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또 다른 후보 (9)
백호군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답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예상했는데, 이렇게 길게 고민할 줄은 몰랐다.
‘저번에 악몽에 관해 질문했을 때는 답해 주지 않았지.’
12지 동맹 회담 당시, 양족의 수장이 이렇게 말했다.
未[양Zzz] “여기에 악몽을 끌고 온 자가 있어. 회담을 잇는 마력 회로 너머로 악몽의 기운이 느껴진다.”
未[양Zzz] “우리가 서로에게 지켜야 할 것은 ‘불가침’의 약속뿐. 하지만 100년을 함께한 12지 동맹의 일각으로서 경고하지. 지금 이 12지 동맹에 참석한 자, 혹은 마법진 주변에 있는 자는 ‘악몽’ 그 자체다. 악몽에 삼켜지지 않게 경계하도록.”
12지 수장들의 말을 참고했을 때, 그 ‘악몽’이란 악몽의 신 인섬니움을 지칭하는 듯했다.
인간계에 가장 개입 권한이 큰 상위 존재로서, 약 20년 전부터 잠잠해졌다던 ‘악몽’.
‘플마고에서도 언급되지 않았고, 이 세계에 온 이후에도 그 악몽의 정보는 좀처럼 얻기 힘들었지.’
회담이 끝나고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나는 백호군에게 12지 동맹의 수장들이 경계하던 악몽에 관해 물었다.
―악몽이 뭐야?
이 질문에 백호군은 이해할 수 없는 말로 답변했다.
―너는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다, 조의신.
―신경 쓰지 말고 하고 싶은 것, 해야 할 것을 해라.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저렇게 말하니 추궁할 수 없었다.
저 말을 들으니 악몽에 관해 걱정할 필요도, 신경 쓸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나도 잊고 있었다.
‘그 악몽에 관해 말하는 것보다 지금 질문에 답하는 게 더 어려운 걸까?’
그때 동문서답 같은 답변은 곧바로 나왔는데.
백호군은 긴 침묵 끝에 입을 열었다.
“대답하기 곤란하다.”
“……왜?”
왜 곤란한 건지는 바로 답해 줬다.
“먼저 한 약속을 우선시하기로 했다.”
답변을 들었는데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백호군은 대체 누구와 무슨 약속을 했기에 그날 그 자리에 나타났고, 지금은 입을 다물어야 하는 건가.
백호군에 관해 내가 아는 것을 전부 되짚어 봤지만, 짐작도 가지 않았다.
백호군이 누구와 무슨 약속을 한 건지 몰라도 플마고에 등장하지 않거나 행적이 묘연한 이들과 한 게 분명했다.
직접 추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판단해 다시 질문하기로 했다.
“누구와 무슨 약속을 했는데?”
“도움을 받는 대신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
그 약속과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에 백호군이 등장한 게 대체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잠시 말을 멈춘 백호군의 눈꼬리가 조금 내려갔다.
“웅족이 습격한 날, 내가 쓸데없는 참견을 한 것 같더군. 반성하고 있다.”
백호군은 여전히 말수가 적었지만, 이 대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몇 개 있었다.
‘그날 웅족이 은광고를 습격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구나.’
백호군은 그날 웅족이 은광고를 습격하리라는 것뿐만 아니라, 정확히 13조를 노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백호군은 모든 실기 시험장을 뒤져 봐야 했을 것이니, 다른 실기 시험장에서 백호군이 나타났다는 목격담이 나왔을 것이다.
문제는 백호군이 등장한 타이밍이었다.
‘알고 있었고, 막을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조금 늦게 왔어. 늦은 이유는 혹시…… 계이담과 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
계이담은 시험이 시작되기 직전, 즉, 내가 이 세계로 온 직후에 기억을 되찾았다고 한다.
어쩌면 백호군도 비슷한 타이밍에 조련계 웅족의 습격에 관해 떠올린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가정을 할 수 있다.
습격에 관해 떠올린 순간, ‘신역의 수인(囚人)’ 디버프가 걸려 있는 백호군은 은광구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떠올리자마자 바로 13조가 실기 시험을 치르는 체육관으로 왔다.
거리가 있어 계이담보다는 이르게 도착했으나 내가 리노세론을 처치한 이후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맞지만, 의문이 많이 남아.’
