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73화 (471/925)

68. 다시 시작 (3)

점심시간.

본가에 들렀다가 온 도원우가 늦게 등교했다.

도원우는 눈에 띄지 않게 학생들이 잘 이용하지 않는 루트를 골라 이동했다.

그러나 도원우는 3학년 구역에 도달하기 전, 누군가와 마주치고 말았다.

“원우 형, 안녕하세요.”

도원우에게 말을 걸어온 건 천동하였다.

천동하가 착용한 반무테 안경 너머로 이능파가 은은하게 느껴지는 게, 방금까지 이능을 사용한 것 같았다.

‘기다리고 있었나…….’

천동하는 능력을 써서 도원우가 이동한 루트를 확인한 듯했다.

얼마 전 신세를 진 후배를 무시할 수 없어 도원우는 곧바로 에어보드에서 내렸다.

“플레이어의 자력 구제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잖아요. 다시 못 돌아오실 가능성도 생각했어요.”

천동하는 말은 그렇게 해도 반가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 말에 도원우는 자조하듯 웃었다.

도원우는 은광고에 무사히 돌아왔지만, 다시는 예전처럼 돌아가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변했다.

‘상희한테 그런 짓을 했으니 예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 리가 없지.’

TC 연구소가 한창 유상희에게 압력을 가할 때 도원우는 대체 뭘 했던가.

도원우는 자신이 유상희에게 TC 연구소의 연구직을 권했던 걸 떠올릴 때마다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은 지경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상훈 건으로 마음의 빚이 있는 유상희에게 제 감정을 내세워서…….

“그런 표정 지으라고 한 소리 아닌데요.”

천동하의 날카로운 말이 도원우의 사고를 중단시켰다.

천동하는 늘 도원우가 추하게 굴 때마다 저렇게 쓴소리를 하곤 했다.

그땐 좀 서운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천동하 덕에 그나마 덜 추하게 굴었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지금도 천동하 덕에 부정적인 생각을 하는 걸 멈출 수 있었다.

“상희 누나는요?”

“가족과 요양할 예정이라고 들었어. 수능이 지나야 등교할 거야.”

“그러면 수능 응원 선물은 택배로 보내야겠네요. 원우 형 거는 전날에 직접 드릴게요.”

둘은 잡담을 섞어 가며 이번 사건에 관해 이야기했다.

천동하는 그날 지하에서 벌어진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으나 숨은 공헌자로서 활약했다.

천동하는 염준열을 통해 학생회 임원들에게 TC 연구소 지하 구조도를 제공하고, 사전에 움직여 TC 그룹 측에 의한 증거 인멸을 막는 등 바쁘게 움직였다.

천동하는 협회 내부에서 이번 건이 어떻게 처리되고 있는지는 파악하지 못한 건지 도원우에게 몇 번 더 질문했다.

천동하의 질문 세례가 끝난 뒤, 이번엔 도원우가 새로운 화제를 던졌다.

“시후가 유괴되었던 사건 기억나?”

“그 사건을 어떻게 잊어요. 시후도 이번 건에 엮였나요?”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시후와 관계가 있었던 것 같다.”

도원우는 무지기의 봉인이 풀리던 순간, 도시후의 힘을 어렴풋이 느꼈다.

설마 했는데 역시나 도시후는 무지기와 엮여 있었다.

도시후는 개인적으로 도원우에게 연락하여 제천대성의 허락을 받고 그와 무지기 사이에 엮인 사건의 전말을 전했다.

누군가가 도시후의 광림을 이용해 진족 무지기를 이 땅에 묶어 두려고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전한 후, 도시후는 도원우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 아빠가 유괴사건 배후는 다 잡아냈다고 했는데…… 아닌 것 같아.

―내가 유괴된 사건을 다시 조사해 봐야 해. 원우 형, 도와줘.

무지기의 봉인이 풀린 것을 계기로 도시후는 유괴되었을 당시의 기억을 되찾았다.

도시후는 자신의 광림을 강제로 발동시킨 누군가는 붙잡힌 유괴범 일당 중엔 없다고 말했다.

‘옛날 일이니 단서가 적어. 그래도 내버려 둘 수는 없겠지.’

도원우가 천동하에게 유괴사건에 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하자, 천동하는 흔쾌히 수락했다.

