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또 다른 후보 (10)
선물을 두 개나 받아도 되나?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좋은 선배이자 착한 제자 염준열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 고민 끝에 받아들였다.
“고마워.”
“저야말로 늘 감사합니다, 스승님!”
별 대단치 않은 감사 인사에도 염준열은 활짝 웃으며 답했다.
다른 사람이 저 얼굴을 보면 선물을 받은 쪽이 염준열이라고 착각할지도 모른다.
‘내 제자가 어떤 선물을 준비했을까.’
용족이 만든 홍룡 응원봉보다 좋은 선물이 있을 수 있나?
긴장된 마음으로 카드를 확인해 봤다.
긴장과 설렘은 곧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이건 까마귀 가면이잖아!’
카드에 그려진 것은 까마귀 가면이었다!
까마귀 가면 안쪽에는 홍룡 모양의 불꽃 표시가 있었는데, 그걸 보니 무려 염준열이 직접 만든 게 분명했다.
염준열은 왜 귀중한 재능을 이따위 것을 만드는 것에 쓴 건가!
장남욱도 그렇고 쓸데없는 것을 만드는 데에 재능과 시간을 낭비하는 청소년들이 늘어난 것 같다.
“저번에 스승님께서 불러 주셨을 때 생각났어요. 제 몫의 까마귀 가면은 많은데 정작 스승님께는 가면 하나 만들어 드리지 못했더라고요.”
……저렇게 죄책감 어린 목소리로 말을 하니 뭐라 할 수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이자 하나뿐인 제자에게 뭐라 할 수 있을 리가 없겠지만.
카드를 손에 들고 떨떠름해하고 있을 때, 염준열이 말했다.
“가면에 특별한 장치를 해 뒀어요. 이능파를 흘리면 표면이 불꽃으로 덮여요.”
까마귀 가면 홍룡 에디션은 특별한 기능이 붙어 있구나.
솔직히 필요 없었지만, 홍룡 염준열이 만든 단 하나의 가면이라고 생각하니 그 가치가 어마어마하게 느껴졌다.
염준열이 말한 기능을 발동하면 까마귀 가면이 아니라 불새 가면이라고 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내 제자가 까마귀 가면이라고 했으니 이 아이템은 까마귀 가면이다.
제자의 마음에 감동해 한동안 까마귀 가면 홍룡 에디션의 설명을 들었다.
설명이 끝날 때쯤 가면의 완성도와 디자인을 두고 적당히 칭찬했다.
그랬더니 염준열이 쑥스러워하며 청천벽력 같은 대답을 했다.
“사실 스승님께 선물할 수 있을 만큼 마음에 드는 가면을 만들 때까지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덕분에 예비 가면이 늘었어요.”
저번에 TC 연구소에 잠입할 때에도 까마귀 가면의 수가 꽤 됐었는데, 거기에서 더 증식한 건가!
곳곳에서 늘어난 까마귀 가면의 수를 생각하니 어질어질해졌다.
까마귀 가면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그 단어’와 엮이는 게 문제다.
‘……‘그 단어’가 까마귀 가면을 쓰고 다닌다고 널리 알려지진 않았어.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말한 후에야 평정심을 되찾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염준열이 조심스럽게 이쪽을 살피는 게 보였다.
“……스승님, 혹시 새론이한테 그 소식을 들으셨나요?”
문새론 말하는 건가?
염준열이 무슨 소식을 가리키는 건지 모르겠지만, 저 질문엔 후배 조의신으로서 답하기로 했다.
문새론과 신문부에 소속한 건 일단 1학년 0반 소속 조의신이니까.
“해외 취재 중이라는 것 외엔 별다른 소식을 듣지 못했어요.”
문새론은 주말 이후 계속 학교를 쉬는 중이다.
해외에서 사건에 휘말린 게 아닌가 걱정하는 부원도 많았는데, 메시지를 날리는 걸 보면 그냥 취재 때문에 그런 듯했다.
내가 후배 조의신으로 답하니, 염준열도 선배의 말투로 돌아가 말했다.
“새론이가 해외에서 우연히 내 스승님을 만났다고 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우셨던 분인데, 곧 귀국하실 예정이래.”
문새론이 해외에서 만났다는 ‘생각지도 못한 분’이 염준열의 스승이었구나.
문새론이 몹시 들떠 보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염준열의 스승들은 모두 거물들이었지. 나는 빼고.’
