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66화 (464/925)

67. 틈 (8)

기숙사 내 방에 돌아오니 늦은 시각이 되어 있었다.

황명호 대저택을 나서면서 원격으로 기숙사 난방을 가동시켰는데, 희망 온도를 낮게 설정해 둔 탓일까.

공기가 여전히 서늘하게 느껴졌다.

은호의 후예들이 만든 호랑이인지 고양이인지 구분이 잘 안 가는 어설픈 솜씨의 종이 공예품을 방에 장식한 후에야 난방이 제대로 도는 것 같았다.

‘방에 잘 장식해 뒀다고 말해 줘야지.’

은호의 후예들에게 보낼 사진을 찍기 위해 디바이스를 꺼냈을 때였다.

딩동.

디바이스 메시지 수신음이 들려 홀로그램으로 확인해 보니, 발신자명에 기다렸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낮에 메시지를 보냈는데 계속 바쁘다가 이제 겨우 시간이 난 모양이었다.

[홍규빈] 의신아, 답장이 늦어서 미안하다.

[홍규빈] ……혹시 소식을 듣고 연락한 거니?

어떤 소식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협회 소식에 관해선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홍규빈] 나와 내 부하들은 남궁 그룹과 관련된 모든 사건에서 물러나게 됐어.

생각보다 무거운 소식이었다.

은광한빛보육원과 엮인 용역의 위력 행사 사건.

광일파출소장 김 경감 자살 사건.

남궁물산 소속 회사원이었던 오디션 참가자의 폭로.

방송국 사건 당시 지하에서 발견된, 남궁 그룹에서 개발했다던 지력을 이용하는 이계 시뮬레이터.

홍규빈이 조사를 하던 이 사건들이 다 남궁 그룹과 연관되어 있지 않았던가.

‘홍규빈이 ‘남궁규빈’이었던 시절이 있어서 그랬겠지. 타이밍이 묘한 게 마음에 걸리는데.’

수사 초기라면 모를까, 한창 조사가 진행되어 꼬리를 잡을 즈음에 맥이 이렇게 끊기다니.

홍규빈이 물러난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지만, 타이밍이 마음에 걸렸다.

[나] 팀장님의 출신이 문제가 된 건가요?

[홍규빈] 하하하, 직접 말해 준 적은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알아차렸구나.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힌트는 많이 줬던 것 같은데.

홍규빈은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피눈물을 흘리면서 웃고 있을 것 같았다.

아마 홍규빈은 지금까지 이번 건을 두고 맹렬히 항의했을 것 같았다.

상식적으로 일이 줄었으면 연락이 더 잘되어야 하지 않는가.

아마 대책을 강구하고 실행에 옮기느라 바빴을 거다.

결국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 같지만.

[홍규빈] 지금은 할 수 있는 걸 할 생각이야. 우선 TC 연구소 건에 연관된 학생들이 학교에 돌아갈 수 있도록 서포트할 생각이다.

홍규빈은 은광고 학생이 계속 협회에 있으면 정 사원이 일에 집중을 못 한다며 농담조로 말했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애써 농담을 하는 것 같아 나도 남궁 그룹 건에 관해선 더 추궁하지 않기로 했다.

[홍규빈] TC 연구소의 상임 연구원의 요청으로 고용했다던 용병을 전부 잡아들이는 데에 성공했다.

[홍규빈] 돈으로 움직이는 용병이다 보니, 의리를 세울 모양이 없는 것 같군. 임무 실패로 인해 위약금을 물게 생겨서 형량이라도 줄이려고 하는 게 가장 큰 이유 같지만.

[홍규빈] 그러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됐어.

황지호가 쓰러뜨렸다던 용병은 협회와 협상하기로 한 모양이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 닥치면 고용주는 용병의 입을 막기 위해 위약금을 안 받거나 오히려 돈을 얹어 주는데 그게 안 됐나 보다.

중간에 협회가 끼어서 협상을 방해하고 정보를 조작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홍규빈] 이들은 어느 진족과의 싸움을 대비해 고용된 이들이라고 한다.

[홍규빈] 정확히 말하면 ‘이능이 봉인된 상태인 봉술의 고수’의 제압을 상정한 전투 훈련을 거듭했다더군.

[홍규빈] 가능하면 포획하되 불가능하면 살해할 것을 명령받았다고 한다.

그 봉술의 고수는 제천대성을 말하는 거겠지.

그 용병들은 이능독에 중독된 상태의 제천대성을 제압하기 위해 고용된 게 확실했다.

