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숨겨야 하는 것 (2)
은휘관으로 이동하다가 민그린과 만났다.
민그린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전력 질주 중이어서 자칫하다간 말 걸 기회를 놓칠 뻔했다.
아직 시간이 넉넉하게 남았는데 왜 그렇게 뛴 걸까.
식후 운동이라도 한 걸까.
“야, 같이 가자.”
내가 불러 세우자 민그린이 급히 멈춰 섰다.
그렇게 속력을 내서 달렸으면 바로 멈추기 힘들 텐데, 유연하게 몸을 낮추고 이능파로 제동을 거는 솜씨가 훌륭했다.
‘플마고 속에선 한 번 달리면 멈추는 데 애를 먹었는데.’
민그린과 송대석이 함께 등장한 시나리오.
그 시나리오에서 전력으로 달리던 민그린이 이능파를 제어하지 못해 멈추지 못하자 송대석이 강화한 팔로 붙잡아 멈추게 하는 장면이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나도 아이템 카드를 꺼내 놨는데, 쓸데없는 걱정이었나 보다.
민그린은 먼지구름을 일으키고 완벽하게 멈춰 섰다.
그 시나리오가 진행될 때와 달리 민그린의 이능파는 안정된 상태였고, 독학으로 달리는 법을 배울 때와 달리 지금은 훌륭한 교사진의 가르침을 받은 덕일 거다.
온갖 찬사가 떠올랐지만, 부담스러워할까 봐 애써 삼켰다.
“걸어가도 될걸. 아직 시간 남았어.”
“……대석이 떼어 놓고 오느라 조금 달렸어.”
내가 민그린에게 ‘이무기의 귀천’의 비밀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한 건 반 아이들 모두가 알긴 한다.
하지만 그 ‘이무기의 귀천’이 이사장과 관련되었는지는 황지호를 제외한 반 아이들은 모르는 상태다.
그러니 민그린은 이사장을 만나러 간다는 말은 해도, ‘이무기의 귀천’의 비밀을 듣기 위해 간다는 말은 못 했을 거다.
‘반 아이들에게는 알려져도 상관없는데.’
하지만 민그린 입장에선 가뜩이나 바쁜 송대석이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걸 경계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번 건도 그냥 이사장을 만나러 간다고 둘러댔던 것 같았다.
그에 반해 민그린이 갑자기 이사장을 보러 간다는 말에 송대석은 경계했을 거고.
그렇긴 해도 이번 면담엔 홍경복 화백도 같이 오니까 상관없지 않나?
민그린은 뒤늦게 그걸 떠올렸는지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사부님하고 같이 간다는 말을 해 둘 걸. 그랬으면 안심했을 텐데.”
“지금이라도 메시지 보내는 게 좋겠다. 안 그러면 은휘관에 쳐들어올걸.”
“어…… 그래야겠다.”
송대석은 이미 은휘관행 에어 셔틀에 올라타 있을 것 같지만.
송대석이 메시지를 끈질기게 날리고 있는지, 민그린은 은휘관으로 향하는 내내 디바이스에 매달렸다.
설득에 성공했는지 민그린은 다소 밝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은휘관 로비에 도착했을 때였다.
홍경복 화백과 누군가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홍경복 화백에게 인사를 하려고 다가갔을 때였다.
“경복아, 관리 좀 해. 너 보니까 나까지 늙는 기분이야.”
……들린 말이 충격적이라 순간 나도 모르게 멈춰 섰다.
경복이? 관리? 늙어?
이 말을 지금 홍경복 화백에게 한 건가.
민그린은 얼빠진 얼굴로 두 사람을 봤는데, 나도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홍경복은 그 말을 듣고도 ‘허허허’ 하고 웃을 뿐이었다.
“허허, 자네는 20년 전하고 변한 게 없구먼. 겉모습도 그렇지만, 알맹이도 똑같네.”
“칭찬 고마워.”
홍경복 화백 앞에 서 있는 중년 여성이 생긋 웃었다.
……그런데 저게 과연 칭찬이었을까?
겉모습 운운은 그렇다 쳐도 알맹이가 변하지 않았다는 건 성장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는 것 아닌가.
하지만 두 사람은 기분 상한 티 없이 서로 격 없이 대화를 이어 갔다.
