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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72화 (470/925)

68. 다시 시작 (2)

유상훈은 TC 연구소 사건 이후로 처음 등교했다.

협회에서 유상훈을 붙잡아 두고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유상훈은 유상희를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어 계속 보호자 자격으로 협회에 있었다.

드디어 일이 수습되어 유상훈이 등교를 시작한 건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내 옆에 있었다.

‘하필 황지호와 온 날에 등교를 다시 시작하다니.’

지금 이 자리에는 10대 모습의 황호, 황지호가 있다.

유상훈은 도시후를 만나러 갔을 때, 20대 모습의 황호와 마주치고 대화를 나눴다.

심지어 장남욱은 20대 버전을 보고 황지호라 했었다.

황지호의 정체가 발각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노친네는 숨길 생각이 없는지 뻔뻔하게 말을 걸었다.

“간만에 보는군. 협회 일은 잘 해결됐나?”

“그럭저럭.”

“잘됐군. 조의신과 할 얘기가 많겠지? 나는 먼저 들어가겠다.”

황지호는 배려한답시고 유상훈에게 몇 마디 말을 걸다가 교실로 들어가 버렸다.

유상훈은 황지호를 아무렇지 않게 상대하긴 했는데, 20대 버전의 모습과 비교하는 건지 황지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응시했다.

자동문이 닫힌 후, 유상훈이 짧게 코멘트했다.

“줄어들었네. 그때보다 키도 작고 어려 보여.”

역시 같은 학교 옆 반 학생의 눈을 속일 순 없었다.

유상훈이 둔한 놈도 아니니 알아볼 수밖에 없었을 거다.

“야, 좀 얘기하다가 들어가자.”

그러나 유상훈은 그렇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한적한 산책로 쪽으로 걷는 사이에 유상훈은 농구부 훈련을 빠졌더니 몸이 굳었다며 툴툴거렸다.

유상훈은 황지호의 정체가 무엇인지 별로 관심 없는 듯했지만 일단 물어보기로 했다.

“……황지호의 정체에 관해서 안 물어?”

“나이를 조절하고 제천대성이랑 말 놓는 거 보니까 오래 산 진족인 것 같던데.”

그때 본 황지호는 겉으로 보이는 나이를 조절했다기보다는 그 나이대의 분신을 대령시킨 거다.

미묘한 차이점이 존재하긴 했지만 그걸 지적하긴 힘든 상황이라 입을 다물기로 했다.

황지호는 그냥 진족이 아니라 5천 년 넘게 산 신화 속 신성한 범이고, 제천대성과도 대등하게 거래를 한 사이다.

그런데 유상훈의 태도만 보면 그냥 동네 아저씨의 아는 사람에 관해 말하는 것 같았다.

“학생회장이 후예인데 진족이 있을 수도 있지. 아, 너 학생회장하고도 친하지.”

유상훈의 말을 들으면 그렇긴 한데…….

뭐, 유상훈이 신경 안 쓰니 나도 그만 신경 쓰기로 했다.

애초에 노친네가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데, 내가 생각해 봐야 뭔 소용이 있겠는가.

일단 나와 유상훈은 노친네에 관해 잊기로 했다.

“네가 도와줬으니까 일이 어떻게 돌아가야 하는지 전해야 할 것 같아서 불렀다.”

한창 등교할 시간이라 인적이 드문 천익산 쪽 산책로.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유상훈이 본론을 꺼냈다.

유상훈이 나를 불러낸 이유는 예상대로였지만, 막상 이 상황이 닥치니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다.

‘유상훈뿐만 아니라 유상희의 과거사도 엮여 있을 텐데…… 내가 이걸 다 들어도 되나?’

플마고를 통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알고 있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구한다는 명목으로 조사도 많이 한 주제에 이제 와서 무슨 생각인가.

그래도 TC 연구소에서 봤던 유상희와 유상훈 남매의 괴로워하는 모습을 생각하니 마음이 복잡했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유상훈이 씩 웃으며 말했다.

“유상희 씨도 너한테 말하는 거면 괜찮다고 생각할걸. 문제 있으면 내가 책임지면 된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내가 해결해야겠다.

그런데 저놈은 아직도 유상희를 누나라고 안 부르나?

저번에도 ‘너’라고 부르던데, 언제쯤 유상훈이 유상희를 제대로 누나라고 부를지 모르겠다.

마침 유상희 이야기가 나왔으니, 궁금했던 걸 묻기로 했다.

“유상희 선배님은 등교하셨어?”