대외적으로 알려진 염준열의 스승은 둘이다.
하나는 염준열의 친부인 홍염의 제왕 염방열.
다른 하나는 방랑벽이 있다는 용.
염방열은 계속 국내에 체류 중이었으니 문새론이 만난 염준열의 스승은 용 쪽일 거다.
‘방랑벽이 있어서 한 곳에 잘 못 붙어 있는데도 염준열의 스승이 될 정도의 강자였지.’
그 용은 플마고 속에선 염준열이 가끔 언급하는 것 외엔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그 용이 처음 등장하는 건 염준열의 사후, 붉은 사자와 용족이 한국 정부를 상대로 한 협상이 결렬된 이후였다.
연락이 잘 안 된다던 그 용도 제자의 죽음은 바로 알아챈 듯했다.
한반도에 온 그 용은 청룡과 나란히 최전선에 섰다.
‘……그때 카드모스가 등장했었어.’
카드모스는 최전선에 선 청룡과 염준열의 스승에게 곧바로 용아를 사용했다.
카드모스가 부른 용의 이빨은 용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었다.
지력을 끌어올린 청룡은 살아남았으나 염준열의 스승은 용아에 목이 꿰뚫려 전사하고 말았다.
허망한 죽음이었지만, 그의 희생 덕에 카드모스의 존재를 파악해 대처하기 시작했다.
‘등장 횟수도 적고, 실물이 등장하기 무섭게 퇴장해서 어떤 용인지 전혀 모르겠다.’
염준열의 스승에 관해 생각하고 있는 사이, 염준열은 자신의 스승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와 그분께는 나 외에도 많은 제자가 있어. 다들 경험이 많은 분을 추천하셔서…….”
설명을 듣다 보니 뭔가 이상한 게 느껴졌다.
왜 염준열은 변명하듯이 스승 소개를 하는 거지?
‘아, 설마…… 그게 마음에 걸렸나?’
내 제자는 염준열 하나인데, 염준열에게는 나를 포함해 스승이 셋 있다.
사월세음에게 나에 관한 이야기를 전하지 않은 걸 갖고 자책하던 착한 제자가 이번에 다른 사소한 사항을 가지고 죄책감을 가졌나 보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까 고민하다가 그냥 화제를 바꾸기로 했다.
길게 끌어 봐야 좋은 이야기도 안 나올 것 같고, 또 괜히 내가 잘못 짚은 거면 굉장히 불편한 상황이 될 것 같았으니까.
대충 문새론이 어떤 인터뷰 기사를 쓸지 기대된다는 말로 이야기를 얼버무렸다.
내 의도를 알았는지 그냥 넘어가 주기로 한 건지 염준열도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꾸는 데에 응했다.
“이 레스토랑은 진족이나 후예가 많이 이용하나 봐. 동선 정리를 잘해 놔서 이동 중에 아무도 마주치지 않을 수 있으니까.”
염준열의 말대로, 이곳에 온 이후 우리를 자리로 안내하고 주문을 받은 직원과 요리를 내온 사환 외에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이 플로어 곳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 걸 보면 손님 수가 적은 게 아닌데, 동선 관리가 굉장히 잘된 것 같았다.
눈에 띄지 않게 레스토랑을 이용하고 가기 좋으니, 눈에 띄는 걸 원치 않는 진족과 후예가 애용할 법했다.
“용족 분들이랑 자주 오셨나요?”
“딱 한 번 왔어. 외식을 자주 하는 편이 아니라서…….”
과연 폐쇄적인 용족다웠다.
염준열이 대외 활동을 많이 하다 보니 덩달아 용족들도 매체에 조금씩 노출되긴 하지만, 여전히 용족은 폐쇄적인 성향을 보였다.
“내가 여기에서 우리 외의 진족을 본 건 두 번이야. 한 번은 붉은 드레스를 입은 진족과 라운지에서 마주쳤는데…….”
‘붉은 드레스를 입은 진족’이라는 말에 예전에 염준열과 나눈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키모폴레이아의 선상 파티 전날에 스승님을 아는 듯한 진족을 만났어요. 스승님께 바로 알리고 싶었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어서…….
—붉은 드레스를 입은 진족이었어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 따라오라고 했죠. 하지만 스승님의 말씀을 따랐어요. 모르는 분이라 함께 가지 않았어요.
