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47화 (446/925)

65. 숨겨야 하는 것 (11)

웅족 최대 전력으로 꼽히는 진웅팔선(眞熊八仙).

이들은 천신과 신인을 소멸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인간의 세계에 자주 드나드는 신인이라면 모를까, 드물게 하늘이 열릴 때만 지상으로 내려오는 천신을 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죄를 지은 웅족이 신계에 초대받을 리도 없으니 그들은 지상에서 천신을 소멸시킬 방법을 생각해 냈다.

웅족이 고안한 방법은 제물을 대가로 천신의 존재 가능성을 지우는 것.

그러나 웅족의 힘은 건국신화에 이름을 남긴 천신과 신인을 지우는 데에 미치지 못했다.

그 결과 진웅팔선 중 둘이 실성하고 셋이 긴 잠에 빠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이 모은 힘과 지혜를 바탕으로 만든 ‘실패작’이 ‘부(富)와 생명의 무게’였다는 게 플마고에 남은 진웅팔선의 비화였다.

‘진웅팔선이 천신과 신인의 제거에 실패한 건 사실이야. 천신의 축복이 남아 있고, 신인은 인간이 되었지만 소멸된 건 아니니까. 하지만 지금은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존재를 지우는 데는 성공했다면 어떨까?’

성공 여부는 아무도 증명할 수 없지만, 그렇지 않다고 할 수도 없었다.

어쩌면 진웅팔선 중 둘이 실성하고, 셋이 긴 잠에 빠진 것도 그 영향일지도 모른다.

부(富)와 생명의 무게가 대상을 지우는 대가를 천칭에 달아 받아 간다는 속성을 생각하면, 진웅팔선의 누군가도 존재가 지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진웅팔선이 아니라 사실 곤륜산의 곤륜십이선인처럼 원래는 진웅십이선(眞熊十二仙)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시델렌티움은 호수에 돌을 던진 후, 파문이 퍼져 나가는 걸 구경하는 것처럼 나를 관찰하다 입을 열었다.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이야기지만. 일단 연구는 해 볼 생각이다.

부(富)와 생명의 무게는 그 자체만으로 강력한 아이템이고 시델렌티움이 말한 가설과도 어느 정도 연관이 있긴 하다.

발상은 그럴듯한데, 시델렌티움은 어떤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할 생각일까.

―부(富)와 생명의 무게는 ‘지우는 자’의 힘을 빌려 천칭을 움직이고 인간의 가능성을 지우지. 하지만 다른 힘으로 천칭을 움직일 수 있다면 인간 외의 존재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만우절에 부(富)와 생명의 무게로 부정 입학자들의 이능을 지울 때.

순백의 곰 가죽을 뒤집어쓴 상위 존재는 사용한 아이템 카드에 비해 이들의 가능성이 너무 하찮다며 어느 아이템을 건넸다.

그 아이템은 ‘지우는 자의 거스름돈’.

이 아이템으로 선상 파티에서 이능독을 지우기도 했다.

그걸 ‘돈’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돈이라는 단어를 단순히 물건의 가치를 칭하는 단위라고 생각하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쨌든, 그때 내게 아이템을 건넨 상위 존재가 시델렌티움이 말한 ‘지우는 자’와 일치하는 건 확실했다.

‘천칭에 서 있던 그 ‘지우는 자’가 아니라 다른 힘이 천칭을 움직일 수도 있는 거구나.’

시델렌티움은 부(富)와 생명의 무게를 통해 이 수수께끼를 풀어 나갈 생각인 듯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에도 이능 아이템 연구가가 있으니, 플레이어의 궤적을 사용해 그 캐릭터의 광림과 스킬을 쓰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거다.

하지만 광림을 사용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가 직접 연구에 참가하는 건 효율이 너무 떨어져. 매일 광림 사용 가능 시간을 전부 투자해야 할 거야.’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존재를 찾기 위해 내 패를 모두 써 버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광림이 아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생각하자. 정말 단서가 이 아이템 하나뿐일까?’

천신과 신인.

진웅팔선.

사라진 무언가.

생각할 만한 소재는 아주 적었지만, 결론은 금방 나왔다.

“단서가 더 있을 수도 있겠네.”

―부(富)와 생명의 무게 말고도? 말해 봐라.

시델렌티움이 말해 보라며 입을 벙긋거렸다.

“진웅팔선이 없애고자 한 무언가가 지워졌다고 가정할게. 편의상 X라고 칭할까. X가 제거되었다면 예상되는 이유는 두 가지야.”