‘제천대성이 무지기를 찾으러 올 때를 대비한 거겠지. 제천대성을 잡으면 또 다른 ‘에너지원’으로 썼을지도 모르겠네.’

용병이 제아무리 우수해 봐야 제천대성을 잡을 수 있을 리가 없지만, 문제는 이능독의 존재다.

이능독 그 자체만으로 죽지는 않지만, 이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으로 따진다면, 뇌의 일부와 오른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 놓이는 셈이다.

하지만 그날 제천대성을 비롯한 진족들은 향록의 해독제를 먹었으니 녹아내리는 내장을 수복하는 대신, 이능파 패널티는 없었다.

[홍규빈] 그들은 상대가 이능파도 봉인되지 않았고, 봉술이 아닌 다른 주력 스킬을 사용했다며 노발대발하더군.

그야 그 용병들이 상대한 건 제천대성이 아닌 황지호였다.

황지호는 본인 말에 의하면 봉술은 그럭저럭하긴 하지만, 물리 공격은 특기가 아니니까.

홍규빈은 그 외 조사 상황에 대해 언급한 후,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홍규빈] 지금은 TC 연구소의 자금책을 추적하고 있어. 뭔가 알게 되면 연락할게.

[홍규빈] 선생님께 무슨 일이 있으면 바로 연락해. 자동 응답 메시지가 뜨면 전화하고 ^^!

홍규빈은 저렇게 바쁘고 경황없는 와중에도 제갈재걸에 관해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 같아도 잊지 않았겠지만.

‘이건 제갈재걸이 위험할 때 연락하라는 거겠지?’

은광고 축제 때 2학년 0반의 제갈재걸 3D 화보집을 공개할 예정인데, 그것에 관해선 말하지 않아도 되나?

말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일단 미뤄 두기로 했다.

홍규빈은 바쁠 테니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를 중요 행사에 관해 언급해봤자 괜히 심기만 어지러워질 거다.

그다음으로 확인한 메시지는 신문부의 단체 메시지 방이었다.

[문새론] 오늘 발표한 해외 취재 결과물 자료 링크 올림!

[문새론] 진짜 알차게 취재하고 왔음요!

문새론은 신나게 취재 소감과 후기를 아낌없이 공개하다가 다소 풀 죽은 말투로 말했다.

정작 취재의 목적이었던 괴도 네온에 관해선 별로 알아낸 게 없는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문새론] ……괴도 네온에 관해선 조금도 알아내지 못했음.

[문새론] 그 정도의 국제급 관종력이면 지금쯤 사고 몇 개를 더 쳐야 정상 아님? 왜 이렇게 조용함?

역시 플마고 최고의 정보통답게 문새론의 통찰력은 굉장했다.

그 관종은 정상적으로 사고를 치고 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 관종은 현재 1학년 0반의 중심에 서기 위해 다른 관종과 힘을 합쳐 사고를 치는 중이다.

우리 반 주변을 돌아다니며 나타났다가 도망치기를 반복하고, 얼마 전엔 출석부를 들고 튀지 않았는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사고를 칠 것 같아 걱정이다.

[문새론] 괴도 네온 취재는 실패했지만, 염준열좌의 스승님을 뵈었으니 괜찮겠지!

[문새론] 신문부실까지 와 주실 줄은 몰랐음요 ㅎㅎ

문새론은 그 밑으로 신문부실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을 첨부해 뒀다.

……내가 없는 사이 신문부실에 염준열과 용족 스승이 방문했다고?

어제 염준열과 식사했을 때 아무 말도 못 들었는데.

염준열의 메시지를 확인하니 답이 나왔다.

[염준열] 의신아, 사실 오늘 신문부실에 갔어. 새론이가 용족 스승님과 내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해서…….

[염준열] 스승님을 소개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미리 약속하고 갈 걸 그랬어.

[염준열]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한번 보자.

[염준열] (스탬프)

염준열은 신문부실에 깜짝 등장할 예정이었나 보다.

미리 약속을 했어도 호족의 가든 건 때문에 만나긴 힘들었겠지만, 어쨌든 아쉽게 됐다.

‘내일 보자고 말한 게 이 얘기였나…….’

메시지의 말미에는 아쉬워하는 얼굴을 한 홍룡 스탬프가 찍혀 있었다.

후배 조의신이 아닌 스승 ‘그 단어’ 쪽에도 비슷한 요지의 메시지가 도착해 있었다.

