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다시 시작 (6)
나는 이 세계로 오기 전, 중학교 3학년 가을 시절로 돌아가 있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세계 주니어 체스 선수권 대회의 파이널 라운드가 치러지던 체스대회장.
넓은 회장 안, 수십 개의 국기가 걸린 깃대들을 지나 나는 중앙의 체스 테이블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허둥지둥 달려온 코치가 나를 불러냈다.
―의신아, 잠깐만.
개회 직전에 왜 저러는 걸까.
최근 며칠간 코치가 나보다 더 긴장한 것처럼 보였던 탓에 조금 걱정됐다.
그래서 발길을 돌려 회장을 나가 코치 쪽으로 다가갔다.
―이거 입고 가.
코치는 스폰서 패치가 붙어 있는 선수복을 내밀었다.
인터뷰할 때 혹은 출국할 때나 입는 대외용 의상을 왜 지금 내미는 건지 순간 알 수 없었다.
보호 안경 너머로 기업 로고들을 바라봤다.
의도를 파악하고 속으로 혀를 찼다.
이번 대국의 결과에 따라 역대 최초로 한국에서 챔피언이 나올 수도 있다.
스폰서들은 한국 최초 주니어 챔피언이 탄생하는 순간에 내가 저걸 입고 있길 바랐던 거다.
―저는 교복 입을 때가 집중이 가장 잘 돼요. 아시잖아요.
―그건 아는데 파이널 라운드에서 꼭 입어 달라는 요청이 있어서…….
―저는 그런 말 못 들었어요.
―의신아!
억지로 선수복을 손에 쥐여 주려는 코치를 무시하고 회장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는 마지막 결전을 앞두고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코치라는 사람이 왜 저런 소리를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스폰서들도 내가 중요한 대국을 할 때는 항상 교복을 입는다는 걸 알 텐데.
‘선수복을 입고 지는 것보다 선수복을 안 입고 이기는 게 이득 아닌가?’
코치의 태도는 의뭉스러운 구석이 많았으나 당시 나는 대국에 몰두했기에 깊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 이후에는 뒤늦게 가족의 부고를 듣고, 체스를 두지 못하게 된 걸 알게 되고…… 그때 일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건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차갑게 식은 손으로 체스 피스를 쥔 나는 가족을 잃기 전후의 일들을 반복하여 복기했다.
‘앞으로 언론에 계속 내 얼굴이 돌 테니, 선수복을 입힌 모습이 많이 찍히길 바랐던 건가?’
그 생각이 과연 옳은 건지 진위는 알 수 없지만, 코치가 이상하게 굴었던 건 분명했다.
코치에게서 느꼈던 위화감을 파고들었다면 가족의 부고를 일찍 알아냈을 텐데.
그랬다면 적어도 발인식에는 가족과 같이 있을 수 있지 않았을까?
[네 후회는 여기에서 시작인가? 아니, 더 후회하는 순간은 따로 있는 것 같은데…….]
내 정신을 헤집는 목소리에 다시 풍경이 바뀌었다.
나는 가족이 있던 시절의 우리 집에 돌아와 있었다.
때는 출국하기 직전이었다.
조용히 나가려고 했는데, 내가 나가는 시각에 알람을 맞춰 둔 건지 까치집 머리를 한 동생들이 눈을 비비며 현관으로 나왔다.
―형, 올 때 선물 사 와.
―오빠, 그때 오빠 간식 먹은 거 때문에 아직 화났어? 미안해.
―이거 먹을래?
동생들의 손에는 먹다 만 초코바, 길거리에서 공짜로 받은 듯한 사탕 몇 알이 올라가 있었다.
닮은 구석이 없는 이란성 쌍둥이 남매 동생들은 툭하면 싸우고 울었는데, 이럴 때만은 죽이 척척 맞았다.
내가 화를 내니 나름 간식을 챙겨 주려고 했지만, 결국 유혹에 못 이겨 전부 먹어 버리고 저것밖에 남지 않은 것 같았다.
어린아이의 인내심을 고려하면 그럴 텐데, 그때는 일부러 속을 긁으려고 저걸 내미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형 비행기 타야 돼서 간식 안 먹나 보다.
동생들이 울상을 지으니 부모님이 그렇게 상황을 무마시켰다.