―어떤 이유들이지?

“첫째, 진웅팔선이 위협을 느끼고 먼저 제거하고자 했다. 둘째, 그 존재가 천신과 신인을 지키고 대신 사라졌다.”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이유가 가능성이 커 보이는군.

“동감이야. 첫 번째 이유가 원인이라면, 최우선 배제 대상인 X를 제거했으니 다음 타깃인 천신과 신인의 제거도 연이어 성공했을 테니까. X를 제거하고 힘이 다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아마 X는 천신과 신인보다 격이 아래일 것이다.

하지만 진웅팔선이 최우선 배제 대상으로 삼았거나 진웅팔선의 계략을 저지하고 천신과 신인을 지켰다면 보통 존재가 아닐 게 분명했다.

즉, 이유가 무엇이든 X가 보통 존재가 아니란 건 변하지 않는다.

X가 그냥 쉽게 사라졌을까?

모두의 인식 상에서 지워졌을 뿐, 생존했거나 단서를 남기지 않았을까?

내 생각을 정리해 전달하자 시델렌티움이 느리게 입술을 움직였다.

―인지하지 못할 뿐, 생존했거나 단서가 남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래.”

―오랜 기간 마계에 머물던 나조차 인식하지 못할 만큼 철저하게 사라졌거늘. 네 가설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X는 사실상 완전히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한반도가 아닌 마계에 머물던 시델렌티움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 미지의 X.

그러나 X에 관해 알아챌 만한 존재가 둘 있었다.

하나는 초상우주다.

‘지금은 X의 존재 여부 정도밖에 확인하지 못하겠지. 황지호가 산령에게 시키려 했던 것처럼 스무고개를 천 번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다른 하나는 나였다.

나는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 진웅팔선이 저지른 X의 소멸극에 영향을 덜 받을 거다.

“무언가 더 알게 되면 말해 줘.”

―그 얼굴을 보니 믿는 구석이 있나 보군. 알았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허무한 구석이 있는 대화였다.

애초에 무언가의 소멸 따위 일어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으니까.

진웅팔선의 목표는 정말로 천신과 신인뿐이었고, 그들 나름 최선을 다했으나 그냥 실패한 것에 불과하다는 결론이 날 수도 있다.

나와 시델렌티움은 무의미한 사고와 행위에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알게 된 이상 모르는 척하고 있을 수는 없어.’

생각을 해 봤자 의미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도 없다.

그래도 천신과 신인 그리고 호족들의 편에 섰던 누군가에 관한 가능성을 엿본 이상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대화를 마무리할 때, 시델렌티움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남겼다.

―무슨 일이 있으면 나의 계약자에게 말해라. 까마귀 가면으로 좋은 걸 보여 준 대가다. 내키면 길잡이 건이 아니더라도 돕도록 하지.

‘내키면’이라는 조건이 걸려 있긴 하지만, 마왕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기숙사로 돌아가기 전, 류장이 나를 불러 세우고 종이봉투를 하나 내밀었다.

MITRON의 로고가 그려진 종이봉투 안에는 그가 준비한 계절 한정 케이크, 빵, 쿠키가 가득했다.

어제 연락할 때 선물을 준다고 하더니 잊지 않고 준비했나 보다.

어째 어제 디바이스 메시지를 통해 내가 제시한 메뉴보다 양이 훨씬 많은 것 같긴 하지만.

“선물입니다. 친구분들과 같이 드세요.”

“감사합니다.”

“바쁜 조의신 학생을 불러냈으니 이 정도의 선물은 드려야죠.”

‘바쁜’이라는 표현이 의미심장했다.

시델렌티움이 까마귀 가면을 통해 본 것들을 대리인인 류장에게도 전한 것 같았다.

인사를 한 번 더 하고 나가려 할 때였다.

“조의신 학생의 빵셔틀 말입니다.”

류장이 갑자기 방윤섭에 관해 말을 꺼냈다.

빵셔틀 사건이 워낙 유명한 데다 미션 수행을 위해 이곳을 자주 드나들었으니 류장이 방윤섭을 알아도 이상하지 않았다.

왜 지금 방윤섭에 관해 언급하는 거지?

방윤섭을 언급한 것도 뜬금없었는데, 그다음 말은 더 뜬금없었다.

“최근 쿠키를 사 가지 않더군요.”

“……네?”

최근 방윤섭에게 쿠키 심부름을 시킨 적은 없는데.

아니, 애초에 왜 쿠키 얘기가 나오는 거지?

의문이 더 깊어졌다.

