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42화 (441/925)

65. 숨겨야 하는 것 (6)

“백호 형님, 어서 오세요.”

“고생했다. 예상외로 오래 걸렸군.”

호랑이들은 백호군이 산령을 잡으러 간 걸 알고 있었나 보다.

축 처진 산령은 주변에 호랑이가 늘어난 걸 감지하고 경악했다.

죽은 척, 기절한 척했다가 백호군이 틈을 보이면 도망치려 했구나.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 백호군이 그런 허술한 실수를 할 리가 없는데 왜 불필요한 발버둥을 치는 건지 모르겠다.

휙.

산령이 황지호와 은호에 이어 나를 발견했다.

산령은 나를 보자 눈에 띄게 밝은 얼굴을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내 쪽을 향해 손을 싹싹 비볐는데, 도와 달라는 뜻인가?

그 행위를 본 내 감상은 하나였다.

‘이제 안광 스킬을 사용하지 않아도 산령의 실체가 확실히 보이는구나.’

처음에 기체 덩어리에 가까운 형태였던 산령을 제대로 보기 위해선 안광 스킬을 써야 했는데.

이젠 정신을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무슨 동작을 하는지, 어느 쪽을 보는지 분간이 가능할 정도가 되었다.

백호군이 산령을 열심히 훈련을 시킨 덕일 거다.

백호군이 한 고생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지만, 신화계 호족이 얼마나 유능한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어 뿌듯한 기분이 동시에 들었다.

“저분 손에 뭔가가 있네.”

‘보는 것’에 일가견이 있는 안중지계(眼中之界)답게 천동하는 바로 산령을 꿰뚫어 봤다.

산령이 예전보다 존재감이 늘어난 덕도 있지만, 천동하의 눈이 예리했기에 바로 산령을 알아본 걸 거다.

속으로 백호군과 천동하에게 칭찬을 퍼붓고 있을 때, 백호군의 손아귀 주변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무해.”

산령이 말했다.

나를 보고 너무하다는데 뭐가 너무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말을 하는 게 신기했다.

물론 저 말을 듣고 도와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번엔 개량 한복을 입고 사진을 찍더니 이제 말까지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은호가 추가로 건넨 디카페인 믹스 커피를 마시고 있자니 호랑이들이 수근거렸다.

“툭하면 조의신에게 매달리는군. 조의신은 은근히 가차 없거늘.”

“의신이 형은 공과 사를 가릴 줄 아시는 현명한 분이죠.”

공과 사를 가려야 하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그냥 하는 소리였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은호가 하는 칭찬에 낯이 간지러웠다.

“이 정도로 실체화가 가능할 만큼 영기를 얻었다면, 말을 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죠.”

“다소 늦은 감이 있다만. 이 산령이 덜떨어져서 그런 건가.”

황지호는 산령이 벌인 온갖 장난질의 피해자로서 신랄한 말을 던졌다.

노친네가 나보고 은근히 가차 없다고 했는데, 황지호 저놈은 대놓고 가차 없었다.

산령은 황지호의 매도에 익숙한 건지, 노친네는 무시하고 내 쪽을 보며 투덜거렸다.

“……당신은 정말로 천익산의 산령인가요?”

산령을 유심히 관찰하던 은호가 물었다.

나는 산령 같은 존재에 관해 잘 알지 못하니 판단하기 어렵지만, 호족의 입장으로 볼 때는 뭔가 다른 건가?

‘아니, 만약 산령에게 문제가 있었다면 호랑이들이 눈치챘을 거야.’

이 저택에 있는 신화계, 전설계 호족들이 산령에게 은호의 후예들과 놀도록 허락하지 않았는가.

저기 있는 존재는 천익산의 산령임이 틀림없었다.

내 생각대로 황지호가 곧 부정했다.

“이 덜떨어진 산령이 호족의 영산(靈山) 천익산의 기운을 받은 걸 믿을 수 없긴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러하다.”

황지호는 진심으로 아쉬워하는 태도로 말했다.

하긴, 산령이 은호의 후예들을 데리고 시체 놀이로 황지호를 낚았는데, 좋게 생각하는 쪽이 더 이상했다.

은호는 아직 의구심을 버리지 못했는지 계속 물었다.

