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41화 (440/925)

65. 숨겨야 하는 것 (5)

정문이 열린 후에도 천동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천동하는 멈춰 서서 심호흡을 하기 시작했다.

천동하가 황명호 대저택에 방문하는 건 두 번째인데도 매우 긴장되나 보다.

‘저번에 왔을 땐 이렇게 긴장한 것 같진 않았는데. 그때는 동생의 정체에 마음이 복잡해 긴장할 정신이 없었나.’

황지호의 미학이 담긴 화려한 대저택을 앞에 두고, 그 안에 스며 있는 마력을 느낀다면 누구나 떨릴 거다.

그 안에 거주하는 호랑이들의 정체가 신화계 호족이란 걸 안다면 더더욱 그렇다.

천은하가 은호임이 밝혀졌을 때, 은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친우들과 함께 신화시대를 보낸 호족인 은호이기도 하고, 동하 형이 약 1년간 보살펴 준 동생인 은하이기도 해요.

신화시대를 보낸 호족.

거기에다 황지호가 천동하에게 황명 그룹의 비밀을 말하지 않았던가.

―황명 그룹의 관계자로 알려진 이들 중 황씨 성을 가진 존재는 모두 호족이거나 그 관계자다. 참고로 말하면, 네가 만난 황명 그룹의 황씨는 모두 호족이었다.

단순히 신화시대에 존재한 호족이라고 하기엔 현대에서 황명 그룹의 입지가 너무 컸다.

직접적으로 이곳에 있는 호랑이들이 신화계 호족임을 밝히진 않았지만, 은호와 황지호의 발언을 통해 천동하는 확신하고 있을 거다.

이 저택에 신화계 호족이 있다고.

긴장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나도 처음 왔을 땐 좀 긴장했는데.’

만우절, 은서호를 구출하고 처음으로 황명호 대저택에 방문했었다.

게임에선 얼마 등장하지 않았던 황명호 대저택을 실제로 보고 그 위용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사랑스러운 올무와의 첫 만남 때문에 긴장이 금방 풀렸지만.

그때는 한쪽 다리에 서포터를 착용하고 힘들게 뛰었는데, 지금은 건강해 보여서 안심이 되었다.

“의신이는 평소와 다름없구나.”

천동하가 내 쪽을 보며 놀란 얼굴로 칭찬하는 투의 말을 던졌다.

그냥 천사를 생각하고 있었을 뿐인데.

내 짧은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몰라도 천동하는 반성하듯 말했다.

“……동생을 만나러 가는 건데 이렇게 긴장하다니. 너를 본받아야겠네.”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나를 보고 민망했는지 천동하가 멋쩍어했다.

그런데 동생을 만나러 간다고?

나를 본받는다는 말보다 그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자연스럽게 동생이라고 부르네.’

은호가 천동하에게 계속 ‘동하 형’이라고 부르며 따른 탓일까, 아니면 천동하의 배포가 남다르기 때문일까.

천동하는 신화시대를 지낸 호족을 자신의 동생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이렇게 긴장한 걸 보니 완전히 익숙해지지는 않은 것 같긴 하지만.

‘……은호가 은광고에 입학하면 나도 자연스럽게 ‘천은하’라고 불러야겠지.’

머뭇거리다가 의심을 사지 않도록 주의해야겠다.

뭣하면 나중에 연습하면 될 거다.

생각을 짧게 정리하고 천동하와 잡담을 나누며 걸어갔다.

평소라면 미로 정원 이동용 에어 셔틀을 탔겠지만, 오늘은 본채가 아닌 은호가 있는 별채가 목적지였기에 도보로 이동했다.

다양한 양식 중 가장 현대적인 분위기를 띤 별채 현관 앞, 은호가 서 있었다.

“어서 오세요, 동하 형, 의신이 형. 저택 정문까지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해요.”

날이 추워서 그런지 은호는 터틀넥 셔츠에 두꺼운 카디건을 걸치고 있었는데, 옷차림새만 보면 천성헌 시절이 떠올랐다.

물론, 비슷한 건 옷과 특유의 너그러운 분위기뿐이었다.

풍성한 은발을 하나로 묶은 은호와 짧은 흑발을 했던 천성헌의 외모는 많이 달랐다.

천성헌 시절 앞머리가 눈썹까지 내려왔으니 숏컷 중에선 긴 편에 속하긴 했지만, 은호에 비하면 턱없이 짧았다.

“몸은 괜찮아? 깨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일을 돕는다고 해서 걱정했어.”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동하 형. 걱정해 주신 덕분에 저는 무탈해요.”