나는 그때 부모님께도 서운한 마음이 있었다.
부모님은 집안의 맏이가 동생을 위해 양보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계셨다.
나는 호텔을 돌며 간식을 먹을 기회가 많을 테니 동생들이 내 것을 탐내면 그냥 내주라고 대놓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런 고급 간식보다는 부모님이 동네 제과점에서 사 온 간식을 가족들이랑 다 같이 먹고 싶었을 뿐인데…….
―조심해서 다녀와. 코치님 말씀 잘 듣고, 무슨 일 있으면 시차 안 맞아도 전화해.
―……잘 다녀와!
신경이 곤두선 탓일까, 여기에서 잘못 입을 열면 가족들에게 화풀이를 할 것 같았다.
가족들을 보며 고개를 대충 끄덕이고 등을 돌려 버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가족들을 위해 사 온 선물들은 전부 봉안당에 올리게 되었다.
국화 네 송이 옆에 놓인 선물을 담담히 바라보고 있을 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군. 너는 17세인데, 그 이후의 기억도 있어. 흐릿해서 잘 보이지 않지만…….]
아직 내 정신의 틈을 찾지 못한 걸까.
내 이능파가 상대에게 잠식당한 흔적은 없다.
‘내가 ‘저 때로 돌아가고 싶다’, ‘여기에 머물고 싶다’라고 생각한 순간에 내 정신이 여기에 묶일 거다.’
물론 후회는 하고 있다.
가능하면 돌아가고 싶고, 머물고 싶다고도 생각한다.
하지만 그게 불가능하다는 건 내가 잘 안다.
아무리 기도하고 복기해도, 한 번 둔 수는 무를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나는 몰아치는 과거의 재현 속에서도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상황은 좋지 않았다.
‘아직 이 공간을 탈출할 실마리를 찾지 못했어…….’
아까부터 손이 차갑게 식고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또 내가 이능파로 숨통을 틀어막은 건가 싶어서 몇 번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하지만 가족을 잃은 이후로 계속 혼자였다는 건 확실하군. 외롭지 않나?]
옛 한국 지부장이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외모뿐만 아니라 목소리까지 성국언과 닮아 있었는데, 성국언이 우는 아이를 달랠 때보다 더 자상하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너에게 외롭지 않은 환상을 보여 줄 수 있다.]
나를 그 외롭지 않은 환상에 묶어 둘 생각인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달콤한 제안이었다.
옛 한국 지부장이 내 기억을 바탕으로 구현한 환상이 얼마나 정교한지는 방금 경험해 봐서 잘 안다.
환상 속에서 내가 후회 없는 선택을 해서 가족과 동생과 함께하고, 엉망이었던 10대 시절을 다시 시작하고, 외롭지 않게 삶을 산다면…….
하지만 생각은 거기에서 중단되었다.
터무니없는 생각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저는 외로워할 자격이 없어요.”
나는 내 꿈을 이루겠다며 가족을 외롭게 만들었다.
체스 연습을 하느라 혼자 시간을 보냈고, 가끔 마주칠 때에도 예민하게 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인사도 하지 못했다.
가족들을 그렇게 외롭게 만든 주제에 꿈이 깨지고 혼자 남았다는 이유로 외로워한다니.
‘그리고 여기에 있을 수는 없어.’
체스대회장을 봐서 그런 걸까, 손이 식어서 그런 걸까.
교내에서 열린 체스 대회를 응원해 주던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 세계의 해피엔딩을 보겠다고 여기까지 왔는데, 환상 속에서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러니 그런 환상은 필요 없습니다.”
쩌적……!
내 부정의 말에 환상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줄곧 보이지 않았던 옛 한국 지부장이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 과거와 후회로는 너를 어찌할 수 없구나.]
옛 한국 지부장의 목소리가 한결 또렷해져 있었다.
음성이 방금 전보다 분명하게 들렸기에 성국언의 목소리와 차이점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 덕에 내가 지금 옛 한국 지부장과 마주한다는 걸 명확히 느낄 수 있었다.
정신을 공격하는 타입의 이능인 경우, 파훼하기 위해선 공격의 방식을 명확히 인식할 필요가 있으니 좋은 징조였다.
그러나 옛 한국 지부장의 공격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다면 미래와 공포는 어떨까.]
