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틈 (5)
‘가든’의 정식 명칭은 ‘정원형 이계’.
누군가의 지배하에 놓인 이계를 총칭하는 말이다.
이계의 유형은 던전, 타워, 캐슬, 메이즈 등으로 다양하지만, 간섭을 통해 지배당한 이계는 이능파의 성질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
그래서 ‘이계 지배’ 아래에 놓인 이계는 본래의 성질과 관계없이 가든으로 불린다.
지금 황지호와 함께 향하는 곳은 호족의 가든으로, 정확히는 호족의 수석 주술사에 의해 지배당하는 이계다.
‘가든의 입구는 12지의 결계 범위인 은광고 학교 부지 밖에 있겠지. 그래도 은광구를 벗어날 것 같지 않은데…….’
호족의 가든은 학교 밖에 있는지, 황지호는 교문 밖, 정확히는 서문 쪽으로 향했다.
“도보로 이동하는 게 더 빠를 것 같긴 한데…… 에어 리무진을 타도 상관없겠군. 기사를 부르겠다.”
“걸을게.”
“하하하!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황지호가 번거로운 짓을 하기 전에 걸어가겠다고 했다.
호족의 가든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은데, 학교 주변이면 리무진을 타는 것보다 걸어가는 게 눈에 덜 띌 거다.
황지호는 처웃다가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든에 문제가 있어서 그 부부와 접촉하는 데에 시간이 걸렸다.”
“문제?”
“그래. 가든 내부의 시간을 왜곡시켜서 부부가 단란한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했더니, 이게 좀 문제가 됐다.”
가든에서 호족 부부가 어떤 단란한 시간을 보냈는지 짐작도 안 갔다.
아무리 지배되어 가든화 되었다 해도 거긴 이계고, 에너미가 존재하지 않는가.
게다가 그들의 후예를 앗아간 웅족도 함께였을 텐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계이담을 패며 보낸 대련 시간이 떠올랐다.
그들이 품은 감정과 복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니 계이담과의 대련 따위에 비유를 하기에도 민망했지만, 단란함의 개념이 무엇인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황지호는 가든에 발생한 문제에 관해 계속 이야기했다.
“호족의 수석 주술사는 결계를 만들고, 그 안의 시간 감각을 조작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수석 주술사는 우리 호족 중에선 한참 어린 편에 속하지만, 누구나 그 능력을 인정하고 있지.”
호족의 수석 주술사는 신화 시절부터 있던 존재가 아니었나 보다.
황지호가 호족 중에서 자주 언급하고 그 수석 주술사의 힘을 빌릴 때가 많아 개천 신화 때 이름을 남긴 누군가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괜히 호족에 관해 캐다가 의심을 살까 봐 정말 필요한 정보 외의 질문은 삼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쯤 되니 호족의 수석 주술사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졌다.
사실, 호족의 수석 주술사는 김유리에게 과외 지도를 하는 스승이기도 했기에 여간 궁금한 게 아니었다.
황지호가 저렇게 언급하고, 곧 가든에도 가는데 질문해도 괜찮지 않을까?
결국 호기심에 못 이겨 수석 주술사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수석 주술사는 어떤 호족이야?”
황지호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씨익 웃었다.
호족에 관해 묻는 게 불쾌해서 저러는 것 같진 않았다.
딱히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왜 저리 뜸을 들이는 건가.
황지호가 몇 초 입을 다물고 있다가 말했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는 게 빠를 거다. 오늘 소개해 주마. 소개 후에 더 궁금한 게 있으면 말해 주겠다.”
진짜 왜 뜸을 들인 건지 모르겠다.
황지호의 입으로 말할 생각이 없는 건 확실해 보였다.
“하하하! 정 궁금하면 지금 말해 줄 수도 있다.”
“됐어.”
“하하하하!”
노친네가 처웃는 소리를 들으며 걷다 보니 서문 앞에 도착했다.
부 활동을 하지 않고 일찍 귀가하는 학생들과 인근 주민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12지의 결계 밖으로 나오자 황지호가 성큼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이쪽이다. 지금부터는 내가 앞장서지.”
서문 쪽에는 MITRON이 있어 자주 방문했는데, 황지호가 걷는 방향은 묘하게 낯설었다.
걸으면 걸을수록 인적과 건물이 없어졌다.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길이 열린 것 같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사람과 건물 대신 대나무가 시야를 메우기 시작했다.
