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틈 (3)
기록기기에는 학을 본뜬 겉옷을 입은 두 관종이 출석부를 들고 튀는 장면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영상을 확인하고 출석부 강탈 사건의 개요를 듣고 나니 머리가 아파졌다.
사건의 중심에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둘이나 엮여 있다니.
거기에 둘 다 우리 반인 데다가 ‘그 단어’에 관해 알고 있다는 게 몹시 마음에 걸렸다.
‘그 관종들은 왜 출석부를 훔친 거지?’
생각하나 마나 관심을 끌기 위한 사전 작업에 써먹기 위해 훔쳤을 게 분명했다.
플마고, 이 세계 가릴 것 없이 관심을 끌기 위해 노력과 재능을 낭비하는 모습이 참 한결같았다.
처음엔 황당하고 놀랍기만 했는데 계속 영상을 보다 보니 다른 감상도 들었다.
‘……자세히 보니 옷은 잘 만들었네. 디자인은 그렇다 쳐도, 뛸 때마다 학이 빛을 뿌리며 홰치는 것처럼 보여.’
저 지나치게 눈에 띄고 화려한 의상은 괴도 네온이 직접 제작한 옷일 거다.
괴도 네온은 괴도 짓을 할 때마다 직접 만든 옷을 입고 다녔으니까.
관종이긴 하지만 괴도 네온의 재봉 솜씨는 정말 훌륭했다.
어쩌다가 구슬비도 괴도 네온이 만든 옷을 입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좋아서 입은 건 확실했다.
‘하기 싫은 일은 그 당시 가장 친하게 지내던 주수혁이 부탁해도 바로 거절했는데.’
플마고 속 구슬비는 반 아이 중 주수혁과 가장 친하게 지냈다.
주수혁이 위기에 처했을 때, 중상을 입을 각오를 하고 구하러 갈 정도로 친했다.
하지만 주수혁이 참석을 부탁한 학급 행사에는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거 때문에 주수혁의 팬과도 충돌했지.’
학급 행사 참석 정도는 자율적으로 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데, 주수혁의 팬들은 자기 의사를 명확하게 표현하는 구슬비의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나 보다.
결국 주수혁의 팬들은 구슬비를 불러내어 버릇을 고쳐 주려 했다.
이게 다 주수혁을 위해서라는 핑계를 대고서.
구슬비가 단단한 멘탈을 가지고 주수혁의 팬들을 혼쭐내 주고 주수혁이 그 상황을 목격하고 수습했기에 별 탈이 없긴 했지만, 씁쓸한 사건이었다.
“옷이 똑같네. 커플룩인가? 왜 이걸 입고 훔친 거지?”
“글쎄요, 좀 특이한 데이트를 한 게 아닐까요? 사이가 좋아 보이네요!”
“아, 맞다. 문 따는 장면 다시 보여 주라. 문이 막 열렸을 때는 안에 있는 교사들은 몰랐던 거 같은데.”
“저도 그 장면이 신경 쓰였어요! 같이 봐요.”
사월세음과 맹효돈이 사이 좋게 우리 반 아이들의 기행을 분석했다.
1학년 교사진 중엔 진족, 후예를 비롯한 강자가 많은데, 빈틈을 노려서 잘 훔친 게 기가 막혔다.
역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운 관찰력과 행동력이라고 생각했다.
반 아이들의 일탈에 함근형 선생님의 고민이 늘어난 것 같지만…… 눈치를 보니 함근형 선생님은 사고를 쳐도 좋으니까 일단 등교를 해 줬으면 하는 것 같았다.
어쨌든 등교 거부자들이 사고를 치긴 했지만, 오늘도 우리 반 아이들은 착실하게 등교하여 학교생활을 영위하는 중이었다.
“얘들아, 곧 수능이라서 이벤트를 준비할까 하는데…….”
조례가 끝난 직후, 김유리가 전자 칠판에 ‘D-8’이라고 크게 쓰며 운을 뗐다.
수능까지 이제 8일밖에 안 남았다니.
시간이 정말 빠르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수능은 3학년 선배님들이 치르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희도 뭔가 해야 합니까?”
“보통은 학생회에서 준비하는 일을 돕는 선에 그치긴 하는데, 0반에선 선배들을 챙기는 풍습이 있나 봐.”
0반 끼리 묘한 유대감이 존재하긴 하지만, 그런 훈훈한 전통이 있었다니 의외였다.
반 아이들이 의아해하는 가운데 김유리의 설명이 이어졌다.