염준열에게 후배로서 스승으로서 각각 답변을 보내고, 그 외의 자잘한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확인하고 난 후.

‘아직 사진을 안 찍었지.’

기숙사방에 놓인 종이 호랑이 세 마리를 찍어 은호의 후예들에게 사진을 전송했다.

후예들이 장식해 줘서 고맙다며 기뻐하는 걸 보니 그간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한 게 미안해졌다.

방에 놓인 종이 호랑이들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다시 디바이스를 켰다.

나는 아직 한 번도 수신, 발신 이력이 없는 어느 디바이스 코드를 확인했다.

‘……연락해 보자.’

통화를 시도하고 몇십 초 후, 상대가 받았다.

나는 긴장을 숨기고 최대한 차분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오늘 인사드린 조의신입니다.”

디바이스 너머로 꺼질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황호 님께 은인께서 연락처를 물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안녕하세요…….]

부부의 목소리가 죽림에서 들었을 때보다 조금 잠겨 있었다.

어쩌면 이 부부는 우리와 헤어진 후 계속 정처 없이 찬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녔을지도 모르겠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하는 부탁이 괜히 상처를 헤집는 꼴이 되지 않을까?’

나는 지금부터 이 부부를 만나 어떤 부탁을 할 생각이다.

내가 하는 부탁이 결과적으로 흑막을 잡는 포석이 되더라도 저 부부를 위한 것이라곤 할 수 없다.

흑막을 저지한다고 해도 저 부부가 잃은 것은 다시 찾을 수 없을 테니까.

그 생각을 하니 머리에는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손끝은 차가워졌다.

[……조의신?]

너무 오랫동안 말을 멈추고 있던 탓일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나를 염려하는 것 같이 들려서 손끝이 더 식는 것 같았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할 때, 이 부부에게 한 대 맞을 각오를 하는 게 좋겠다.

나는 겨우 입을 떼었다.

“……잠깐 뵙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    *    *

다음 날.

어제 호족 부부를 만나느라 늦게 잠들긴 했지만, 평소대로 등교를 하고 학교생활을 보냈다.

방윤섭은 내가 시킨 대로 최영희에게 쿠키 배달을 했는데, 말이 배달이지 그냥 던지듯이 쿠키를 앞에 내려놓고 도망쳤다고 한다.

대화할 기회를 만들어 줬는데, 아직 저놈한테 일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방과 후가 되었다.

“……조의신, 이번엔 대체 무슨 수를 둔 거지? 그 부부가 바로 연락을 할 줄은 몰랐다.”

나와 황지호는 비슷한 이유로 이틀 연속 신문부를 쉬게 되었다.

어제와 다른 점이 하나 있긴 했다.

오늘의 목적지는 죽림이 아닌, 은광고 연구동 구역에 위치한 광림연구4관 은영관(銀影館)이었다.

“그 부부가 김신록과 만나고 싶다고 청했다. 김신록의 행동 여하에 따라 고문을 허락할 생각이 있다고 하더군.”

“지금 그분들이랑 김신록 선생님이 만나고 있어?”

내 말에 황지호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있는 자리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 말대로 은영관의 지하에는 김신록 혼자 있었다.

어쩌면 적호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적호는 보이지 않았다.

‘아니, 어제처럼 적연을 쓰고 있을 수도 있어.’

어제 마지막으로 본 김신록은 어딘가 불안불안해 보였는데, 오늘은 마음을 정리했는지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니, 담담한 척하고 있다는 게 맞겠지만.

‘……왔다.’

나와 황지호가 도착하고 10분 정도 기다리니 부부가 등장했다.

황지호를 사이에 두고 김신록과 호족 부부가 인사했다.

호족 부부는 김신록을 마주치는 게 매우 오랜만인지 고개를 기울이며 김신록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그 아이가 이렇게 장성했구나.”

“마지막으로 봤을 땐 정말 작고, 철없었는데…….”

“…….”

김신록은 처음 부부를 만났을 때 인사한 걸 빼면 입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핏줄과 상관없이 상대를 고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황호 님도 네게 그 더러운 종족의 고문을 맡기겠다고 하시는 거겠지.”

어쩌면 이 부부가 김신록을 공격할지도 모른다.

아마 부부와 김신록의 내력에 관해 아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부부는 예상에서 어긋난 제안을 했다.

“지금부터 우리를 고문해 봐라.”

“네가 진정 훌륭한 고문 기술자라면, 우리에게 증명해 보렴.”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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