백호군은 어떻게 그 정보를 얻었으며 그 약속이라는 건 대체 무엇인가.
도움을 받는 대신 방해하지 않기로 했다고?
대체 누가 백호군에게 도움을 주고, 백호군은 누구를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백호군은 그 약속 때문에 답변을 제대로 못 하는 것 같으니, 나름 변화구를 던져 물어보기로 했다.
“혹시 그 약속이 초상우주와 관련이 있어?”
“…….”
백호군은 입을 다물었다.
서늘한 표정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지만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처럼 힌트가 될 만한 말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기다려 봤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내 본의에서 크게 벗어난 일이었지만, 힘들게 참았다.
“미안하다.”
그러나 백호군의 입에서 나온 건 힌트가 아닌 사과였다.
저 말을 들으니 죄책감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곤란해하는데 나는 뭘 자꾸 묻는 건가!
대체 미안할 일이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괜찮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괜찮아.”
괜찮다고 답한 순간 데자뷔가 느껴졌다.
저택에서 자고 간 날, 적호가 저강렵에게 당해 부상을 입고 오기 직전에 비슷한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
밤중에 찾아온 백호군이 사과를 해 괜찮다고 답했는데…….
그때와는 상황이 다르긴 했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사과하는 백호군에게 뭐라 할 수도 없어 의문을 묻어 두기로 했다.
* * *
다음 날 아침.
밤늦게 티타임을 가지긴 했지만, 어제 스트레스를 풀 일이 있어서 그런지 푹 잘 자고 일어났다.
나의 천사 올무와 같은 침대에서 자고, 또 아침에 천사와 함께 일어나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갑자기 와서 이렇게 잘 먹고 잘 자도 되나?’
늦은 시각 예고 없이 호랑이 저택에 쳐들어와 백호군에게 답하기 곤란한 질문을 던지고, 차를 얻어먹은 데에 이어 숙식까지 해결하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도 뻔뻔하기에 그지없었지만 다행히 호랑이들이 관대하게 넘어가 줬다.
황지호가 차린 아침밥을 먹고 있을 때, 은호가 물었다.
“계이담이라는 2학년 학생과 대련하셨다고 들었어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은호에게 말하기 더 어려웠다.
은호는 군대와 갈굼 문화, 플마고를 향한 악평과 악플들에 관해 잘 알고 있을 테니까.
만약 계이담에 관해 말하면 몹시 분노할 것 같았다.
딱히 내가 계이담이 한 짓거리들의 피해자라서가 아니었다.
계이담은 제3자가 봐도 욕 처먹고 갈궈져도 당연한 짓을 많이 했다.
내가 얼버무리니 은호가 혼잣말하듯 한마디 했다.
“계씨가 흔한 성씨는 아닌데…….”
……혹시 이전 세계의 ‘계’새끼에 관해 알고 있나?
아니, 이전 세계에서 천성헌에게 ‘계’새끼에 관해선 한 마디도 안 했으니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플마고 관련 기사가 나올 때마다 등장하는 ‘kye777ing’에서 계씨를 연상했다면 모를까.
“의신이 형,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내가 계이담에 관해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은호가 부드럽게 말했다.
은호의 옆에 앉은 백호군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뜻인 것 같았다.
‘그 약속 때문에 말은 못 하더라도 도와줄 수는 있다는 뜻인가?’
의문이 깊어졌지만, 염치없이 호랑이 저택에 쳐들어온 주제에 백호군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었다.
백호군에게 직접 묻는 건 포기했다.
그러나 백호군이 했다는 그 약속에 관해선 기억해 두기로 했다.
‘이 세계에 플마고와 다른 변수가 하나 더 생긴 셈인데…… 아니, 그걸 변수라고 해야 하나.’
백호군은 뭔가 알고 있지만, 그 약속인지 뭔지 때문에 직접 나설 수 없는 상황인 게 분명했다.
웅족이 습격했을 때 백호군이 개입해서 딱히 상황이 크게 달라진 것도 아닌데 쓸데없는 참견을 했다며 반성하고 있지 않은가.
“백호와 이야기는 잘 마쳤나?”
“어.”
“어떤 내용의 대화를 했는지는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군.”
호랑이 저택에서 등교를 하다 보니 등굣길은 황지호와 함께하게 되었다.
