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 숨겨야 하는 것 (7)
여태까지 산령이 했던 행동들이 떠올랐다.
산령과 처음 만난 곳은 천익산.
성국언의 의뢰를 받아 ‘달이 없는 밤, 천익산의 모든 등산로는 귀문(鬼門)으로 이어진다.’라는 내용의 은광고 괴담을 조사하던 날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때 그 귀문 괴담도 지맥과 이어졌지.’
‘달이 없는 밤’이라는 조건은 충족시키지 못했지만, 귀문(鬼門)이 보이는 렌즈’로 귀문의 위치를 파악했다.
아이템을 통해 확인한 귀문의 위치는 돈족이 끊으려 했던 천익산 지맥의 주요 포인트와 일치했다.
그날, 지맥 외에도 묘하게 눈에 띄던 장소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 장소, 천단수(天壇樹) 앞에서 산령과 마주쳤다.
산령이 권하는 대로 천단수의 수피에 손을 올렸을 때,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 스킬의 레벨이 한 단계 오르고 운명력이 발동되었다.
‘운명력이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을 사용하도록 유도했지.’
마음에 걸리는 건 그뿐만이 아니다.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을 사용하고 은휘관 지하에 있는 은호를 만나러 갔을 때, 산령이 있지 않았던가.
산령은 은호의 몸 위에 천단수 가지를 올려 두고 튀었다.
‘거기에 하늘과 교신하는 힘이라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하늘이라는 게 초상(超象)우주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초상우주 스킬의 희귀도는 측정 불가 수준인 EX급이 아닌 UR급.
이 세계에서 누군가가 갖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보를 얻기 위해 플마고 속 상황과 대조하여 생각해 봤는데, 금방 생각을 멈췄다.
‘……플마고에서 산령이 나올 리가 없지.’
산령이 아무리 강력한 혼을 가졌더라도 플마고에선 천익산으로부터 영기를 받지 못해 힘을 쓰지 못했을 거다.
천익산의 지맥이 끊기고, 신수를 잃어 수목은 말라 죽고 땅이 썩어가지 않았던가.
“네가 말하는 ‘쟤’는 조의신인가?”
산령이 말하는 내내 뚫어져라 내 쪽을 보고 있었으나 황지호가 확인차 물었다.
산령은 서운함과 억울함이 절절히 담긴 얼굴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응, 난 열심히 쟤 도왔는데, 쟤는 나 안 도와줘.”
그건 또 뭔 소리인가.
어린애가 투정을 부리는 듯한 소리였다.
산령이 호랑이들에게 혼나던 중에 몇 번 도와달라고 신호를 보낸 적이 있지만, 대부분 자업자득 아니었던가.
그 자리에서 말려 봤자 내가 없는 자리에서 또 혼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저걸 대놓고 무시하면 대화하기 어렵겠지.’
적당한 말로 달래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할 때, 백호군이 입을 열었다.
“조의신에게 그런 걸 요구하지 마라.”
음성에 이능파가 담긴 것도 아닌데, 그 한마디에 산령 주변의 온도가 내려간 것 같았다.
온기 없는 음성에 산령이 얼어붙은 것처럼 몸을 굳혔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이렇게나 배려심이 깊다니!
그간 백호군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도 산령 수색엔 전혀 협력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저런 말을 들으니 미안한 기분이 들 정도였다.
“백호의 말대로다. 나는 네가 조의신을 도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만, 설령 그렇다고 해도 대가를 요구하는 태도는 좋지 않군.”
“당신은 호족의 영산인 천익산의 산령입니다. 그 점을 잊지 마세요.”
뒤에 이어 황지호와 은호도 한 마디씩 거들었다.
다들 한참 어린아이를 타이르는 듯한 말투였다.
산령의 근본이 어떤 존재인지는 아직 모른다.
하지만 천익산의 지맥이 살아난 시점부터 영기를 받았다면 저 산령은 자아를 갖춘 지 얼마 안 된 게 분명했다.
‘그렇다 치면 산령이 이중에서는 정신연령이 가장 낮겠지.’
산령은 호랑이들의 말에 건성건성 고개를 끄덕였는데, 아마 한 귀로 듣고 다른 한 귀로 흘리는 것 같았다.
호랑이들은 산령이 반성하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대화 주제를 바꿨다.
더 이상 타일러도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럼 그 하늘에 관해 듣죠. 어떤 방식으로 그 하늘의 무언가와 교신하죠?”