대나무가 점점 늘어나는 것 같은데, 이 주변에 이렇게 대나무가 많았나?
‘……보통 대나무가 아닌 것 같은데.’
위화감을 느끼고 자세히 주변을 관찰하니 이능파의 흐름이 이질적인 게 느껴졌다.
아마 이 대나무숲 전체가 스킬이나 광림으로 조성된 것 같았다.
사람 하나 들어가기 어려울 정도로 무성한 대나무숲이었는데, 황지호가 걸음을 뗄 때마다 잎이 흔들리며 길이 열렸다.
방향 감각을 잃을까 봐 신경을 곤두세우고 걸었는데, 언뜻 느끼기엔 지금 이 대나무숲이 천익산과 맞닿아 있는 것 같았다.
“다 왔군.”
황지호가 그렇게 말하고 몇 걸음 더 걷자 공터가 나왔다.
대나무에 둘러싸인 공터 안에 청죽의 두루마기를 입은 청년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자가 호족의 수석 주술사인가?’
청년은 나와 황지호가 접근하고 있는 걸 알았는지 이쪽을 곧게 응시하고 있었다.
청년은 황지호를 향해 예를 갖췄다.
“황호 님을 뵙습니다.”
“그래, 수고가 많군.”
교복을 입은 황지호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청년을 보니 위화감이 느껴졌지만, 저래 봬도 저놈은 호족의 수장이니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잘 알고 있겠지만 소개하지. 호족의 은인, 조의신이다.”
“안녕하세요.”
내가 인사를 하니 청년이 웃으며 인사했다.
“반갑습니다, 조의신. 황호 님과 유리에게 자주 이야기를 들었어요.”
김유리 이야기를 하는 걸 보니 이자가 그 호족의 수석 주술사인 게 분명했다.
황지호와 김유리가 내 이야기를 했다는데, 대체 어떤 이야기를 했을지 궁금하다.
수석 주술사가 호의를 보이는 걸 보니 나쁜 이야기는 안 했을 것 같긴 하다.
“조의신, 이쪽은 호족의 수석 주술사다. 죽호(竹虎)라고 불리고 있지.”
푸른 대나무숲.
수천 년을 살아온 호족 사이에선 한참 어린 존재.
죽호(竹虎).
이 단서를 조합하니 수석 주술사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황지호가 내 얼굴에서 또 뭘 읽었는지 한마디 했다.
“그 얼굴을 보니 죽호가 어떤 존재인지 안 것 같군.”
“황호 님께서 제 직책과 가명 외에는 전달하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조의신의 말을 들어 보지.”
두 호랑이가 기대에 찬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추리했는지 기대하나 보다.
……이러다 틀리면 망신 아닌가?
일단 내가 짐작한 내용을 바탕으로 물었다.
“혹시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에 그려진 분이신가요?”
이 말에 수석 주술사가 조금 눈을 크게 뜨며 놀란 얼굴을 했다.
정답을 맞힌 것 같다.
“네, 맞습니다. 저는 민담계 호족, 죽호라고 합니다. 단원 김홍도 화백의 명작에서 탄생했죠.”
죽호는 자신의 기원에 관해 짧게 설명했다.
죽호는 장자의 제물론, 호접지몽(胡蝶之夢)의 고사에서 생을 얻은 나비령과 비슷한 케이스였다.
그림 자체가 명작인 것도 있지만, 죽호의 강력한 힘은 단순히 그림에서만 오는 게 아닌 듯했다.
수많은 민화에서 호랑이와 대나무가 그려지고, 여기에 사람들이 벽사와 길상(吉上)의 기원을 담으니 죽호의 힘이 커졌다고 한다.
‘나비령도 단순히 한 책에서 언급된 고사에 그치지 않고, 다른 서적에서 연구와 논의가 거듭되어 고사가 널리 퍼져 지명도가 올라 힘이 커진 케이스였지.’
진족의 근원과 힘의 발동 원리는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지명도와 존재감이 진족의 힘에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알고 있다.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는 한국에서 유명한 호랑이 민화 중 하나다.
또, 죽호도가 널리 퍼져 있는 걸 감안하면 죽호의 힘은 만만치 않을 거다.
‘그런데 죽호가 존재하면 다른 유명한 호랑이 민화에서 비롯된 호족도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 떠오른 건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나 맹호도(猛虎圖)였다.
언젠가 다른 민담계 호족과 또 마주칠지 모르겠다.