그 순간, 다시 옛 한국 지부장의 모습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가 이능파 속에 모습을 감췄을 때, 다시 풍경은 변해 있었다.
이곳은 우리 반, 은광고의 1학년 0반 교실이었다.
반에는 우리 반 아이들이 있었다.
‘이건, 내가 플마고에서 기억하는 ‘마지막 모습’……!’
안다인을 구하기 위해 눈으로 뒤덮인 은광고로 무리하게 진입한 후 당하고 만 김유리.
공청훤의 사망을 확인한 후, 눈을 감고 조용히 앉아 있는 한이.
잘린 머리카락과 너덜너덜한 리본만을 남긴 권레나.
주수혁의 활로를 뚫기 위해 광림으로 마지막까지 적을 붙잡아 두다가 쓰러진 맹효돈.
나비령의 가든 안을 맨발로 헤맨 탓에 발에 상처가 가득한 사월세음.
서로를 지키기 위해 몸을 날리다가 결국 동시에 눈을 감은 민그린과 송대석.
주수혁에게 단서를 보내고 나서야 안심한 괴도 네온.
멀린과 이어지는 꿈의 길을 여는 걸 거부하고 도망 대신 죽음을 택한 구슬비.
마지막으로 남은 화살을 쏘지 못하고, 부러진 활을 손에 쥔 채로 굳어 있는 함근형 선생님까지…….
‘황지호는 없나…….’
최후를 알 수 없었던 황지호는 이 자리에 없었다.
그 대신 황지호의 자리에 명찰과 교복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목우람과 독고미로의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죽음으로 가득한 광경 속에 살아 있는 건 나뿐이었다.
어제 반 아이들이 소풍과 수능 이벤트에 관해 떠들며 준비했던 교실이, 악몽으로 바뀌어 있었다.
[상당히 구체적이고 잔인하군. 이들의 죽음에 대해 수백, 수천 번 생각하지 않는 한 이런 이미지는 나오지 않는데.]
플마고를 플레이할 때, 리플레이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수백, 수천 번을 반복했으니까.
약간의 가능성만 보여도 나는 몇 번이고 다시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죽는 걸 다시 시작한 횟수만큼 봤어야 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해도 구할 수 있는 이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시험해 봤다고 확신한 후에야 겨우 다음 스테이지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내 손주가 품은 공포의 이미지는 막연해서 그 아이의 기억 외에도 ‘어둠의 시대’ 때의 기억을 참고하여 구현했다. 하지만, 이 광경은 순전히 네가 품고 있는 미래와 공포의 이미지다.]
성시완에게도 이런 걸 보여 준 걸까?
성시완은 어쩌면 피로 물든 지익회관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이 정도로 분명한 죽음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면 얘기가 빠르겠군.]
“……무슨 얘기요?”
[내가 주는 정보는 너와 네 주변 사람을 위험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미래를 맞이할 수 있다는 거지.]
그 말을 들으니 옛 한국 지부장의 의도를 알 것 같았다.
옛 한국 지부장은 나약한 정신을 가진 이에게 단서를 주고 싶지 않았던 거다.
[‘그들’은 인간의 약점을 잘 안다. 네 과거와 미래를 두고 유혹하고, 협박하고, 파괴할 거다.]
“…….”
[너는 물론이고, 지금 네가 걱정하는 이들의 삶이 망가질지도 모른다.]
옛 한국 지부장의 목소리는 어쩐지 나를 걱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옛 한국 지부장이 이 대련을 준비할 때 이곳을 찾아올 후배들을 걱정한 탓에 AI로 구현했을 때에도 비슷한 감정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말을 잠자코 계속 들었다.
[이상하군. 연산 오류인가?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일 텐데…….]
과거와 후회를 두고 흔들렸던 내가 반 아이들의 시체 사이에서 담담한 얼굴을 하고 그의 말을 듣는 게 이상하게 보였던 걸까.
옛 한국 지부장이 말꼬리를 흐리자 입을 열었다.
“제 머릿속을 들여다보셨으면 알겠지만…….”
파아아아……!
내가 말하는 사이, 내 발밑에서 검은 이능파가 피어올랐다.
“저는 스테일메이트를 싫어해요.”
그 말을 끝으로, 내가 발산한 어둠이 공간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