천동하는 동생을 보니 긴장보다 걱정이 앞서는지 바로 말을 건넸다.

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느라 타이밍을 놓쳤는데, 정말 천동하는 나에 비해 좋은 형인 것 같다.

은호의 안내를 받으며 별채 안으로 들어서려 할 때, 본채 쪽에서 황지호가 나타났다.

황지호는 미로 정원 이동용 에어 셔틀을 타지 않고 직접 뛰어온 것 같았다.

“다들 왔군.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춰 온 셈인가.”

“안녕, 지호야. 무슨 일 있었어?”

천동하는 저번에 황지호가 노친네 말투를 쓰는 걸 보고 어색해했는데, 이제 나름 적응이 됐나 보다.

황지호가 고등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한, 그냥 0반 후배 취급할 작정인 것 같았다.

“식구들에게 아침밥을 해 주고, 함께 식사를 하느라 늦었다.”

황지호는 본채에서 은호의 후예들에게 밥을 차려 주고 온 건가.

천동하는 신화계 호족으로 추정되는 존재가 아침밥을 하다 왔다는 말을 듣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구나…….’ 하고 짧게 답하긴 했지만, 천동하는 그 이상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따뜻한 음료는 모과차, 찬 음료는 오렌지 주스가 있어요.”

“모과차로 부탁할게.”

“이 몸도 모과차로 하지.”

자리에 앉으니 은호가 음료를 권했다.

반사적으로 오렌지 주스라고 답하려다가 날도 서늘하고 모과차 맛도 보고 싶어서 대세를 따르기로 했다.

‘나도.’라고 답했더니 황지호가 한마디 덧붙였다.

“다른 걸 마시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하도록.”

“응.”

대답은 그렇게 했지만, 은호가 직접 대추와 생강과 함께 우려냈다는 모과차의 맛이 좋아서 다른 음료를 찾진 않았다.

음료보다는 다른 게 마음에 걸렸다.

‘백호군이 안 보이는데.’

백호군이 말수가 적긴 하나 이런 자리엔 늘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적호야 임무 때문에 자주 빠진다고 하지만, 신역의 죄수인 백호군은 거의 저택에 있었으니까.

올무도 없는 걸 보니 같이 식후 산책이라도 간 걸까.

아니, 평소라면 산책을 미루고 바로 이 자리에 왔을 텐데.

은호가 찻잔을 꺼내지 않는 걸 보니 처음부터 오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던 것 같았다.

“먼저 동하 형의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적호가 도왔던 건은 어떻게 됐지?”

은호가 일어난 첫날에 준비했던 신변 정리 건인가.

은호는 ‘천은하’로서의 신분을 쓰기로 했지만, 현재 서류상 천은하는 여전히 황명 연구소 지하에서 감금 증후군에 걸린 것으로 되어 있다.

게다가 천은하는 천씨 집안의 사생아고, 은호는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태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해 있으니 준비해야 할 것도 많을 거다.

‘그래도 천동하가 전면적으로 나서고, 호족이 도왔다면 문제없겠지.’

유능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는 브리핑도 철저하게 대비했는지 홀로그램을 몇 개 띄웠다.

그 안에는 천은하의 활력 징후를 기록한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기록된 게 아니라 조작된 거지만.

그래프의 양상을 보니 천동하가 무엇을 의도하는지 알 수 있었다.

‘은광고 입학시험 서류 전형 시작 전에 눈 뜨게 할 생각이구나.’

천동하가 띄운 홀로그램 중에는 은광고의 신입생 입학 전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문득, 체스를 둔 후 동생이 은광고 입시시험을 치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던 천동하가 떠올랐다.

마침 모과차를 전부 비웠기에 은호에게 물었다.

“믹스 커피 있어?”

“……네! 브랜드별로 전부 있어요. 어느 걸로 드실래요?”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은호는 곧바로 믹스 커피를 꺼냈다.

기뻐하는 걸 보니 은호에게 천성헌 시절의 입맛이 남아 있었나 보다.

마시고 싶었는데 황지호 때문에 다른 걸 택한 건가?

실제로 황지호 입맛에는 안 맞아 보였지만, 나와 은호 그리고 천동하는 아주 잘 마셨다.

천동하는 한결 밝아진 얼굴로 브리핑을 계속했다.

“이대로 수치를 조정하면, 은광고 입학 전형 시작 일주일 전에 눈 떠도 이상하지 않을 거야.”

“은광고 서류 전형에 응하려면 중학교 졸업자와 동등의 학력이 필요할 텐데. 준비할 수 있나?”

“중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를 치를 예정이야. 은하는 이능이 있잖아. 청소년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한 검정고시는 열리는 텀도 짧고, 결과 발표도 빨라.”