“3학년들은 빨리 취업, 진학에 힘쓰라고 수능을 마치면 바로 기말고사를 치르잖아?”
“학사 일정 보니까 3학년만 기말고사를 일찍 치르긴 하던데.”
“응, 3학년은 수능 바로 다음 주부터 기말고사야. 수능은 망치더라도 기말고사는 잘 치러야 졸업할 수 있으니까, 0반 선배들의 무사 졸업을 기원하며 이벤트를 준비한대.”
결국 선배놈들이 수능을 잘 치르냐 마냐보다 저놈들을 무사히 졸업시키는 게 더 중요한 듯했다.
“아…… 현악부 선배님한테 들은 적이 있어. 가끔 괴짜들은 일부러 기말고사를 망쳐서 유급을 하신대.”
“……미술부에서 들었는데, 수능 망친 게 화나서 유급한 0반 선배가 있다고 하더라.”
권레나와 민그린의 말에 반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3학년 0반 우기환 일당의 기행은 몹시 유명하다.
만약 우기환이 임연화와 1년 더 승부하겠다며 단체로 유급을 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금찬왕찬 일당과 우기환 일당이 하나로 합쳐진, 끔찍한 혼종이 탄생할 것이다!
‘……있을 법해. 우기환이라면 충동적으로 승부를 위해 유급을 하겠다고 할지도 몰라.’
이 생각에 쐐기를 박은 건 황지호였다.
“하하하! 0반 학생이 자진해서 유급한 건 몇 번 있었지. 단체 유급을 시도한 0반 학급도 있었다. 교사진의 설득 끝에 막긴 했다만.”
정말 실제로 일어나는 일들이었구나.
저 미치광이들을 1년 더 볼 수도 있다는 뜻인가?
우기환과 금찬왕찬이 반장 자리를 두고 왕좌의 게임을 벌일 게 뻔한데 그 여파가 어떨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찬솔 선배님들한테 연락이 왔는데, 3학년 0반과 같은 반 하기 싫으니까 꼭 졸업시켜야 한다고 하시더라고.”
“아, 저도 그 얘기 들었어요! 선배님들은 제갈재걸 선생님이 맡는 학생이 늘어나는 건 싫으시대요.”
같은 반 하기 싫은 이유가 제갈재걸 때문이었나.
제갈재걸 광팬들의 사고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3학년 0반의 유급을 막으려는 그들의 시도는 바람직했다.
그렇게 우리 반은 수능 응원 이벤트를 준비하기로 했다.
사실 수능 응원 이벤트를 한다고 해서 0반 선배놈들의 기행을 막을 순 없지만, 다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 듯했다.
“미로는 꼭 참가해 줬으면 하는데…… 시간 괜찮아?”
“응, 당분간 스케줄도 없으니까 괜찮을 것 같아.”
0반 선배놈들 중에 독고미로의 팬이 있다는 소문이 있어 이벤트의 중심엔 독고미로가 서기로 했다.
야만인과 원시인들이 우글거리는 3학년 0반이지만, 팬심을 자극하는 상대에는 다소 유하게 굴지 않을까?
‘3학년 선배 중에 수능을 보는 사람이 많으니 선물 준비해야겠네.’
신문부의 3학년 선배들, 오혜지, 성시완, 도원우, 유상희…….
내가 아는 선배들 대부분 수능을 치를 예정이라 했다.
우기환은 수능을 칠지 안 칠지 모르겠지만, 0반 후배로서, 또 예전에 천익산 지도를 받은 인연이 있으니 같이 선물을 줘야겠다.
‘다행히 아직 예약을 받는 중이네. 잘 안 되면 옥토연에게 부탁하려 했는데.’
점심시간, 1학년 구역의 산책로.
나는 혼자 벤치에 앉아 달토끼떡에서 수능 시즌 한정 찹쌀떡 세트를 예약했다.
예약을 진행하느라 홀로그램을 터치한 손가락이 좀 시렸다.
날이 부쩍 추워지는 듯했다.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손끝에 피가 돌게 하려고 주먹을 몇 번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며 디바이스 메시지를 확인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성국언이 보낸 메시지였다.
[성국언] 대관석에 관한 건, 알려 줘서 고맙다. 까마귀 마왕이 얽혀 있다니 더 신중하게 움직여야겠구나.
성국언은 아직 포모르 마족이 준 디바이스 코드를 가지고 있다.
