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다시 시작 (8)
백호군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도 모르게 다소 멍청하게 되묻고 말았다.
“왜……?”
“마중 나왔다고 말했다.”
멍청한 질문에 백호군이 친절히 답했다.
모처럼 성실하게 답해 줬지만, 안타깝게도 그걸 물은 게 아니다.
왜 여기에 있냐고 물은 게 아니라 왜 마중을 왔냐고 물은 건데.
“은광고 부지에 들어오셨으니 관계자일 텐데…….”
백호군과 초면인 성시완이 이상하게 여겼다.
성시완은 기숙사생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우고 있는 걸로 아는데, 설마 재학생과 교직원 모두의 얼굴을 외우고 있는 걸까.
한편, 백호군을 알아본 계이담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계이담은 눈치는 있는지 곧바로 분위기를 파악하고 성시완을 재촉했다.
“……출입증을 발부받은 손님일 수도 있습니다. 이만 들어가서 쉬죠.”
“음…….”
성시완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데도 망설였다.
묘한 타이밍에 등장한 낯선 이와 후배를 단둘이 남기는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전 얘기하고 천천히 들어갈게요.”
내가 그렇게 말한 후에야 성시완이 물러났다.
성시완과 계이담이 거주 구역 쪽으로 사라진 후.
말없이 나를 보던 백호군이 정문 쪽을 응시했다.
‘……아직 죽림에 갈 시간은 아니니까 저택으로 가자는 뜻인가?’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마중 나온 건 감격스러운 일이었지만, 아직 할 일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까지 마중 왔는데 모르는 척할 수도 없고.
갈등이 깊어졌다.
고민 끝에 말했다.
“약속한 시각은 아직인데.”
“…….”
백호군이 다시 나를 돌아봤다.
내가 호랑이 저택으로 갈 마음이 없다는 건 전해진 것 같은데, 백호군은 그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백호군이 품에 뭔가 들고 있잖아.’
백호군은 겉옷을 손에 들고 있었는데, 겉옷 밑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백호군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천천히 겉옷에 가려져 있던 내용물을 보여 줬다.
……그 안에는 새하얀 천사가 몸을 웅크리고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
“올무가 너를 기다리다가 잠들었다.”
기다리다가 잠들었다니!
그럼 방금 온 게 아니라 계속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이 추운 날에 대체 얼마나 기다리고 있던 걸까.
백호군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올무도 기다리고 있었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서두르는 거였는데……!
둘을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는 죄책감이 온몸을 지배했다.
“일어났을 때 네가 없으면 서운해하겠지.”
그 말을 들으니 더 망설일 겨를이 없었다.
나는 백호군의 겉옷을 다시 올무 위에 덮어 주며 말했다.
“가자.”
천사를 더 이상 밖에서 재울 수 없었다.
서둘러 호랑이 저택으로 가고 싶었지만, 너무 급히 가면 잠든 천사가 깰지도 모르니 주의 깊게 이동해야 했다.
내가 그 점을 피력하자 백호군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서 하얀 이능파가 흘러나오는 게, 이능파로 감싸 정중히 천사를 옮기는 것 같았다.
역시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배려심은 남다르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칭찬했다.
올무가 깰까 봐 한참을 노심초사하다가 호랑이 저택에 도착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호랑이 저택의 한옥 별채 안방, 비단 금침에 올무와 함께 누워 있었다.
안방에 도착하자마자 백호군이 나에게 올무를 안겨 줬는데, 잠시 천사의 온기에 넋이 나갔었다.
평소에는 입으로 천사를 칭송하면 그나마 말을 잇기 위해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천사를 깨울까 봐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온돌 난방 덕에 방은 따뜻했고, 침구는 부드러웠고, 내 품의 천사는 완벽했다.
아니, 잠깐…… 방금 전까지는 왜 이렇게 된 건지 생각하고 있지 않았나?
“이만 자라.”
“……?”
“시간이 되면 깨우러 오겠다.”