“그전까지는 쿠키를 자주 사 갔어요. 자주 어울리는 여학생이 쿠키를 좋아했거든요. 둘이 같이 가게에 온 적도 있어요.”

……방윤섭과 자주 어울리는 여학생이 있다고?

주수혁과 안다인은 아직 손 한 번 잡지 못한 것 같던데, 방윤섭은 쿠키를 사다 바치며 데이트를 한 건가!

류장이 한 말만으로 판단했을 때, 단순히 방윤섭이 쿠키를 자주 먹게 되었고 우연히 어느 여학생과 같은 가게에 왔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까마귀 마왕의 대리인이 방윤섭의 행위와 여학생 사이의 연결 고리를 하나 더 제시했다.

“쿠키를 사는 걸 그만둔 이후로는 조의신 학생의 심부름 빈도가 크게 늘었죠. 여학생과 가게에 오지도 않고, 쿠키를 언급하면 화를 내더군요.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나온 걸 보니 그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웠다.

방윤섭은 실연의 고통을 흡연으로 잊으려 한 건가.

이미 끝난 남의 연애사에 개입하는 건 참 멋없는 짓이었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마음에 틈이 생기면 노려지기 쉽죠.”

류장이 엷게 미소를 지었다.

방관과 침묵의 마왕을 모시는 자답게 말수가 적었던 그가 길게 말했다.

“저는 시델렌티움 님을 제 의지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보통 마족과 인간의 관계는 일방적이랍니다,”

그 말에 방윤섭의 최후가 떠올랐다.

방윤섭은 사족의 가호 덕에 잠시 정신을 차리고 애원에 가까운 유언을 남기고 주수혁의 손에 쓰러지고 만다.

‘인비디우스의 권속이 방윤섭을 매개로 빙의했었지.’

인비디우스는 방윤섭의 내면에 뿌리 깊게 박힌 주수혁을 향한 질투와 열등감을 파고들었다.

단순한 실연만으로는 인비디우스의 사제의 표적이 되지 않는다.

‘다른 마족이 방윤섭을 노리나? 아니면 그 실연에 다른 무언가가 엮여 있거나…….’

기숙사로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그저 마족의 대리인답게 내 정신을 어지럽히려고 방윤섭을 언급했을 가능성이 있지만, 마족과 방윤섭에 얽힌 플마고 사건을 아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미지의 존재 X와 방윤섭의 생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딩동.

디바이스 메시지 알람이 울렸다.

머리를 식힐 겸 바로 메시지를 확인했다.

[염준열] 스승님, 생일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요. 언제 뵐 수 있을까요?

염준열은 스승인 나에게만 메시지를 보낸 게 아니었다.

후배 조의신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염준열] 의신아, 생일 선물을 주고 싶은데,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제자로서, 선배로서 생일 선물을 줄 생각인가?

설마 선물을 두 개 준비한 건가?

하나만으로도 과분한데 두 개나 받을 수는 없었다.

최대한 공손한 표현으로 둘러서 표현했는데, 내가 선물을 거절할 의사를 비추자 염준열이 눈에 띄게 풀 죽은 메시지를 보냈다.

[염준열] 늦은 주제에 선물을 보내는 것도 염치없는 짓이겠죠……?

[염준열] 죄송합니다…….

아니, 내 제자에게 이런 소리를 하게 하다니!

역시 난 스승으로서도 한참 멀었다.

결국 염준열의 선물을 기대하겠다는 말로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웃으며 손을 드는 홍룡이 그려진 스탬프를 본 후에야 안심했다.

‘나도 다음 염준열 생일에는 선물을 두 개 준비해야겠다.’

염준열의 생일은 2월 4일.

아직 시간이 꽤 남아 있으니 천천히 생각해 봐도 될 거다.

남은 시간은 넉넉해도 시기에는 문제가 있었지만.

‘용왕신이 무녀 후보생을 용궁으로 부르는 날은 내년 음력 정월 초하룻날…… 2월 12일이야. 이걸 일주일 당겼으니 2월 5일이고.’

특별한 문제가 안 생긴다면 나는 그 전날인 2월 4일에는 용궁에 당도해 있을 거다.

플마고 속의 염준열은 그때 해외 유학 중이라서 부재중이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가능하면 염준열은 그때 용궁에 없었으면 하는데.’

여차하면 생일은 미리 축하해 주고 염준열에겐 그때 용궁에 오지 말라고 당부해야겠다.

다사다난한 주말이 끝나고 맞이한 월요일.

나는 지익회실을 찾아갔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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