외양만 보면 홍경복 화백이 한 세대 위로 보이는데, 대화 내용을 들으면 오랜 친구가 만나 이야기하는 것만 같았다.
“의신아, 저분 혹시…….”
민그린은 홍경복 화백과 대화하는 이가 누군지 알아챈 것 같았다.
홍경복 화백과 격식 없이 대화를 할 만한 존재.
은휘관에 출입할 만한 은광고 인물.
긴 머리의 여성.
이 정도 힌트가 있으면 아마 은광고 학생들은 다 알 거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민그린의 말에 답했다.
“우리 학교 교장 선생님이야.”
“아…… 이렇게 가까이에서 뵌 건 처음이라서 바로 못 알아봤어.”
그야 은광고 교장은 사람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니까.
은광고 교장은 원래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인물이라고 한다.
교장 자리에 오르면 은광고 교직원 대표로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데, 그게 내키지 않아서 교장직을 몇 차례 거절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론 이사장의 설득으로 교장직을 조건부로 수락했다.
‘교장이 제안한 조건은 두 가지라고 들었는데.’
교장이 제안한 조건 첫째, 도서관 증축 및 도서부 예산 확대.
은광고의 도서관 규모나 장서 수는 이미 세계적인 수준이었는데, 교장 성에 안 찼나 보다.
돈에 아쉬울 게 없는 황지호는 이 조건을 바로 받아들였다.
‘두 번째 조건은 조금 까다로웠는데.’
교장이 제안한 조건 두 번째, 공식 행사에 얼굴을 가리고 나가는 것을 허락할 것.
지금은 플레이어 중에 얼굴을 가리고 활동하는 이들도 많아, 공식 석상에 얼굴을 감추는 게 큰 흠이 아니다.
하지만 교장이 교장직을 수락한 몇십 년 전의 사회 분위기를 생각해 봤을 때, 학교의 대표가 얼굴을 가리고 활동한다는 건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황지호는 황명재단 홍보팀을 총동원해 교장의 의지를 존중해 줬다.
‘보통은 교감이나 이사진 중의 한 명이 교장을 대신해서 움직이긴 했지만, 얼굴을 내밀어야 할 때도 있지. 사관학교 교류전 개막식처럼.’
그리고 은광고 교장이 언론을 기피하는 이유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 의해 밝혀진 적이 있었다.
홍천에 방문했을 당시, 교장이 홍천 출신이라며 송대석이 교장에 관해 말했다.
송대석의 말에 의하면 교장이 그렇게까지 하면서 얼굴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
유명인이 되면 돈 많이 버는 줄 알고 바가지 씌울까 봐.
우리 학교 교장은 현실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다.
“내 제자가 왔구먼.”
한참 즐겁게 대화하던 홍경복 화백이 이쪽을 돌아봤다.
우리를 교장에게 소개할 생각인지 이쪽으로 손짓했다.
민그린은 쭈뼛거리며 그쪽으로 다가갔다.
어른 앞이니 후드 모자를 벗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는데, 홍경복 화백이 후드 모자 위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교장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본인도 평소에 공식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마음껏 감추고 있으니 별생각 없는 게 정상일 거다.
“자네한테 소개하는 건 처음이지. 내 수제자, 민그린일세. 이쪽은 그린이네 반 부반장 조의신.”
“……안녕하세요.”
나와 민그린이 꾸벅하고 인사하자 이번엔 홍경복 화백이 교장을 우리에게 소개했다.
가까이에서 봐도 스카프와 늘어뜨린 긴 머리 탓에 교장의 얼굴이 3분의 1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쪽은 황보윤. 은광고 교장이니 너희도 이름은 들었겠지.”
은광고 교장 황보윤.
성은 ‘황보’, 이름은 ‘윤’.
중성적인 이름이라 직접 교장에 대해 찾아보고 알아보지 않으면 성별도 알기 힘들 만큼 베일에 감춰진 인물이었다.
“놀라지 않는구나. 윤이가 교장인 걸 알아봤나?”
“교류전 개회식 때 멀리서 뵈었어요.”
내 말에 황보윤이 한숨을 푹 쉬었다.
진심으로 나가기 싫었나 보다.
“……나가기 싫었는데, 그쪽에서 사관학교장이 나오니까 갈 수밖에 없었어.”