“알아볼게요. 요새 집안 분위기가 이상해서 이것저것 캐 보고 싶은 게 많아요.”

그 말을 하는 천동하의 표정이 다소 어두워졌다.

T와 C의 이혼 사건으로 도씨와 갈라섰던 천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비록 갈라섰다고 하지만, 천씨는 주식과 경영권 등으로 TC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계열 분리 찬반을 두고 도씨 집안 내부에서 충돌이 발생하고 숙청이 벌어졌다.

천씨는 그 틈을 타 TC 그룹 내에서 영향력을 늘리고 있었다.

이번 사건과 지금 그 상황이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좌시할 수는 없었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헤어지기 전, 도원우는 줄곧 머리 한구석에 맴돌던 어떤 존재에 관해 언급했다.

“까마귀 가면 말인데…….”

그날 유일하게 도원우가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존재, 까마귀 가면.

학생회 멤버들과 유상훈도 까마귀 가면을 쓰고 있긴 했지만, 도원우는 편의상 그 누군가를 속으로 까마귀 가면이라 칭하고 있었다.

지명수의 말에 의하면, 염준열이 존경하는 존재라는 그 까마귀 가면 덕에 전원 무사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의견에 도원우도 동의했다.

정체불명이었던 독의 존재도, 위협적이었던 마족도, 마족과 연관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계도, 무지기가 갇힌 수족의 봉인도 전부 까마귀 가면이 해결했으니까.

그날 사건을 마무리 지은 건 제천대성이었지만, 제천대성이 등장하지 않았더라도 그 까마귀 가면이 사건을 수습했을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까마귀 가면이 그 제천대성을 부른 건 아닐까?

‘그날 언령을 사용했을 때, 제갈재걸 선생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 시간에 제갈재걸 선생님은 학교에 계셨다고 했는데…… 대체 그 까마귀 가면은 누구지?’

게다가 그 까마귀 가면은 자신이 부정 입학자 둘의 이능을 지웠다고 했다.

해독, 언령, 이능의 소거…… 전부 희귀한 능력들이었다.

이걸 동시에 해내는 플레이어가 있다니, 믿기 힘들었다.

‘최편득이 실종된 건물에서 까마귀 가면을 쓴 누군가가 나온 기사가 있었지. 동일 인물인가?’

도원우는 알고 있는 정보를 총동원해 보았지만, 결국 까마귀 가면이 누구인지는 결론짓지 못했다.

말꼬리를 흐리는 도원우를 지켜보던 천동하가 말했다.

“까마귀 가면의 정체로 짐작 가는 후보가 있지만, 말하지 않을래요.”

천동하의 입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걸렸다.

“동생이 싫어할 것 같으니까요.”

*    *    *

성시완과 약속한 주말이 되었다.

그사이 1학년 0반은 소풍과 수능 이벤트 준비로 바빴고, 나는 부반장으로서 학급 일을 도왔다.

반 아이들과 함께 학급 일을 하는 건 조금도 힘들지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괴로운 일도 있었다.

‘……이 맛을 앞으로 며칠이나 더 감당해야 하는 걸까.’

나는 주말을 맞이하기 전, 황명호 대저택에 한 번 더 들려서 향록이 보낸 영약 일주일분을 받아야 했다.

영약을 받으러 갔을 때, 은호와 얼굴을 마주하고 갔다.

은호는 나와 적호가 영약을 먹는 걸 아주 흡족해하는 눈치였다.

―의신이 형과 적호 님은 제 몸을 아끼실 줄 모르죠. 영약이 그런 마음도 고쳐 줬으면 좋겠네요.

나와 적호는 호랑이들이 있는 자리에서 영약을 마셔야 했다.

그 자리에 김신록도 있어서 그런지 적호는 아주 의연한 태도로 영약을 마셨지만, 나는 그냥 괴로워하면서 마셨다.

영약을 마시고 난 후, 김신록이 말했다.

―고문 준비를 마쳤습니다. 언제든 가든으로 가겠습니다.

―그 자리엔 나와 조의신이 동행하도록 하지.

실컷 처웃던 황지호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황지호가 그렇게 말한 건 예상한 대로였는데, 여기에서 다른 호랑이가 예상외의 말을 했다.

―나도 가겠다.

