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59화 (457/925)

67. 틈 (1)

며칠 전, 에어 호텔 ‘스노우 앤 에어’.

이날 염준열은 차후 연예계 활동을 두고 논의할 사항이 있어 약속을 잡았다.

학생회장 임기를 마칠 때까지 연예계 활동을 삼가겠다는 염준열의 말에 관계자가 아쉬워하긴 했지만, 이야기는 좋게 마무리되었다.

염준열 옆에서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 붉은 사자 팀 멤버가 있으니 좋게 마무리될 수밖에 없긴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할 때, 사환이 염준열에게 쪽지를 내밀었다.

‘진족의 기운이 느껴져. 일부러 기운을 남겨 둔 것 같은데.’

염준열이 대처하기 전에 경호를 맡던 붉은 사자의 팀원이 그 쪽지를 가로챘다.

붉은 사자의 팀원이 쪽지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염준열은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용족의 후예, 안녕! 나는 사족의 수장이다. 만날 수 있을까? 커피 사 줄게.]

내용은 미심쩍었지만, 상대가 정말 사족의 수장이라면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었다.

염준열은 붉은 사자의 팀원들이 동석한 자리라면 괜찮다고 답했고, 상대는 이에 응했다.

“시간을 내 줘서 고마워. 처음 보네.”

사족의 수장은 세로로 열린 동공을 숨기지 않으며 웃었다.

상대는 염준열에 비해 한참 작은 키와 체구를 가진 여성이었다.

그러나 염준열과 붉은 사자의 팀원은 그녀를 두고 애써 긴장을 숨겨야 했다.

‘수장급은 역시 다르구나……!’

염준열은 그녀의 동공이 머금은 이능파나 기백에 저도 모르게 청룡을 연상했을 정도였다.

사족의 수장은 웃으면서 염준열을 올려다보다가 말을 툭 뱉었다.

“가호 받을래?”

앞뒤 없는 말이었지만, 사족의 수장은 염준열이 마음에 든 듯했다.

염준열은 긴장하고 있었지만, 가호를 제안하는 상황은 아주 자주 접했기에 물 흐르듯이 대꾸했다.

“제안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성인이 되기 전까지는 용왕신께서 주신 가호 외엔 누구의 가호도 받지 않기로 했어요.”

염준열이 받은 가호는 현재 용왕신의 가호, ‘나의 불이 너를 태우는 일은 없으리라’ 하나뿐.

염준열에게 너도나도 가호를 주려는 통에 정해진 룰이었다.

“아쉽네. 은광고에 내 가호를 받은 누군가가 더 있었으면 했는데.”

이 말에 염준열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보통은 염준열이 스타 플레이어라서 혹은 용족의 후예이기에 관심을 보이는데, 사족의 수장은 염준열이 은광고 학생이라서 가호를 제안한 듯했다.

한국 최고 명문 플레이어 특목고 은광고 학생이라는 타이틀도 대중이 주목하는 요소 중 하나이긴 했지만.

염준열은 방금 사족의 수장이 한 말 중 걸리는 부분에 관해 묻기로 했다.

“혹시 은광고에 가호를 내린 플레이어가 있나요?”

“있어. 등신 같은 놈 하나.”

염준열은 ‘등신 같은 놈’이라는 말을 듣고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다시 생각했다.

하지만 옆에 서 있는 붉은 사자 팀원들의 얼굴을 보니 자신이 제대로 들은 게 맞는 것 같았다.

이어서 사족의 수장이 ‘등신 같은’이라는 표현에 힘을 주고 다시 말했다.

“등신 같은 놈 얘기는 일단 접어 두자. 난 은광고에 관해 듣고 싶거든.”

*    *    *

식사를 마친 후, 은광고로 돌아왔다.

염준열은 타고 온 에어 리무진으로 학교 앞까지 바래다줬다.

괜찮다고 말해도 염준열은 자신이 초대했으니 바래다줘야 한다며 내 거절을 거절했다.

결국 착하고 성실한 제자이자 선배의 마음씨에 감탄하며 얌전히 귀갓길을 함께했다.

“의신아, 그럼 내일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

학년이 다르고 듣는 수업이 다르니 마주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나?

염준열과 교내에서 마주치는 빈도는 높은 편이지만.

그래도 상투적인 인사말을 두고 말꼬리를 잡지 않기로 했다.

딩동.

염준열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디바이스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를 보낸 이는 염준열이었다.

염준열은 주변의 눈을 신경 썼는지 제자로서의 인사는 디바이스 메시지로 따로 보냈다.