달칵.
백호군이 밖에서 장지문을 조용히 닫았다.
그 소리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천사를 바래다주고 올무가 일어난 걸 보고 나는 다시 기숙사로 가려고 하지 않았나? 그게 안 되면 이번에 얻은 정보에 관해서 호랑이들과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올무를 깨우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몸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머리가 멍하고 몸도 무거운 게 피로가 전신을 짓누르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무리해서 일어나도 제대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백호군이 나중에 깨우러 온다고 했으니까…… 조금만 쉴까?’
내 사고는 드문드문 끊겼다.
몸은 쉬더라도 머릿속으로 사고를 하려고 했는데 좀처럼 생각이 이어지지 않았다.
결국 눈을 감은 지 얼마 안 되어 꿈 없이 잠들고 말았다.
* * *
조의신이 잠든 방의 장지문 앞.
막 한옥으로 들어선 은호가 백호를 보고 말을 붙였다.
“백호 형님, 다녀오셨어요?”
“…….”
“이동 중에 흔적을 남기지 않게 주의했어요. 황호 님도 확인해 주셨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백호는 열여섯의 모습을 한 은호를 가만히 바라봤다.
은호는 이제 은광고 입학 전형을 앞두고 천동하의 동생, ‘천은하’로서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역용술로 다듬은 얼굴은 은호라기보다는 천성헌, 천은하의 것에 가까웠다.
“의신이 형은 주무시나요? 제가 한 조언이 도움이 되었나 보네요.”
백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은호가 생긋 웃었다.
은호는 늦은 시각에 조의신을 마중하러 간다면 신수를 데리고 가고, 본채나 은호가 머무는 별채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갈 것을 권했다.
호족들이 있는 곳으로 가면 인사를 하고, 일 얘기를 하느라 조의신이 쉬지 못할 것 같다는 게 은호의 의견이었다.
백호는 그 제안을 받아들여 무사히 조의신을 데리고 오는 데에 성공했다.
“차를 드시던 중에 갑자기 학교로 가신다고 하실 때는 놀랐어요.”
“…….”
“의신이 형은 오자마자 저렇게 주무시고…… 백호 형님께서는 의신이 형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아는 것처럼 행동하셨죠.”
백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은호는 백호가 대답을 하지 않으리라는 걸 알고 있는 듯,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말했다.
“예전에 백호 형님과 체스를 뒀을 때, 저는 백호 형님의 대국 스타일이 의신이 형과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은호는 조의신이 잠들어 있는 장지문 쪽을 응시했다.
은호는 조의신을 이기지 못하더라도, 스테일메이트리스에게 스테일메이트를 따낸 체스 기사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조의신의 수를 연구하고, 스테일메이트를 유도하기 위한 수를 고안해 냈다.
하지만 백호는 은호의 수를 철저히 분쇄했다.
스테일메이트를 시도하려 들자 용서 없이 판을 박살 내려는 게 마치 스테일메이트리스를 눈앞에 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지.’
은호는 조의신과 백호에게 같은 질문을 했던 걸 떠올렸다.
천성헌 시절, 은호는 조의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형은 스테일메이트 싫어해요?
―어, 싫어.
조의신은 망설임 없이 스테일메이트가 싫다고 했다.
백호가 망설이다가 정반대의 답변을 한 것과 달랐다.
―백호 형님도 스테일메이트를 싫어하시나요?
―······아니, 싫어하지는 않는다.
거기에 더해 백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다만, 막을 수 있다면 막을 것이다.
은호는 백호가 한 말의 의미를 계속 생각해 봤지만, 아직 명확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저 근거 없는 추측만 머릿속에서 거듭할 뿐이었다.
은호는 무겁게 입을 다문 백호를 보다가 말했다.
“황호 님께서는 제가 의신이 형의 행동 패턴을 추측해 내서 백호 형님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한밤중에 갑자기 백호가 학교로 향한 걸 두고 황호가 이상하게 생각할 상황이었다.