산령은 잔소리를 듣기 싫었는지 주제를 바꾸자 냉큼 대답했다.
산령은 자신이 초상우주와 어떻게 교신하는지 설명했다.
어설프고 조악한 설명이었지만, 척 들어도 내가 사용하는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 스킬과 비슷한 것 같았다.
“아마 쟤도 나랑 같은 힘 쓸걸? 쓰는 걸 봤어.”
그 말에 다시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산령 앞에서 교신 스킬을 쓴 적이 있으니 그 말을 할 줄 알았다.
발뺌해도 소용없을 것 같아 자백하기로 했다.
산령이 말하지 않아도 어차피 황지호가 눈치챘을 거다.
“같은 스킬인 것 같아.”
내 대답에 호랑이들은 이미 짐작한 듯 동요하지 않았지만, 천동하는 놀란 얼굴을 했다.
후배에게 천익산의 산령과 같은 힘이 있다면 놀랄 수밖에 없을 거다.
은호는 제대로 설명을 못 하는 산령 대신 내게 질문했다.
“그 힘이라는 건 스킬이었군요. 산령은 천단수에 손을 올린 채로 사용한다고 하는데, 천단수가 없으면 스킬 사용이 불가능한가요?”
아, 그건 아닌데.
천단수가 교신을 원활하게 하고, 시간을 늘려 주지만 없어도 쓸 수는 있다.
은광고에 입학하기 전에 달동네에서도 교신 스킬을 사용한 적이 있으니 확실하다.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산령이 먼저 답해 버렸다.
“아니, 없어도 돼. 하지만 있으면 몸이 덜 아프니까 있어야 돼.”
“……몸이 덜 아파?”
산령이 한 쓸데없고 앞뒤 없는 소리에 황지호가 반응했다.
천단수의 유무 여부에 따른 스킬의 발동 차이보다 몸이 아프고 말고가 신경 쓰이나 보다.
“산령은 실체가 불확실하여 이 세계에 영향을 덜 주는 만큼, 영향도 덜 받는다. 산령이 아파할 정도라고?”
길게 사용하면 몸에 부담이 가긴 하는데, 툭하면 과장스럽게 행동하는 산령이 하는 말이니 의심하는 게 좋지 않나?
산령은 왜 저런 소리를 해서 호랑이들의 걱정을 부추긴 건지 모르겠다.
은호가 질문을 한 대상도 나였고, 질문 내용도 스킬을 사용하면 몸이 아픈가 어떤가가 아니라 천단수에 관해 물었을 뿐인데.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놓은 은호가 황지호에게 물었다.
“의신이 형이 그 스킬을 자주 사용했나요?”
왜 내가 아니라 황지호에게 묻는 걸까.
나한테 물으면 제대로 된 대답을 안 할 거라고 생각했나?
머릿속으로 황지호 앞에서 교신 스킬을 사용했던 횟수를 헤아리는 사이 황지호가 대답했다.
“몇 번 썼지. 내가 안 본 곳에서 또 썼을지도 모른다.”
“의신이 형 얼굴을 보니 쓴 것 같네요.”
“조의신…….”
산령에게 한 것처럼 잔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호랑이들은 조용했다.
침묵이 따가웠다.
찻물이 싸늘하게 식을 때쯤 은호가 운을 뗐다.
“……과거에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죠. 앞으로 주의해야겠네요.”
“그렇지. 나도 주의하겠다.”
스킬을 사용하는 주체는 나와 산령인데 호랑이들이 뭘 어떻게 주의한다는지 모르겠다.
나야말로 주의해야 할 것 같다.
“그럼 다른 질문을 하죠.”
은호가 비어 있거나 식은 찻잔 안에 새 찻물을 부으며 말했다.
온기와 차 향기가 퍼지니 좀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교신을 하는 상대, 산령이 칭한 ‘하늘’은 무엇이죠?”
은호의 질문에 산령은 ‘하늘’이라고 자신만만하게 먼저 답했지만,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다들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이 중에서 은호는 그 존재를 확실하게 인지하고, 또 느꼈을 거다.
“내가 사용하는 스킬의 이름은 ‘초상(超象)우주와의 교신’이야.”
“……초상우주라면, 제가 눈을 뜨기 전에 접촉한 상대네요.”
“처음 듣는 명칭이군.”
그 이후로 우리는 초상우주에 관해 고찰했다.