물론, 황명호 이사장이 아닌 1학년 0반 돌아이의 모습을 한 황지호가 동행하였다.
황지호는 어젯밤부터 계속 기분이 좋아 보였다.
황지호는 나와 백호군이 어젯밤에 무슨 대화를 했는지 캐 보려고 시도하다 실패했으나 별로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았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 황지호가 한마디 했다.
“딱히 볼일이 없더라도 괜찮다. 저택에 방문하고 싶을 때는 어제처럼 자유롭게 와도 좋다.”
어제는 나름 볼일이 있어서 방문한 건데.
그렇게 받아치려 했지만, 이번엔 황지호의 호의를 감사히 받기로 했다.
교실에 들어가니 반 아이들이 크게 반겨 줬다.
특히 통학하는 반 아이들은 많이 걱정했는지 부상당한 곳은 없나 몇 번이나 물어봤다.
“그만 자리에 앉아라.”
조례하기 위해 등장한 함근형 선생님이 어제 일로 한마디 하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별말씀 없었다.
그냥 다친 곳이 없나 한 번 살펴봤을 뿐이었다.
걱정하는 함근형 선생님과 반 아이들을 보며 반성했다.
‘……앞으로는 주의해야지.’
앞으로도 계이담을 굴릴 때는 반 아이들과 선생님이 모르게 조용히 해야겠다.
‘계’새끼 때문에 착한 1학년 0반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받게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편, 은광고 내에선 나와 계이담의 대련 소식이 널리 퍼졌다.
대련 결과가 무명의 초신성 완승이라는 것도.
‘계이담이 입원 치료를 받느라 결석하는 바람에 소문이 더 커졌네. 그깟 걸로 결석하다니. 입원시킬 생각으로 굴리긴 했지만.’
1학년 0반이 점점 0반다워진다는 말이 돌긴 했지만, 어쨌든 나는 교칙 위반 행위를 하지 않았기에 딱히 지적받는 일은 없었다.
평화로운 하루가 끝나고 방과 후가 되었다.
부 활동을 마치고 정문으로 가니 붉은 사자 엠블럼이 박힌 에어 리무진 앞에서 염준열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신아, 가자.”
에어 리무진 안에 용제건이 있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보이지 않았다.
늘 염준열의 귀갓길에 동행한다고 들었는데, 오늘은 다른 일정이 있는 건가?
오늘 염준열의 경호를 맡은 건 붉은 사자의 멤버 중 하나였다.
에어 리무진이 향하는 곳은 TC 그룹 소유인 에어 호텔, ‘스노우 앤 에어’였다.
“저번에 초대받아서 왔는데 깔끔하게 나오더라.”
저녁을 사 준다고 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스노우 앤 에어 최상층의 레스토랑에 예약을 잡아 놨나 보다.
새삼 염준열이 레드 다이아몬드 수저 출신의 스타 플레이어라는 게 실감이 났다.
“너무 늦어서 미안해. 생일 축하해.”
자리에 앉았을 때, 염준열이 밀랍 인장으로 봉해진 붉은 봉투 두 장을 꺼냈다.
염준열은 먼저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꺼내 봐.”
염준열이 기대에 찬 눈으로 보고 있으니 나중에 열어 보겠다는 말을 하기 힘들었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아이템 카드였다.
‘이건……! 홍룡 응원봉이잖아!’
카드에 새겨진 건 홍룡을 이미지한 듯한 용 장식이 달린 응원봉이었다.
이능파에 반응해 빛을 내니까 이능 아이템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로 카드화가 가능한 아이템일 줄은 몰랐다.
“제건이 형 말론 저번에 네가 우리 집에 놀러 왔을 때 관심 있게 봤다고 하더라. 의신이한테 선물하려고 용족분께 추가 제작을 부탁드렸어.”
용제건이 염준열에게 그런 말을 했나!
용제건이 무슨 의도로 그걸 전했는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만큼은 감사하기로 했다.
나중에 파는 곳을 찾아보니 시판 중인 응원봉은 그날 봤던 것에 비해 퀄리티가 크게 떨어져 소장욕이 안 생겼는데, 이 아이템 카드는 달랐다!
“이건 제자로서 드리는 선물이에요.”
감격에 잠겨 있을 때, 염준열이 카드 한 장을 더 내밀었다.
염준열은 선배로서, 제자로서 각각 선물을 준비한 듯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