상훈] ㅋ
평소에 메시지를 짧게 보낸 폐해가 여기에서 나타났다.
추가로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읽음 처리가 되지 않는 걸 보니 장남욱은 메시지창을 끄고 쇼핑에 나선 것 같았다.
말리기엔 이미 늦은 것 같아 결국 포기했다.
뒤이어 도시후에게서 대충 고맙다는 내용의 메시지가 도착했지만, 답변할 기력이 없어서 대충 확인만 하고 넘어갔다.
이참에 밀린 메시지를 처리하고 있는데, 몇십 시간 째 출근 중인 어느 근로자로부터 온 메시지가 눈에 띄었다.
[홍규빈] 의신아…… 올해는 은광고 관련 사건이 정말, 정말 많구나……^^;
방송국 사건이 터진 지 얼마나 됐다고 TC 연구소 사건이 터졌으니 골이 아플 거다.
하지만 홍규빈이 여태까지 맡아 온 사건들과 이어지는 부분도 있고, 또 방치할 수도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영혼 없이 ‘힘내세요’라는 말을 쓰려 할 때였다.
[홍규빈] 붙잡힌 연구원들이 까마귀 가면을 언급하던데.
[홍규빈] 게다가 지하 조사를 할 때, 언령의 힘이 사용된 흔적이 발견되었어.
중앙도서관 지하서고 사건 당시 홍규빈 앞에서 까마귀 가면을 보인 적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제갈재걸의 모습으로 최편득 추종자의 눈을 속인 적이 있으니 내 생각을 할 수밖에 없을 거다.
[홍규빈] 이 건은 내가 잘 처리할게. 대신 앞으로도 잘 부탁한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되었지만, 신문부에서 제갈재걸 특집 기사 등을 쓰거나 굿즈를 만들면 보내라는 뜻일 거다.
‘축제 때 2학년 0반이 ‘제갈재걸 선생님 3D 화보집’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나? 그걸 보면 좋아할 텐데.’
구질구질한 첫 제자가 오면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싫어하겠지만.
그리고 기다리던 메시지가 도착했다.
[황지호] 이사장실로 와라.
나는 두 화백을 만나기 위해 이사장실로 향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