“황호 님과 백호 형님이 천익산에서 산령을 발견했다고 하셨죠?”

“그래, 이 산령이 천익산의 영기를 지닌 건 확실하다. 이 몸이 보증하마.”

은호는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산령을 주시하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천성헌이었던 시절에 저런 눈빛을 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때마다 천성헌이 놀라운 통찰력을 보여주곤 했다.

은호는 백호군에게 말을 걸었다.

“백호 형님, 산령을 소파에 앉혀 주시겠어요?”

“도주의 우려가 있다.”

백호군이 서늘한 음성으로 답했다.

그 목소리에 백호군에게 목덜미를 잡혀 있던 산령이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저 천방지축 산령도 범 무서운 줄 아는가 보다.

은호는 백호군과 산령 몫의 모과차를 준비하며 말했다.

“황호 님과 백호 형님이 있는 자리에서 도망칠 수 있을 리가 없죠. 지난번에 은휘관의 지하에서는 저를 염려해 추적하지 않은 것뿐이잖아요.”

“뭐, 이번에도 도망친다면 이 몸이 직접 산령을 포획하겠다.”

그간 산령의 교육을 다 백호군에게 미뤄 두던 노친네가 잘난 듯이 말했다.

진작에 도와줬으면 일이 빠르지 않았을까?

황지호가 할 일이 워낙 많으니 어쩔 수 없겠지만.

이해는 했지만 백호군이 한 고생을 생각하니 좀 그랬다.

은호는 비어 있는 소파 앞 테이블에 모과차 두 잔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먼저 예의를 갖춰 대하면 산령도 그러리라 믿어요. 천익산의 영기를 받은 존재라면 마땅히 그러하겠죠.”

은호가 부드럽게 말했지만 숨은 뜻을 생각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은호의 발언은 산령이 여기에서 무례하게 굴면 천익산의 영기를 받은 존재로 취급하지 않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었으니까.

그럼 산령은 이 호랑이굴에서 영산의 산령도, 손님도 뭣도 아닌 존재가 된다.

산령도 바보가 아니었는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백호군과 산령이 앉는 사이, 천동하가 침음했다.

은호가 건넨 커피잔을 쥐고 있던 천동하는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는 걸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은호는 호랑이들과 가족이고, 천동하는 은호가 친형처럼 대하고 있어. 그러니 황지호나 백호군도 천동하를 인정하는 거겠지.’

그렇기에 호랑이들도 천동하 앞에서 정체를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대하는 걸 거다.

굳이 비유하자면 호랑이들은 천동하를 먼 친척처럼 대하는 것 같았다.

천동하보다는 오히려 그냥 협력자, 같은 반 급우, 옛 선배 정도인 내 입장이 더 미묘하지 않나?

늘어져 있던 산령이 다소 기운을 차리자 은호가 입을 열었다.

“신화시대에는 한반도의 산천에 산령과 천령이 넘쳐났죠. 지금과 다르게요. 이유를 아시나요?”

“강력한 힘을 지닌 것들은 산신령, 상위 존재가 되어 하늘로 올라가고, 이 땅은 신의 힘과 점점 멀어졌으니까.”

“맞아요. 그나마 강력한 지력을 품은 산에는 계속 산령이 깃들었죠. 하지만, 천익산에선 그러기 힘들 거예요.”

은호는 홀로그램으로 어느 사진을 띄웠다.

나도 본 기억이 있는 사진이었다.

은호가 띄운 건 돈족이 끊어 둔 천익산의 지맥 위치를 표시한 위성 사진이었으니까.

그 위치는 플마고에 있던 프리 퀘스트, ‘기숙사에 쳐들어온 야생 멧돼지를 퇴치하라’를 떠올리게 했다.

‘……보상이 구려서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안 했는데. 할 때마다 퀘스트 시작 위치가 바뀌길래 기록을 위해 플레이하긴 했지만.’

은광고의 보호 결계는 야생 동물의 침입을 막을 수 없었기에 천익산은 황지호의 방관 속에 야생 멧돼지의 습격에 시달렸다.

지익회가 대처하긴 했지만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데다, 플마고 개시 시점엔 지익회 고문으로 최편득이 들어앉는 바람에 멧돼지 퇴치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플마고와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이 세계에 들어온 이후의 이야기다.