포모르 마족과의 거래는 독이 든 성배나 다름없고, 성국언에게 그 성배를 쥘 생각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그 성배의 위치 정도는 파악하고 있을 모양이다.
‘어쨌든 류장이 대관석에 해 둔 안배도 전달해 뒀으니, 성국언이 대관석을 부술 일은 없겠지.’
성국언에게 인사를 마치고 메시지창을 닫으려 할 때였다.
[성국언] 김신록 선생님 말인데.
[성국언] 할 말이 있다면 언제든지 연락해라.
[성국언] 그럼 다음에 보자.
성국언이 의미심장한 말을 던졌다.
황유호의 모습을 한 황지호와 김신록이 일주일에 한 번씩 접선을 시도한다고는 들었다.
성국언은 김신록과 대화하는 과정에서 뭔가 알아챘을지도 모른다.
‘……이 건에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적네.’
성국언이 호족과 그 후예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좀 더 지켜봐야 알 것 같았다.
성국언에게 알았다고 답하고 메시지창을 새로 열었다.
[나] 홍규빈 팀장님, 안녕하세요.
바쁘더라도 직접 확인하고 곧장 답변을 해 주던 홍규빈인데, 자동 메시지로 답변이 왔다.
자동 메시지는 급한 용무면 전화를 달라는 내용이었다.
‘많이 바쁜가? 바쁘겠지.’
디바이스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할 정도로 바쁜가 보다.
슬슬 수능이 얼마 안 남았으니 도원우와 유상희 건을 빨리 매듭지었으면 하는데…….
시간이 나면 전화해 달라는 메시지를 남기고 메시지창을 닫았다.
딩동.
그때, 곧바로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
나와 주수혁, 맹효돈 셋이 있는 단체 메시지방이었다.
[주수혁] 의신아! 윤섭이가 담배 물고 있는 걸 발견했어. 무슨 빵 사 오게 할까?
[주수혁] (사진)
주수혁이 첨부한 사진 속, 담배 세 개를 잘근잘근 물고 있는 방윤섭이 찍혀 있었다.
불을 붙이진 않았지만, 담배의 개수가 지나치게 많아 유죄 처리 하기로 했다.
담배는 고등학생이 소지할 만한 게 아니니, 한 개비라도 입에 물고 있으면 그냥 빵을 사 오게 할 생각이지만.
[맹효돈] 그 새끼 요즘 왜 그러냐
[맹효돈] 훈련 자주 빠져서 도인 열 받음
[주수혁] 그동안 윤섭이 훈련에 안 나갔어?
[맹효돈] 어
방윤섭이 실연으로 인한 쇼크가 매우 큰가 보다.
그런데 탁거산이 훈련에 빠진 방윤섭을 그동안 내버려 둔 걸 보면 탁거산이 보기에도 방윤섭 상태가 안 좋았나 보다.
정신을 좀 추스르고 오라고 훈련에 빠져도 눈 감아 준 모양인 듯했다.
‘이 근처네, 가 볼까.’
주수혁이 찍은 사진을 보니 마침 이 산책로 가까운 곳이라 직접 가 보기로 했다.
일단 방윤섭의 꼴을 눈으로 보고 상황을 파악해야 할 것 같다.
[나] 지금 가는 중.
메시지를 보내고 목적지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십 초 정도 달렸을 때였다.
“둘 다 꺼져!”
방윤섭이 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방윤섭의 앞에는 주수혁과 여학생 하나가 있었다.
주수혁은 방윤섭을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윤섭아, 말을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해.”
“…….”
주수혁은 적의를 풀풀 뿜는 방윤섭과 여학생 사이에 섰다.
방윤섭이 날뛰는 바람에 여학생이 다칠까 봐 걱정해서 주수혁이 그 자리에 선 것 같은데, 그게 방윤섭의 화를 부추긴 듯했다.
방윤섭은 울그락불그락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흡연 사진에서 몇 번 본 실연 당한 자 특유의 축축한 눈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 눈을 보니 딱 감이 왔다.
‘실연당한 상대가 쟤인가? ……잠깐, 아는 얼굴인데.’
주수혁 뒤에서 곤란한 표정을 하고 있는 여학생은 나도 아는 인물이었다.
플마고에 잠깐 나오긴 했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엮인 데다가 오늘 떠올린 인물이기도 했으니까.
‘쟤가 방윤섭의 실연 상대였다고?’
방윤섭의 실연 상대는 플마고 속, 구슬비를 견제하던 주수혁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