은호가 경험한 것, 내가 아는 것, 산령이 느낀 것을 종합해 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결국 초상우주에 관해선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건 초상우주뿐만이 아니었다.
‘산령은 대체 뭐지?’
산령은 천익산의 지력에 이끌려 자연스럽게 발생한 존재가 아니다.
강력한 혼이 천익산 주변에 머물다가 영기를 받아 산령이 된 거다.
황지호와 은호가 후보를 여럿 제시해 봤지만 딱 와닿는 게 없었다.
‘그래도 단서는 있어.’
초상우주는 답을 알고 있을 것 같았다.
신인과 청호의 정체를 확인했던 것처럼, 단서를 모아 질문을 하면 답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 산령의 말을 생각해 보면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내가 교신을 사용할 때, 보통 초상우주는 두 가지의 유형으로 대답해.”
“세 가지?”
“긍정, 부정의 여부, 방향.”
푸르게 물든 시야와 정신.
그리고 빛이 가리키는 방향.
여태까지 초상우주는 저 유형으로 답했다.
하지만 산령은 다른 것 같았다.
“산령은 ‘쟤를 도우면, 쟤가 나를 도와줄 거다’라고 했어. 아마 나보다 더 구체적인 답변을 듣는 거겠지.”
“……응, 아마도?”
산령은 모호하게 말끝을 흐렸다.
황지호가 재차 물었다.
“아마도라는 건 무슨 뜻이냐.”
“예전에는 그냥 말해 줬는데, 요즘은 그냥 앞이 파랗고 빨갛게 빛나. ‘맞아’, ‘아니야’라고만 답하는 거 같아.”
그러면 나랑 비슷하잖아.
산령의 교신 레벨이 떨어지기라도 한 건가?
황지호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실컷 질문을 던지게 하면 되겠군. 예, 아니오로 답변 가능한 질문을 천 개 정도 준비해서…….”
“아, 안 돼, 싫어!”
황지호의 말에 산령이 펄쩍 뛰었다.
다소 과격하긴 했지만, 황지호의 제안대로 하면 스무고개 하듯 질문을 던져 산령의 정체를 밝힐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이제 질문 한두 개만 해도 몸이 아프고 힘이 안 써져.”
산령이 벌벌 떨면서 말했다.
산령은 자신이 소멸될 수도 있다며 겁에 질렸다.
약간 엄살이 섞이긴 했지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산령이 맨눈으로 보일 만큼 실체화하고, 의사소통이 가능해진 것과 관계있지 않을까.’
산령이 실체를 갖추는 바람에 우리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됐지만, 역으로 산령은 초상우주와 의사소통에 제한이 걸린 듯했다.
그 이후로 산령과 초상우주를 두고 말을 나눴지만, 결국 해결책은 찾지 못했다.
해결해야 할 숙제가 하나 더 늘어난 셈이다.
이야기를 마쳤을 때는 점심시간을 훌쩍 지나 있었다.
“점심이나 먹을까.”
그 말을 들으니 뒤늦게 공복감이 느껴졌다.
황지호가 자리에 일어나며 천동하에게 말했다.
“함께 점심을 들지. 이 몸이 직접 요리하겠다.”
“어…… 나도 도울까?”
“하하하! 그러지 않아도 된다. 기다리도록.”
천동하에게도 요리를 해 줄 생각인가 보다.
자신의 요리는 함부로 맛볼 수 없다며 3학년 0반 우기환 일당을 공격하던 모습과 비교되었다.
그런데 본채에 있는 은호의 후예들은 제대로 밥을 먹을까?
오토매틱 메이드에게 조리를 부탁하면 되긴 하겠지만.
“안심해라. 황유호가 점심을 할 거다.”
내 걱정을 읽은 것처럼 황지호가 슬쩍 말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들으니 오히려 안심이 되지 않았다.
황유호는 황지호의 초등학생 버전 아닌가.
어린 모습으로 요리를 하긴 힘들 거다.
막내 은재호도 요리를 할 때 받침대를 밟고 올라가던데, 내가 본채로 가서 돕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생각에 미치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니, 은재호랑 노친네를 비교하다니!’
황유호가 아무리 어린 모습을 해도 내용물은 황지호다.
나는 다른 곳에 신경을 돌리기로 했다.
딩동.
마침 디바이스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꾀돌이] 시간이 지나면 선물의 가치가 떨어질 것 같아서 오늘 저녁에 뵙고 싶어요.
[꾀돌이] 이따 봐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