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다시 시작 (7)
정신을 공격하는 스킬은 한 번 발동하면 이능으로는 저항하기 어렵다.
정신, 인지 능력, 감각을 장악당한 상태에 놓이면 물리적인 힘으로 대항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정신의 장악, 조작, 파괴와 연관된 이능의 희귀도는 보통 SSR급 이상.
옛 한국 지부장이 사용한 힘이 희귀하고 유효성이 큰 이능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정신 공격 계열 스킬은 만능이 아니다.
정신 장악에 실패하면 상대의 정신력에 역공당할 가능성이 있다.
바로 지금처럼.
‘……어디에 있지?’
내 이능파가 옛 한국 지부장이 보여 준 환상을 점점 삼켜 갔다.
피로 물든 교실도, 주인이 없는 교복도, 반 아이들의 주검도 어두운 이능파 탓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능파가 이윽고 교탁이 있는 위치에 닿았다.
교탁 뒤, 이 공간의 중심이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
검은 이능파의 거대한 손아귀가 옛 한국 지부장을 움켜쥐었다.
내 역공이 시작되자 숨을 죽이고 틈을 노린 듯하나 내 이능파가 그걸 놓칠 리가 없었다.
옛 한국 지부장이 발버둥을 치기 전에 내 이능파는 완전히 그를 옭아맸다.
반쯤 검게 물든 옛 한국 지부장이 눈을 크게 뜨고 어둠 너머의 나를 응시했다.
[어째서지?]
옛 한국 지부장은 저항이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는지 움직이는 것을 멈추었다.
옛 한국 지부장은 왜 그가 구현한 참혹한 환상이 어둠에 삼켜진 건지, 자신이 내 이능파에 붙잡혀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네 과거는 그리 가볍지 않았다. 과거만을 따지면 화목한 가정에서, 굴곡 없이 성장한 내 손주가 더 강한 정신을 가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건 확실하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당혹스럽다거나 놀랐다기보다는 기뻐 보이는 얼굴이었다.
가혹한 정신 공격을 가했다가 실패한 플레이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어딘가 안심한 표정을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스테일메이트를 싫어한다는 건 무슨 의미지?]
옛 한국 지부장이 내게 질문을 던졌을 때는 이미 어둠이 완전히 이 공간을 삼킨 이후였다.
어둠 속에서 나는 그 말의 의도를 생각해 봤다.
‘기억을 읽어도 내 감정은 읽지 못하나? 이미 승기는 내 손에 있으니 답하지 않아도 되긴 한데…….’
굳이 이 상황에서 묻는 건 이유가 있을 거다.
신중하고 까다로운 옛 한국 지부장에게 맞춰 주기로 했다.
옛 한국 지부장이 체스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을지는 미지수였지만, 그가 스테일메이트의 의미를 안다는 전제하에 대답했다.
“아무리 유리한 국면이라도 모든 체스 피스의 움직임, 대국의 흐름, 상대의 의도를 읽지 못한 채 엔드 게임 페이즈에 이르면 스테일메이트를 당해요.”
[…….]
“대국 분석, 오프닝과 미들 게임에서 승리를 위해 두었던 모든 수가 무의미해지죠.”
내가 체스를 접하고 룰을 익혀 첫 대국을 했을 때를 떠올렸다.
첫 대국의 결과는 스테일메이트였다.
움직일 수 있는 체스 피스가 존재하지 않는 체스보드 위에는 승리도, 패배도 없었다.
그 치열했던 싸움이 허무한 결말에 도달했다는 게 치 떨리게 싫었다.
그래서 나는 스테일메이트리스가 되었다.
“체스 피스를 움직일 수 없다는 이유로 승리도 패배도 아닌 결말을 보긴 싫어요.”
[그렇군…….]
여전히 내 이능파에 사로잡혀 있는 옛 한국 지부장이 몹시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을 했다.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나 보다.
옛 한국 지부장은 비록 AI였지만, 내가 한 말뜻을 이해했을 거다.
스테일메이트를 피하기 위해선 모든 체스 피스의 가능성과 체스보드 위의 정보를 파악해야 한다.
그러니 어떤 단서도 놓칠 수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정보라 해도 말이다.
그가 내 머릿속에 위협적이고, 공포스러운 광경을 쏟아 넣어도 나는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더 이상의 대련은 무의미하군. 조의신, 내 완패다.]
쩌적…… 쩌저적!
옛 한국 지부장의 패배 선언으로 어둠 너머의 공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무너지기 시작한 공간 속에서 널리 퍼진 어둠이 다시 내 쪽으로 몰려들었다.