염준열이 예전에 비탄의 웅녀를 만난 게 이곳이었나?
그런데 키모폴레이아의 선상 파티 전날이면, 체스 대회가 끝난 날 아닌가.
그날 염준열은 잠실 야구장 사건에서 활약한 붉은 사자 멤버들과 용족과 함께 움직였다.
즉, 그 자리엔 청룡과 염방열이 있었을 것이다.
이 에어 호텔의 보안 수준이 만만치 않은데 청룡과 염방열의 눈까지 속였다고?
비탄의 웅녀는 어떻게 염준열과 접촉했는지 모르겠다.
“또 한 번은 사족(蛇族)의 수장분을 뵈었어.”
뭐? 누구를 만나?
비탄의 웅녀를 만난 것도 좀 그런데 염준열은 또 거물을 만났나 보다.
하필 12지를 배신한 긴 꼬리일 가능성이 있는 사족의 수장과.
‘이 레스토랑의 구조상 누군가와 마주치기 힘들어. 비탄의 웅녀처럼 의도적으로 염준열에게 접근한 게 아니면…….’
염준열은 사족의 수장에 관해 이야기했다.
사족의 수장은 당시 TC 그룹의 누군가를 만나고 돌아가던 길이었다고 한다.
황지호가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족이 TC 그룹과 남궁 그룹에 접선을 시도한다고 했는데, 그 일환이었나 보다.
TC 그룹의 누군가와 약속을 마친 사족의 수장은 염준열에게 접근한 듯했다.
“내가 방문한 걸 알고 사환을 통해 동석해도 되는지 청하셨어. 용족과 사족은 같은 12지 동맹 관계에 있거든. 그래서 수락했지.”
“……그분과 어떤 대화를 하셨죠?”
염준열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학교생활에 관해서 이야기했어. 사족의 수장분이 은광고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아.”
* * *
마신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최근 매일 같이 은광구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식음을 전폐하고 은광구를 살펴보는 데에 열중했다.
다른 마족들은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가깝게 지내던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찾기 위해 저렇게 행동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상은 달랐다.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아바리티아의 사제를 찾거나 구출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본 모든 것이 제 손에 있는데 그런 수고를 들일 이유가 없었다.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남긴 자주색의 안구를 두 손에 소중히 들고 ‘눈’을 발동해 은광구를 살폈다.
‘파고들 틈을 찾아야 해.’
인비디우스의 사제의 목표는 단 하나였다.
은광구의 호족, 그 곁에 있는 까마귀 가면을 쓴 언령술사.
‘언령술사가 있는 한 직접 움직이는 건 힘들어. 가뜩이나 은광고에는 언령을 쓰는 교사가 둘이나 있는데, 까마귀 가면까지 잡아야 한다니!’
그냥 언령술사도 아니고, 무려 호족의 수장과 손을 잡은 언령술사였다.
사냥이 쉽지 않을 건 불 보듯 뻔했다.
그러나 언령을 쓰는 까마귀는 반드시 제 손으로 붙잡고 싶었다.
‘권속을 빙의시킬 만한 매개체를 찾아야 해. 은광고 소속 인물에, 정신력은 떨어지고, 유력한 배경은 없지만, 은광고의 강자와 안면을 튼 사이면 더할 나위 없겠지. 지인이 무너지면 고통은 더욱 커지니까.’
인비디우스의 존재가 상징하는 것은 ‘질투’.
낮은 정신력과 강렬한 질투심, 열등감을 가진 이는 마신 인비디우스의 먹이였다.
지금 인비디우스의 사제가 찾고 있는 건 그 먹잇감이었다.
‘경쟁 사회의 정점, 은광고라 그런지 상대에게 질투를 품은 학생은 많은데…… 정신력이 약한 학생은 드무네.’
강한 질투심을 품은 이들은 많았지만, 하나같이 강한 정신력을 가진 탓에 영 성에 차지 않았다.
후보가 될 만한 이를 관찰하다가 그만두고, 다른 대상을 다시 관찰하는 것을 얼마나 반복했을까.
인비디우스의 사제는 간신히 그럴싸한 먹잇감 후보를 찾았다.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마족의 시선 끝에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있는 남학생이 닿았다.
어두운 얼굴을 한 남학생이 착용한 명찰에는 ‘방윤섭’이라고 쓰여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