기숙사에 도착한 이후에 답변 메시지를 작성했는데, 메시지를 송신하고 난 후에야 뒤늦게 오늘 하지 못한 말이 떠올랐다.

‘용왕신의 무녀 시나리오가 일어날 때쯤 용궁에 오지 말라고 말할 생각이었는데…… 사족 이야기 때문에 타이밍을 놓쳤네.’

내년 2월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천천히 말해도 될까.

다음에 염준열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으면 잊지 말고 말해야겠다.

넓은 기숙사방 한구석에 앉아 오늘 염준열이 해 준 이야기를 되짚어 봤다.

염준열이 준 생일 선물 두 개, 방랑벽이 있다는 염준열의 스승…… 모두 인상 깊었지만, 가장 신경 쓰이는 건 사족의 이야기였다.

‘그 자리에는 염준열만 있던 게 아니라 붉은 사자의 팀원도 있었어. 염준열의 눈을 속여도 그들의 눈까지는 못 속였을 테니 다른 수작은 안 부렸겠지.’

그렇다면 사족의 수장은 정말로 염준열과 은광고 이야기를 하러 온 걸까?

염준열과 사족의 수장에 관해 길게 대화했는데, 그 대화 내용만 봐선 사족의 수장이 악의를 품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분은 그 학생을 ‘등신 같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나름 걱정하시는 것 같았어. 가호까지 내렸다고 하니까 신경 쓰고 계시나 봐.

―혹시 어떤 가호를 내렸는지 들으셨나요?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인지는 듣지 못했어. 정신 공유가 잘 안 되는지 강한 가호는 아닌 것 같아.

가호란 상위 존재와 진족의 ‘존재감’을 상호 동의하에 한 존재 안에 심고 각인하는 것.

새겨진 존재감이 크면 클수록 가호의 힘도 강력해지고, 정신이 공유되는 범위도 커진다.

사족의 수장은 그 등신 같은 은광고 학생에게 그리 대단치 않은 가호를 내린 듯했다.

―걱정돼서 오랜만에 연락해 봤는데, 꺼지라는 소릴 들었대.

사족의 수장이 가호를 내린 누군가.

등신 같은 은광고 학생.

경솔하게도 사족의 수장에게 꺼지라고 말할 법한 등신.

단서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내용들이었으나, 머릿속에 어떤 인물이 곧바로 떠올랐다.

‘한 놈밖에 안 떠오르는데.’

은광고에 재학 중인 학생 수는 약 1,500명.

그 많은 학생 중, 사족이 묘사하는 은광고 학생은 단 한 명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무려 상태창으로 가호를 내린 것을 확인한 적도 있었다.

그 가호의 내용은 이러했다.

[가호] 어느 사족(蛇族)의 응원, ‘그 등신스러움이 네 매력이다’

방윤섭한테 가호를 내린 게 사족의 수장이었나……?

확증은 없지만, 그냥 그럴 것 같았다.

‘방윤섭에게 가호를 내린 게 사족의 수장이 아니라 해도 그놈이 사족과 엮인 건 변하지 않아.’

사족은 긴 꼬리 후보 중 하나이니 허투루 넘어갈 수 없었다.

거기에 얼마 전 MITRON의 파티시에, 류장이 한 말도 마음에 걸렸다.

류장은 최근 쿠키를 사지 않는다는 방윤섭을 두고 이렇게 말했다.

―쿠키를 사는 걸 그만둔 이후로는 조의신 학생의 심부름 빈도가 크게 늘었죠. 여학생과 가게에 오지도 않고, 쿠키를 언급하면 화를 내더군요. 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

―마음에 틈이 생기면 노려지기 쉽죠.

마음에 틈이 생긴다는 말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아바리티아의 사제가 넘긴 ‘눈’도 거슬렸다.

그리고 마음과 정신에 빈틈과 허점투성이인 방윤섭도 신경 쓰였다.

딩동.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디바이스 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에는 마침 방윤섭이 언급되어 있었다.

[목우람] 안녕하십니까, 부반장. 방윤섭 학생의 흡연 적발 보고를 올리기 위해 메시지를 보냅니다.

[목우람] 발각 당시 방윤섭 학생은 흡연 중이 아니었으나, 담배 소지 시에도 연락해 달라는 말씀을 떠올려 보고하기로 했습니다.

[목우람] (사진)

목우람이 보낸 사진에는 불이 붙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쭈그려 앉아 있는 방윤섭이 찍혀 있었다.

방윤섭은 사진이 찍히는 것도 모르고 어둡고 멍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는 중이었다.

평소라면 그냥 멍청한 얼굴로 보였겠지만, 류장에게 사연을 들은 탓일까.