더는 이 공간이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해 이능파를 갈무리했다.
어둠이 걷히고 마지막으로 옛 한국 지부장을 움켜쥔 거대한 손 모양의 이능파가 녹아내렸을 때.
나와 옛 한국 지부장은 보스 룸에 서 있었다.
[기대 이상이군. 너 같은 후배가 이곳으로 오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시험하는 짓을 해서 미안하다.]
미안하다는 말은 진심처럼 들리긴 했으나 후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내 검은 이능파가 사라진 덕에 그의 얼굴이 더 똑똑히 보였다.
그는 성국언과 몹시 닮은 모습으로 웃고 있었는데,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소감을 말할 때 짓는 표정과 흡사했다.
“아니에요. 제가 당신 입장이었더라도 이 정도의 시험은 준비했을 거예요.”
옛 한국 지부장이 가진 위험한 정보는 날카롭게 벼린 검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강력한 무기이고, 적을 쓰러뜨리는 데에 필요하다고 해서 검을 다룰 줄 모르는 이에게 쥐여 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멋모르고 어린아이가 쥐었다가 다칠지도 모르고, 최악의 경우엔 적에게 검을 쥐고 있다는 이유로 노려져 절명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검을 쥘 이가 검술에 능한지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그 검에 찔리고 베이더라도 검을 놓치지 않을 이에게 내어 줘야 했다.
나보다 앞서 대련하는 바람에 성시완이 험한 꼴을 당한 건 내키지 않긴 했지만.
[이해해 줘서 고맙구나.]
고마우면 나중에 성시완에게 격려의 말을 한마디 남겨 줬으면 좋겠다.
할아버지의 AI에게 쓴소리를 듣고, 후배에게 뒷일을 맡기게 되어 매우 마음 쓰고 있는 것 같던데.
딱.
옛 한국 지부장이 손가락을 두드리자 그의 뒤로 로딩 바가 하나 떠올랐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를 외부로 추출할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로딩이 진행되는 사이, 그는 옛날이야기를 하듯 말했다.
[대영웅 무쇠팔이 새 시대를 열기 전까지, 한반도의 플레이어는 이계와 에너미의 위협 앞에 무력했다. 그래서 나는 어둠의 시대 당시 마족과 혼을 걸고 계약했지.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플마고를 통해 옛 한국 지부장이 마족과 그런 계약을 한 건 알고 있었다.
그건 내 17세 이후의 기억에 해당하니, 내 기억을 읽고도 옛 한국 지부장은 확신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자, 그럼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옛 한국 지부장은 자신이 나눈 계약에 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들으니 어딘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마족들은 그가 기록을 남기는 것을 금지하는 제약을 걸었다고 했는데 어떻게 그는 이 AI의 존재를 남긴 걸까.
질문을 던지자 그가 웃으며 답했다.
[내가 그 계약에 혼이 묶이는 건 생존해 있을 때에 한정된다. 제아무리 마족이라도 ‘윤회의 굴레’에 혼이 흘러가는 걸 막을 수는 없으니까.]
계약 기간이 옛 한국 지부장이 생존해 있는 동안으로 한정된다면, 사후에는 계약이 끝난다.
설마 옛 한국 지부장은 죽고 나서 이 AI에 정보를 남긴 건가.
아니, 어쩌면 옛 한국 지부장은…….
“설마 당신은 직접…….”
[그래.]
옛 한국 지부장은 가라앉은 얼굴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성국언과 매우 닮은 얼굴로 저렇게 초연한 표정을 짓고 있으니 별로 좋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
[늦건 빠르건 마족들은 날 죽일 생각이었지. 준비를 하지 못한 채로 마지막을 맞이할 수는 없었다. 사후에 AI에 정보를 이식하는 건 쉽지 않아.]
옛 한국 지부장은 암살당한 게 아니었다.
그는 계약의 허점을 찌르기 위해 스스로 끝을 택했다.
그 시대의 플레이어 협회의 한국 지부장은 마족 외에도 적이 많았을 테니, 언제 암살당해도 이상하지 않아서 의심을 피한 거다.
죽은 후에 이능을 발현시키겠다는 집념도, 그걸 실행한 의지도 놀라웠다.
[그렇게 단단히 대비를 했는데도 정보 이식이 쉽지 않더군. 사후에 행해서 그런지 업로드 예정이었던 정보의 20%가량이 비어 있다.]
허공에 떠오른 로딩 바는 80%에서 멈춰 있었다.