“아니, 당분간 쉬기로 했다. 그 이상한 프로젝트 때문에 몸 상태가 별로래. 부모님도 걱정하시고, 수능까지 컨디션 조절할 거다.”

유상희가 겪은 일을 생각하면 좀 쉰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상희의 성격상, 몸에 다소 문제가 있더라도 학교 사람들이 걱정할까 봐 억지로라도 등교할 텐데…….

‘생각보다 상태가 안 좋은 건가?’

그날 쓰레기 같은 연구원들이 유상희를 주저 없이 인질로 삼는 꼴이 떠올라 머리에 열이 올랐다.

상위 존재를 인공적으로 강림시킨다는 정신 나간 내용의 프로젝트가 아닌가.

이름만 들어도 보통 위험한 게 아닌데, 그들은 그 위험을 전부 유상희에게 지운 듯하다.

유상훈의 이능을 지우겠다는 공갈 협박으로 유상희에게 목줄을 채웠으니, 연구원들은 눈치 보지 않고 유상희의 심신을 갈아 버렸을 거다.

‘도원우를 믿자.’

협회가 어떤 처벌을 내리든, 도원우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도원우가 추하게 구는 걸 그만두긴 했지만, 유상희를 속여 고통을 준 이들을 용서할 리 없다.

일단 나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가 도원우의 복수를 조용히 서포트할 예정이다.

‘지금은 복수보다 유상희의 안부를 걱정하는 게 우선이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해외 출장 가셨다던 유상훈네 부모님이 돌아오셨다는 점이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유상희가 푹 쉬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유상희의 현재 몸 상태에 관해 설명한 유상훈이 본론을 꺼냈다.

“TC 연구소에서는 예전부터 승인을 받지 않고 연구를 했대.”

인간 대상 연구에 규정이 존재하듯, 플레이어를 대상으로 한 연구도 마찬가지다.

이능 연구의 경우, 실험 대상이 된 플레이어의 심신에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는 연구는 정부와 협회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유상훈이 말한 ‘승인을 받지 않은 연구’는 아마 플레이어를 실험 대상으로 삼는 연구일 거다.

“연구원 중에는 마족(魔族)도 있었다니까 뭐, 개판이었지. 그러다가 어렸을 때부터 상위 존재의 가호를 받은 유상희 씨한테 눈독을 들인 거고.”

유상희는 강력한 상위 존재의 가호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치유 능력을 지녀 쉽게 심신이 무너지지 않으니 실험체로 삼기 적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유상희에게는 제대로 된 뒷배도 없는 데다가 거대한 약점이 있었다.

그게 바로 유상훈이었다.

그들은 유상훈의 이능 각성을 앞당겨 주는 것을 빌미로 유상희의 협력을 요구했다고 한다.

“유상희 씨도 바보가 아니라서 협력 기간을 정하긴 했는데, 그 새끼들이 사기를 쳐서 문제가 됐다.”

유상희가 협력하기로 한 기간은 2년.

광림을 각성한 17세, 고1 때부터 고3이 되기 전까지였다.

올해 유상희가 고3이 되었으니 연이 끊겨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다.

TC 연구소에서 ‘상위 존재 인공 강림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높으신 분들이 유상희를 불러들이고자 했으니까.

“……사기를 치면서 다시 나를 약점으로 잡았지.”

그들은 유상희를 다시 붙잡기 위해 꾀를 부린 결과, 다시 유상훈을 약점으로 삼기로 했다.

때마침 유상훈과 같은 반인 1학년 1반에서 이능을 잃은 학생이 둘이나 나온 덕에 유상희를 속이는 과정은 수월했다고 한다.

유상희는 결국 다시 위험한 프로젝트에 발을 들이고 말았다.

연구원들은 지난 2년보다 더 과격한 실험을 했고, 유상희는 점점 피폐해졌다.

“승인받지 않은 연구에 참가한 걸로 처벌받을 가능성도 있다는데, 그건 협회 측에서 변호인단을 붙여서 해결해 준다고 했어.”

친족의 생명을 걸고 협박했으니 강요된 행위로 인정된다면 유상희가 처벌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아니,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큰 문제는 안 될 거다.

유상희는 연구에 참가는 했으나 금전적 이득도 못 보고 실험 대상으로서 실컷 착취당했으니 피해자 아닌가.

아마 연구원들이 물귀신처럼 유상희를 끌고 가다 보니 저런 개소리가 나온 거겠지.

그때 시간만 있었으면 패 줬을 텐데, 안타깝게 되었다.

‘무지기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유상희는 봉인된 수조가 일종의 에너지원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유상희는 연구원이 시키는 대로 아케아의 가호를 증폭시키고 목소리를 더 크게 듣는 실험에서 무지기의 이능파를 이용했다.