“오랜 기간 천익산의 지맥은 끊겨 있었어요. 그 덕에 지력이 약해져 있었죠. 신수를 늦게 발견했다면 인간의 손에 죽었을 정도로요.”

은호는 플마고를 플레이했으니 솜뭉치에 관한 내용도 기억하고 있나 보다.

말만 들어도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플마고 때와 달리 백호군이 올무를 구출해서 정말 다행이다.

천사가 무사히 살아 있음에 안도하고 감사하고 있는 사이, 황지호가 물었다.

“지맥 복구 작업은 3월부터 시작되었다. 그사이에 산령이 깃들었을 가능성은 없나?”

“몇 달 사이에 상위 존재가 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품은 산령이 탄생하긴 어려워요. 그에 걸맞은 전설적인 위업이 천익산에서 이루어졌다면 모를까요.”

저번에 ‘이무기의 귀천’ 때도 그렇고, 지맥과 지력에 관한 지식은 황지호보다 은호가 한 수 위다.

은호의 설명을 들은 황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천익산에 누군가가 위업을 달성할 만한 사건은 없었지. 그 이후로 철저히 경계해서 잘 안다. 천익산에 장난질을 하러 온 학생들이 몇 있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떠오르는 이들이 몇 있었다.

천익산에 담배를 피우러 들어간 방윤섭.

우주의 기운을 쫓는 3학년 0반 우기환 일당.

확실히 저놈들만 두고 보면 전설적인 위업과는 거리가 멀었다.

“천익산의 지맥이 살아나긴 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아요. 황폐한 천익산에 산령이 깃든다는 건 이상한 일이죠.”

은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당신이 천익산에서 자연 발생한 존재일 가능성은 적어요. 저는 당신이 아주 오래전에 천익산에서 숨을 거둔 누군가일 거라고 생각해요.”

“보통 죽게 되면 윤회의 굴레를 넘거나 소멸하지 않나? 이 땅에 남아서 산령이 될 수도 있는 건가?”

“네, 토연 님께 들은 적이 있어요. 아주 드물지만 강력한 혼은 윤회의 굴레가 정한 규칙을 벗어난다고 하더군요.”

옥토연의 이름을 입에 올린 순간. 은호는 그리운 얼굴을 했다.

예전에 옥토연이 은호가 돌아와 줬으면 좋겠네 어쩌네 했는데 많이 친했나 보다.

그에 반해 황지호는 짜증을 숨기지 못하면서도 그 말에 납득했다.

옥토연은 싫지만 윤회의 굴레에 관한 지식은 신용하는가 보다.

‘그런데 저 말대로라면 산령은 강력한 혼을 지닌 건가?’

호족들 사이에서 저렇게 개기려면 보통 혼이 아니긴 할 것 같은데, 산령의 저 꼴을 보니 영 믿음직스럽지 못했다.

“외적의 침입을 비롯해 여러 전란을 겪은 천익산에서 죽은 존재는 수없이 많다. 우리의 동족, 적, 무관계한 존재…… 범위가 너무 넓군.”

은호의 말을 듣던 황지호가 머리가 아프다는 얼굴을 했다.

은호는 산령을 곧게 보며 말했다.

“당신은 자연 발생한 산령이 아니에요. 천익산에서 생을 다했으나, 혼이 윤회의 굴레를 건너가는 대신 이 땅에 머물다가 영기를 받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은호는 다시 한번 물었다.

“당신은 누구시죠?”

모두가 숨을 죽인 가운데, 산령이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기억 안 나.”

산령은 목소리를 내는 게 익숙하지 않은 듯 가늘고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산령은 몇 번 콜록거리다 모과차를 마시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천익산에 있었어……. 윤회나 숨을 거두는 순간 같은 건 몰라.”

산령은 천익산에서 눈을 뜬 이후 겪은 일들을 짧게 설명했다.

산령이 자아를 갖추기까지 조금 시간이 걸렸던 모양이다.

설명을 마친 산령이 갑자기 내 쪽을 봤다.

“그러다가 내가 가진 힘을 자각했어. 하늘의 무언가와 교신하는 힘이었는데…… 하늘이 말했어.”

그리고 상상도 하지 못한 말을 던졌다.

“쟤를 도우면, 쟤가 나를 도와줄 거라고 했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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