신체가 기능을 정지했는데도 이능을 발현시켜 정보를 이전한 것만으로도 거의 기적 아닌가?
대영웅 송만석도 그렇고, 어둠의 시대를 헤쳐 온 플레이어들은 현대 플레이어 상식이 통하지 않았다.
[너라면 이 정보를 활용해 답을 이끌어 낼 수 있겠지. 기대하고 있으마.]
옛 한국 지부장과 대화를 마치기 전에, 나는 신경 쓰였던 걸 묻기로 했다.
“질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말해 봐라.]
“이 비밀 통로에는 진족과 후예가 진입할 수 없다고 들었어요. 어떤 원리로 진족과 후예를 배제한 거죠?”
비밀 결사에 관해 수집한 정보 중, 가장 마음에 걸리던 부분이었다.
비밀 결사 선정 조건에는 ‘진족이나 후예가 아닐 것’이 들어가 있는데, 예전에 이를 무시하고 진입하려다 실패한 후예가 있었다고 한다.
대체 어떤 원리로 진족과 후예를 선별해서 공격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자세한 건 윤이에게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군.]
……윤이는 누구를 말하는 거지?
바로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지만, 옛 한국 지부장의 연배를 고려하니 어렵지 않게 답이 나왔다.
은광고의 교장, 황보윤.
홍경복 화백과 동갑이고 그와 친분이 있던 황보윤이라면 옛 한국 지부장과도 연이 있을 것 같았다.
“황보윤 교장 선생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 아이가 이 학교 교장이 되었나? 하핫! 걸작이군. 진족이 뒷배로 있는 학교의 교장이 윤이라니!]
……그는 황보윤이 교장이 된 걸 알지 못했나?
옛 한국 지부장의 말에 의하면 외부의 정보 간섭을 막기 위해 완전히 독립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참을 웃은 그는 데이터 칩을 내밀었다.
[이걸 보여 주면 윤이가 답을 해 줄 거다.]
그가 건네는 데이터 칩을 받아 들자 허공에 시뮬레이션 클리어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시뮬레이션의 끝을 알리는 맑은 종소리가 길게 울려 퍼지고, 클리어 메시지 뒤로 보스 룸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보스 룸의 중앙에 있는 옛 한국 지부장의 모습도 점차 흐려졌다.
[행운을 빈다, 스테일메이트리스.]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졌다.
눈을 깜빡이고 나니 나는 이계 금속으로 가득한 방에 돌아와 있었다.
“의신아!”
성시완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성시완이 한달음에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살폈다.
“괜찮아?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도 나오지 않아서…….”
성시완은 내 안위가 걱정되었나 본데, 아마 나보다 성시완의 상태가 훨씬 좋지 않을 거다.
정신 공격을 당한 탓에 이능파가 흐트러져 있는 상태에서 계속 내 걱정을 했을 성시완의 모습이 떠올랐다.
뒤에서 안절부절못하며 성시완을 보는 계이담을 보니 내 예상이 맞을 것 같았다.
본인의 몸 상태나 클리어 여부보다 내 몸 상태를 먼저 걱정하다니, 정말 ‘계’새끼에게는 지나치게 과분한 선배임을 다시 확인했다.
“시뮬레이션은 무사히 클리어했어요. 건네받은 단서는 아직 확인을 못 해 봐서 나중에 다시 이야기했으면 좋겠어요.”
성시완의 몸 상태도 그렇고, 일단 들어가서 쉬는 게 나을 거다.
계이담도 적극적으로 나서서 성시완에게 휴식하자며 피력하자 오늘은 이만 여기에서 해산하게 되었다.
‘오늘은 한숨도 못 자겠네.’
일단 기숙사에 돌아가서 씻고 데이터를 분석하고 약속 시간이 되면 죽림으로 가야겠다.
머릿속에서 그렇게 정리를 하니 어느덧 선도부 회관 로비에 도착했다.
로비의 유리창 너머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벌써 해가 뜬 시각이네.’
해가 늦게 뜨는 계절인데, 정말 오랜 시간 저 안에 머물렀나 보다.
서둘러 기숙사로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선도부 회관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응?’
시선이 느껴져 돌아보니, 상상도 못 한 존재가 보였다.
순간적으로 내가 아직 정신 공격 이능에 당해 헛것을 보나 싶었다.
“…….”
선도부 회관 건물 앞.
백호군이 서 있었다.
나를 보던 백호군이 말했다.
“마중 나왔다, 조의신.”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