아마 봉인된 무지기의 입장에선 누가 멋대로 피를 앗아 가는 기분이었을 거다.

몸에 맞지 않는 피를 삼킨 셈인 유상희도 무지기만큼은 아니더라도 피해를 입었을 거다.

“협회에서는 심문보다 검사를 많이 하더라. 실험을 한두 개 한 게 아니라 어떤 폐해가 나타날지 모른다고 해서…….”

어쩐지 예상보다 오래 있는다 싶더니, 검사 때문이었구나.

검사를 받고, 결과에 따라 추가 검사를 하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협회에서 머무는 기간이 길어졌다고 한다.

유상희의 검사가 길어지니 보호자 역으로 간 유상훈도 계속 협회에 머물렀을 거다.

“고맙다. 네가 없었으면 유상희 씨는 계속 거기에 있었겠지.”

이 말에는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유상희가 사기꾼에 낚인 계기 중 하나는 내가 만우절에 부정 입학자들의 이능을 지운 탓 아닌가.

답지 않게 긴말을 마친 유상훈과 교실로 돌아가는 길 내내 계속 그게 마음에 걸렸다.

유상훈과 헤어져 교실로 돌아오니, 등교 거부자를 제외한 아이들이 다 교실에 와 있었다.

“얘들아, 수능 이벤트 준비하느라 잊을 뻔한 게 있어!”

김유리가 전자 칠판에 수능 이벤트까지 남은 기간을 지우고 다른 문구를 적었다.

가을 소풍.

그 문구를 본 아이들이 밝은 얼굴을 했다.

아무리 열심히 준비해도 조금도 기뻐하지 않을 3학년 0반 선배놈들을 위한 이벤트보다, 가을 소풍 쪽이 더 설레고 건설적인 주제로 보였다.

“저번에 2학년 0반 선배님들은 가을 소풍 사전 답사도 다녀오셨더라고요! 후보가 열세 곳이라서 답사에만 일주일이 걸렸대요.”

“열세 곳이면 교통비가 상당히 소모되겠군요. 미리 저축해야겠습니다.”

“저 새끼는 나보다 알바를 더 하던데 왜 교통비 걱정을 하는 거냐.”

목우람의 교통비도 신경 쓰이지만, 대체 2학년 0반은 가을 소풍을 며칠 동안 다녀올 생각이길래 열세 곳을 후보로 잡은 걸까.

0반 선배놈들의 출석은 그렇다 쳐도 제갈재걸이 그만큼 시간을 뺄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선배놈들이 소풍을 어디로 가든 일단 신경 끄고 우리 반 소풍이나 걱정하기로 했다.

이번엔 소풍을 처음 가는 아이들도 있어서 그런지 더 잘 준비하고 싶었다.

“저번 봄 소풍에서 송 할아버지 만났다고 했지? 나도 소풍 가고 싶었어……!”

“미리 말해 주면 객원 연구원 하루 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민그린과 달리 송대석은 대놓고 기대감을 표출하진 않았지만, 회의 내내 연구원 동료한테 들었다는 정보를 총동원해 소풍 장소 후보를 제시했다.

송대석 저놈도 그동안 소풍 가고 싶었나 보다.

반면, 반 아이들 중에서 회의를 즐기지 못하는 아이가 있었다.

“나도 반 티 입고 싶어! 내 문구는 한이가 써 줬으면 좋겠다.”

“하하하하! 그럼 한이의 문구는 내가 써 주마.”

“문구는 한이랑 교환하고 싶은데. ‘하니 Honey’보다 더 귀여운 말을 생각해 올게!”

“하하하하하! 저번에 한이가 이 몸에게 문구를 써 줬으니, 이번엔 내가 답변을 할 차례다.”

“…….”

제 할 말만 하는 중인 패왕과 호족의 수장 사이에 낀 한이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마 지금 한이가 둘의 반 티 문구를 적는다면 ‘그만 처웃어’보다 더 신랄한 말을 쓸 것 같았다.

독고미로와 황지호가 뭐라고 의견을 제시하긴 했지만, 저번처럼 랜덤으로 뽑아 반 티 문구를 쓰기로 했다.

회의가 마무리되었을 때쯤, 내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슬슬 연락할 것 같았지.’

저번에 불상사로 인해 미뤄진 약속의 대상으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성시완] 의신아, 이번 주말에 시간 돼?

[성시완] 저번에 만나기로 한 건 다시 이야기하고 싶은데. ㅎㅎㅎ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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