방윤섭의 얼굴이 실연하여 슬픔의 절정에 오른 인간의 얼굴로 보였다.

‘……당분간 방윤섭을 좀 살펴볼까.’

할 일이 많긴 했지만, 어쨌든 방윤섭은 사족과 연관된 인물 아닌가.

시간을 쓸 가치가 있을 것이다.

나는 목우람에게 빵 선물권과 빵집 주소와 메뉴를 보낸 후, 메시지창을 껐다.

‘내일부터 방윤섭을 살펴보고, 좀 문제가 생겼다 싶으면 일단 탁거산과 상담해 보고…….’

늘 그랬듯 계획을 세우다가 꿈 없이 잠들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기숙사 식당에서 맹효돈과 사월세음을 마주쳐 함께 아침 식사를 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 모처럼 반 아이들과 같이 밥을 먹는데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았다.

“뭐야, 다들 왜 이렇게 시끄러워.”

“아마 은광고 게시판에 올라온 사건 때문일 거예요!”

고갈비와 고등어 강정을 두 그릇째 먹던 맹효돈이 불만스럽게 말하자 사월세음이 은광고 커뮤니티 종합 게시판을 열어 보여 줬다.

종합 게시판에 다양한 화제가 올라와 있었지만, 유독 눈에 띄는 이야기가 있었다.

‘1학년 담당 교직원 전용 교무실 습격 사건?’

아직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0반이 관계되어 있을 것 같은 느낌의 제목이었다.

사월세음은 설명을 계속했다.

“어제 방과 후에 어떤 학생들이 1학년 교무실에 쳐들어간 모양이에요!”

“거긴 학생도 출입 가능하잖아. 굳이 쳐들어갈 필요가 있냐.”

“몰래 쳐들어가서 출석부를 다 가져갔대요.”

“……뭐?”

맹효돈이 숟가락을 움직이는 것도 잊고 멍청한 얼굴로 되물었다.

어제 방과 후, 학생으로 추정되는 괴인 두 명이 1학년 담당 교직원 전용 교무실에 난입해 출석부를 털어 갔다.

출석 관리는 디바이스로도 가능하지만,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하는 교사를 위해 출석부도 있던 모양이었다.

괴인 둘은 그 출석부를 노렸다고 한다.

“우리 담임이 그걸 놓칠 리가 없는데.”

“함근형 선생님이 안 계셨대요. 그때 교무실에는 교사 세 분이 계셨다고 하는데…… 저도 잘 모르는 선생님들이라.”

괴인들은 교사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틈에 출석부를 챙겨 달아났다고 한다.

교사들은 뒤늦게 괴인들을 추적하려고 했다.

처음 용의선상에 오른 건 2, 3학년 0반 학생들이었다.

그들이 딱히 1학년 0반의 학생부를 훔칠 이유는 없지만, 그들이라면 충분히 이유 없는 짓을 할 것 같다는 게 교사진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2, 3학년 0반 학생들에게는 모두 알리바이가 있었대요. 그래서 1학년 0반도 확인하게 됐는데…… 출석을 안 하시는 분들 빼고 다 행적이 확인되었어요.”

사건이 터진 시간대를 보니, 교문 앞에서 염준열과 합류했을 때였다.

정문 앞 기록기기를 보면 내 위치가 확인되었을 테니 나는 금방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을 거다.

“그럼 범인은 누군데? 0반은 다 아니라며.”

“아뇨, 범인들은 0반이래요!”

사월세음이 말을 돌려서 하긴 했지만, 그 말을 들으니 범인 후보가 누군지 바로 파악이 됐다.

맹효돈은 이해가 안 가는지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돌머리를 굴렸다.

“2학년 0반, 3학년 0반은 아니고…… 우리 반 애들도 아니고…….”

“범인은 등교 거부 중인 우리 반 애인가 보네.”

2, 3학년 0반은 범인이 아니다.

1학년 0반 중 등교를 하는 학생은 범인이 아니다.

범인은 0반이다.

위 내용을 종합해 봤을 때, 범인은 1학년 0반 소속 등교 거부자다.

내 말에 맹효돈이 뒤늦게 ‘아’ 하고 탄성을 뱉으며 납득했다.

“네! 의신이 말이 맞아요! 아, 방금 사진이 떴어요. ……이상한 옷을 입고 범행을 했네요.”

사월세음이 보여 준 사진엔 내가 아는 인물들이 찍혀 있었다.

얼굴은 가렸지만 실루엣, 입은 옷차림을 보면 누군지 금방 파악이 되었다.

‘……이건 그 관종들이잖아!’

출석부를 훔친 건 두 관종, 괴도 네온과 구슬비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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