어쩌면 적호가 동행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백호군이 갈 줄은 몰랐다.

황지호는 뜻대로 해도 좋다며 바로 허락을 내렸다.

―백호 형님이 그 자리에 가신다고 하실 줄은 몰랐어요. 고문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닌 것 같고…….

은호도 조금 의아해하는 것 같았으나 결국 백호군도 호족의 가든에 동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주말의 일정은 두 가지가 되었다.

하나는 성시완과의 약속, 다른 하나는 호족의 가든 방문.

가든 방문은 괜찮은데 문제는 전자였다.

좋은 주말에 ‘계’새끼 따위를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기분이 더러웠다.

‘계이담은 그냥 없다고 생각하자. 난 오늘 수능 준비에 바쁜 성시완의 스케줄에 맞춰 주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거다.’

계이담은 꼴 보기 싫었지만, 성시완에게 피해를 줄 수는 없었다.

또 자칫하다간 성국언이 그린 큰 그림을 무너뜨릴지도 모른다.

성국언은 비밀 결사 건을 의뢰하며 은광고 내에서 움직여 줄 이들을 구했다.

성국언이 어렵게 구한 학생들이 내분을 일으켜 봐야 좋은 일이 없을 거다.

그나마 중재를 하는 성시완도 곧 졸업하니까, 일적으로 엮일 때는 최대한 참는 수밖에 없다.

‘못 참겠으면 또 불러내서 대련해야겠다.’

‘계’새끼와의 대련이 끝난 후, 나중에 대련과 얼차려 과정을 복기하다 보니 만족스럽지 못한 점이 많았다.

아직 패지 못한 곳, 써먹어 보지 못한 얼차려 패턴 등등이 뒤늦게 떠올라 아쉬움을 삼켰다.

약속 장소인 지익회관 내의 스터디 룸으로 향하는 동안 다음 대련 계획을 철저하게 세웠다.

“…….”

스터디 룸 근처에 도달했을 때, 어쩐지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고 생각했더니 주변에 계이담이 있었다.

계이담은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왜 사람을 쳐다보면서 저딴 얼굴을 하는지 모르겠다.

“얼차려 할 때 짓던 표정을…… 왜 지금…….”

“뭐래.”

계이담이 헛소리를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목적지가 같다 보니 같은 방향으로 걷게 됐는데 거듭된 얼차려로 ‘계’새끼에게 눈치가 생긴 건지 계이담은 매우 떨어진 곳에서 걸었다.

“의신아, 주말에 갑자기 불러내서 미안해. 0반은 수능 이벤트 준비로 바쁠 텐데.”

성시완은 스터디 룸에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성시완은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사과해야 하는 건 내 쪽이었다.

“아뇨, 저야말로 죄송해요. 그날 갑자기 제가 약속을 깼잖아요. 곧 수능이라 바쁘실 텐데, 괜찮으세요?”

“응, 오히려 이럴 땐 마음에 걸리는 일을 남기면 공부가 안 돼.”

이야기를 들어 보니 성시완은 이미 들어갈 대학이 거의 확정된 상황이었다.

플레이어 특기생 전형에 응시했기에 최저 등급만 맞추면 대입 전형이 끝이라고 한다.

성시완과 이야기하다 보니 예전에 나한테 과외를 받던 아이에게 대입 상담을 해 주던 게 떠올라 기분이 훈훈해졌다.

“아, 이담이도 왔구나. 어서 앉아.”

뒤늦게 들어온 계이담의 등장으로 훈훈했던 기분은 금방 잿더미가 되었다.

‘계’새끼와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게 불쾌했으나 성시완의 입장을 고려해 표정 관리에 힘썼다.

나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비밀 결사에 관해서 더 캐 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 구형 시뮬레이터가 있던 비밀 통로를 다시 돌아봐야 할 것 같아요.”

학생회와 선도부의 비밀 결사에 관해 조사하기 위해 숨겨진 통로로 들어간 밤.

운명력의 발동으로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단서를 얻었으나, 그날 모든 단서를 얻은 건 아니었다.

우리는 그날 ‘시뮬레이션 포기’ 버튼을 눌러 밖으로 나왔으니까.

“이번엔 보스 에너미를 쓰러뜨려 시뮬레이션을 클리어하고 싶어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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