가끔 청소년 플레이어들이 초등학교나 중학교를 졸업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계 공략이나 이능 발현으로 인한 입원, 플레이어 관련 행사 참가 등으로 인한 결석이나 시험 미응시를 빌미로 졸업을 안 시켜 주는 게 그러했다.

대체 시험, 과제 등의 수단이 있으나 이는 교육기관의 재량에 달려 있어 학교장이나 담임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 예비 플레이어가 불이익을 당하곤 했다.

‘맹효돈도 그 탄래중의 수학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중학교 졸업이 힘들었겠지.’

17세 이상의 정식 플레이어라면 협회가 나서서 중재하거나 압력을 행사하지만, 17세 미만 청소년 플레이어인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은 그렇지 못했다.

결국 구제 조치로 마련한 게 잦은 빈도로 치러지는 청소년 플레이어 대상 초등학교, 중학교 졸업 학력 검정고시였다.

학교의 갑질로부터 지켜 주는 데에 한계가 있으니 탈주해서 학력을 인정받고 고등학교에 진학하라는 배려였다.

‘천성헌 시절의 성적을 생각하면 검정고시나 입학시험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네.’

한때 천성헌은 입학 비리, 성적 관련 부정 청탁 루머에 시달렸다.

의혹을 부추기고자 한 언론사나 평소 천성헌을 질투했던 학교 사람들은 그의 학력을 의심했다.

그러나 천성헌은 오롯이 제힘으로 명문대에 수석으로 합격하고, 학점을 유지했다.

‘은광고도 수석으로 입학하지 않을까?’

본채에서 은광고 공동 수석을 목표로 공부 중인 은서호와 은이호가 떠올랐다.

두 후예의 학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천성헌 시절을 생각하면 둘이 은호를 이기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믹스 커피를 다 마실 때쯤 주제가 바뀌었다.

“문제는 우리 집인데…… 눈을 뜬 이후에도 검사를 핑계로 황명 연구소에 계속 머무는 걸로 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저도 그편이 좋아요. 황명 연구소에 머물다가 은광고 기숙사에 들어가는 게 어떨까요?”

은호의 제안에 천동하가 안심한 얼굴을 했다.

천동하가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집안이 많이 개판이었나 보다.

믹스 커피를 한 잔 다 비울 때쯤, 주제가 바뀌었다.

“그리고 TC 연구소 건 말인데…….”

천동하는 TC 연구소 사건에 관해 설명했다.

이야기는 복잡하지만, 요약한 결과는 다음과 같았다.

3개의 파벌로 갈린 TC 그룹 내에서 천씨가 치고 올라가게 되었다.

TC 연구소의 인공 강림 프로젝트는 계열 분리 반대파에 의해 주도되었지만, 어쨌든 연구소가 도씨 집안 치하에 있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위법적인 프로젝트를 진행한 이상 도의적으로, 법적으로 책임져야 할 부분이 많았다.

“도씨 내부에서 불순한 짓을 한 자들을 숙청 중이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나는 바람에 상황이 더 복잡해졌어.”

그 복잡한 상황 속에서 천동하가 도원우나 유상희에게 피해가 안 가도록 움직이고 있었다.

아직도 계열 분리 반대파 측에선 정신을 못 차려서 상황 정리에 어려움을 겪은 듯했다.

천동하는 쓴웃음을 지었다.

“어떻게 온 건지 상희 누나한테 접근하려 했더라. 덕분에 잔챙이 하나를 수고 없이 잡았어.”

아마 유상희의 입막음을 시도하려던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그러다가 도원우와 유상훈 손에 죽을 뻔했다고 한다.

단순한 해프닝으로 마무리된 일이었지만, 걸리는 점이 있었다.

‘예전에 협회 내부를 정리한 걸로 안 끝났나 보네.’

최편득 체포 당시 위성 조작 건이 드러나 협회가 한 번 뒤집혔는데 아직 문제가 남아 있는 듯했다.

또, 카드모스 신변 확보 건을 두고 염방열을 상대로 고집을 부렸다는 협회 간부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협회 측에 문제가 생기는 시나리오도 고려해야겠다.’

그때 현관 쪽에서 작게 소리가 들렸다.

누군가가 들어오는 듯했다.

황지호가 곧바로 기척을 파악했다.

“백호가 왔군.”

황지호의 말대로 곧 백호군이 별채 응접실로 들어왔다.

백호군은 어딜 다녀온 걸까.

이 의문의 답은 금방 나왔다.

백호군의 한 손에 축 처진 산령이 붙잡혀 있었으니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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