“괜히 얼굴을 감춘답시고 젊은이들의 축제에 찬물을 끼얹을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아, 늙은 티 좀 그만 내.”
“허허허. 자네가 아직 정신이 미숙해서 그런 게 아닌가.”
두 사람이 투닥거리는 모습을 보니 참 묘했다.
홍경복 화백은 송만석과 동갑인 72세고 황보윤은 겉보기엔 3, 40대로 보였다.
대충 보면 두 사람은 부녀 관계로 보였지만, 저렇게 농담을 나누는 걸 보면 나이와 우정에는 관계가 없나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했는데, 홍경복 화백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윤이는 내 오랜 친구다. 덧붙여 말하자면, 이래 봬도 윤이는 나와 동갑이란다.”
뭐라고?
방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건가.
귀를 의심했다.
옆에 있던 민그린이 ‘헉’ 하고 소리를 내려다 입을 틀어막았다.
나도 벌어지려는 입을 겨우 다물었다.
“생일까지 따지면 내가 어릴걸.”
“허허, 70 넘게 살고도 아직 그 몇 개월을 따지고 있나. 정 따지고 싶으면 앞으로 먼저 태어난 나를 높여 부르게.”
“싫은데?”
황보윤은 겉보기엔 3, 40대 정도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는데 홍경복 화백과 동갑이라니.
홍경복 화백도 정정한 편이었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급 나이 들어 보였다.
‘……홍경복 화백이 좀 고생이 많았지.’
민그린으로 제자로 받아들인 후, 얼마나 많은 사건을 겪었는가.
제자라고 믿었던 것들은 민그린을 집단적으로 따돌리지 않나.
그들의 계략으로 민그린은 영원히 붓을 놓을 뻔하지 않나.
많은 걸 포기해 가며 기껏 파문시켜 놨지만, 민그린은 등교 거부자가 되지 않나.
겨우 민그린이 등교를 시작했더니 악플을 달고 0반 교실까지 찾아와 수작질을 부리려 하지 않나.
홍경복 화백이 고생을 많이 했으니, 그만큼 얼굴에 고생이 묻어나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황보윤 교장은 지나치게 어려 보이는데.’
플레이어 중에는 동안이 많지만, 이건 도를 좀 지나친 것 같다.
드러난 얼굴은 나이에 비해 몹시 젊어 보였으니까.
얘기하던 중, 황보윤이 시계를 확인했다.
손목을 들어 보였는데, 아날로그 시계를 애용하는 듯했다.
“이사장이랑 면담 있다면서? 이제 슬슬 시간 되지 않았어?”
“그래, 이제 가 봐야겠군.”
“그럼 다음에 봐.”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헤어졌는데, 보면 볼수록 정말 동갑내기 친구 같아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놀랄 일도 아니야.’
도가 너무나도 지나친 노친네가 저 너머에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서 오게.”
비서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은휘관 이사장실.
황명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황지호는 예의 그 위압적인 이사장실에서 앉도록 권했는데, 홍경복 화백은 대범하게 앉고 민그린은 나와 홍경복 화백을 보다가 따라 앉았다.
민그린은 처음엔 이사장실의 위용에 놀란 듯했지만, 곳곳에 있는 예술품이 더 시선을 끄는 듯 곧 자연스럽게 행동하게 되었다.
그 모습을 관찰한 황지호가 흡족한 얼굴을 했다.
민그린이 이 분위기에 안 눌리고 행동하는 게 마음에 들었나 보다.
인사치레로 몇 마디 말을 나눈 황지호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으니 본론부터 꺼내겠습니다.”
일단 황명호는 60대라는 설정이니, 홍경복 화백에게 존댓말을 썼다.
“그러면 확보한 ‘이무기의 귀천’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황지호가 품에서 ‘이무기의 귀천’ 카드를 꺼냈다.
두 사제는 카드화된 그림을 보고 잠시 놀란 얼굴을 했지만, 이미 그림이 카드화 가능하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상황은 각오했는지 곧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파앗!
‘이무기의 귀천’이 실체화되고, 황지호가 그림을 지력 지도와 비교해 전개했을 때였다.
“잠깐.”
“잠깐만요!”
홍경복 화백과 민그린이 무언가를 찾아냈는지, 동시에 목소리를 높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