한편, 황지호는 죽호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죽호는 아직 오백 년도 살지 않았지만 그 힘은 강력하다. 가든을 맡길 수 있을 정도지.”
“과찬이십니다. 이게 다 황호 님께서 천익산 가까이에 대나무숲을 조성해 주신 덕입니다.”
죽호는 황지호의 칭찬이 기쁜 건지 몹시 쑥스러워하며 말했다.
그 말에 나는 주변 대나무숲을 둘러봤다.
이 대나무숲이 천익산과 이어져 있다면, 플마고 속에서 천익산이 지력을 잃어 썩어 갈 때 이 대나무숲도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죽호가 플마고에서 별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 건 그 탓일지도 모르겠다.
“두 부부도 나와서 기다릴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군.”
“의복을 정결하게 갖추고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두 분은 그날 이후로 한 번도 가든 밖으로 나오지 않으셨으니까요.”
……그 웅족을 붙잡은 게 만우절인데 11월까지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고?
게다가 가든 안은 시간의 흐름이 다르다고 들었는데, 그 부부가 대체 얼마나 긴 시간을 보낸 건지 모르겠다.
“……저기 오는군.”
황지호가 빽빽이 들어찬 대나무 저편을 노려다 보며 말했다.
황지호의 말대로 조금씩 누군가의 기척이 가까워졌다.
* * *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규정 집행부 사무실 내 회의실.
홍규빈이 착잡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홍규빈의 건너편엔 윤 대리와 정 사원이 앉아 있었는데, 둘 다 표정이 그리 좋지 못했다.
윤 대리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정 사원은 이내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말했다.
“아니, 여기서 손을 떼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팀장님이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박 팀장이 비열하게 출신을 물고 늘어지지만 않았으면…….”
홍규빈은 여러 사건을 맡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건은 두 건.
하나는 방송국 사건, 다른 하나는 TC 연구소 사건이었다.
문제는 방송국 사건에 남궁 그룹이 엮이며 발생했다.
‘내가 남궁규빈이었던 게 또 발목을 잡을 줄이야…….’
홍규빈의 옛 이름은 ‘남궁규빈’.
지금은 이름을 버렸다 하지만 남궁 그룹의 후계자였던 시절이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최근 툭하면 홍규빈이 하는 모든 일을 걸고넘어지는 박 팀장이 홍규빈의 출신을 들어 중립성 문제를 거론했다.
“그 망할 놈은 어떻게 팀장님의 출신을 알아 갖고는…….”
“……딱히 비밀도 아니었으니까요. 남궁규빈 시절에 외부 활동을 했으니 숨길 수도 없습니다.”
홍규빈은 정 사원을 달래듯 말했다.
요즘 들어 박 팀장의 정보력이나 사고 능력이 향상된 게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었다.
‘누군가의 지혜를 빌리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일이 많아 조사할 여유가 없군. 조사한다고 해서 꼬리가 잡힐 것 같지도 않고.’
결국 홍규빈은 남궁 그룹 건에서 손을 떼게 되었고 방송국 사건은 박 팀장 손에 넘어갔다.
그동안 홍규빈이 야근을 해 가며 들인 공이 모두 날아간 셈이다.
홍규빈은 그 생각을 하면 천불이 났지만 힘들게 냉정을 가장했다.
“지금은 TC 연구소 건에 집중하죠. 수능도 얼마 안 남았는데 학생들이 진학에 집중하게 도와줍시다.”
“아니, 그래도 한 번 더 위쪽에 얘기를 해 봐야…….”
“윤 대리,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의 후원금 출처는 파악했습니까?”
다소 멍하니 있던 윤 대리가 정신을 번뜩 차렸다.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아, 윤 대리님 얼마 전에 그 전 여친 마주쳤더니 정신 못 차리시네…… 억!”
퍽!
윤 대리의 주먹이 정 사원의 옆구리에 꽂혔다.
윤 대리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홍규빈과 대화를 나눴지만, 머릿속은 얼마 전 마주친 그 전 여친 생각으로 가득했다.
박 팀장의 옆에 선 그녀가 잠시 자신을 아련하게 바라보던 게 뇌리에 생생했다.
무슨 생각인 건지 그녀는 아직 자신이 사귀던 시절에 선물한 액세서리를 착용하고 있었다.
윤 대리가 선물한 건 나비를 모티브로 한 브로치였다.
‘……머릿속에 나비가 돌아다니는 것 같군.’
윤 대리는 겨우 마음을 다잡고 홍규빈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