하지만 저택을 나서기 직전에 백호가 은호의 별채에 있었던 탓에 황호가 그런 추측을 한 것 같았다.
황호를 속이는 기분이 든 탓일까, 백호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저는 백호 형님을 믿어요. 아직 말할 수 없거나, 말할 필요가 없어서 무언가를 숨기고 계신 거겠죠.”
은호는 조금 어둡게 변한 백호의 얼굴을 관찰하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니 말해 주실 때까지 기다릴게요.”
비록 역용술을 사용한 탓에 은호는 달라진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여전히 백호의 동생다웠다.
* * *
천천히 의식이 돌아왔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난 건지 다소 몽롱했다.
‘여기는…….’
주변이 낯설었다.
산을 뛰노는 범이 그려진 나전칠기장과 불이 꺼져 있는 호롱불을 멍하니 보며 눈을 깜빡였다.
왜 내가 기숙사방에 있지 않은 건지 생각하다가 뒤늦게 기억들이 떠올랐다.
나를 기다리다가 밖에서 잠든 나의 천사를, 백호군과 함께 저택에 바래다줬다.
왕왕!
내가 눈을 뜬 걸 알아챈 천사가 반갑게 인사했다.
설마 천사가 또 나를 기다린 건가?
주변이 어두운 걸 보니 내가 한참 잔 것 같은데!
“올무야, 잘 잤어? 또 기다려 준 거야?”
왕!
세상에, 천사를 이렇게나 기다리게 하다니.
나는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은 이부자리에서 푹 잔 덕에 몸이 매우 가벼웠다.
천사는 몸을 일으킨 나를 보며 한쪽에 반듯하게 개켜진 옷 쪽으로 달려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새 옷도 준비해 준 건가?’
예고 없이 쳐들어와 자고, 새 옷까지 받아 가게 생겼다.
면목 없지만 기껏 준비해 줬는데 흐트러진 차림으로 나가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몸단장을 하고 나섰다.
장지문을 열자 문 근처에 서 있던 백호군이 보였다.
‘혹시 약속 시각까지 계속 기다리다가 깨워 줄 생각이었던 건가!’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알람 시계로 써먹은 건가!
제발 내 예상이 어긋났으면.
죄책감에 젖어 백호군의 뒤를 따라 대청으로 걸어 나가자 차향이 물씬 풍겼다.
대청에서 호랑이들이 차를 마시고 있었다.
“조의신, 잘 잤나?”
내게 제일 먼저 말을 건 호랑이는 황지호였다.
‘……일요일인데 교복을 입고 있네.’
해가 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일요일이다.
황지호 저 노친네는 이번 휴일에도 고등학생 흉내를 충실하게 낼 예정인가 보다.
교복을 입은 황지호를 보니 옛 한국 지부장이 구현한 피로 물든 1학년 0반 교실이 떠올랐다.
……저렇게 교복을 좋아라 하는 노친네가 교복을 놔두고 어디로 간 건지 모르겠다.
“……아직 피곤한가? 시간은 있으니 더 쉬고 와도 좋다.”
“의신이 형, 목이 마르지는 않나요? 차 한 잔 드시고 주무실래요?”
황지호에 이어 내게 말을 건 건, 16세의 모습을 한 은호였다.
그냥 16세의 모습이 아니라 천성헌…… 아니, 천은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내가 딱딱히 굳어 있자 은호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 중학교 졸업 학력 검정 고시를 치렀어요.”
“오늘?”
“네, 예정보다 조금 일찍 눈을 뜨는 걸로 해 뒀어요. 요새 동하 형네 집안이 조금 복잡해서 미리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은호의 은광고 입학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나 보다.
내가 뻔뻔하게 호랑이 저택에서 자는 사이에 천동하와 은호는 바쁘게 움직였구나.
미리 알았다면 응원 메시지와 선물을 준비했을 텐데.
내가 선물을 안 해도 은호는 시험을 잘 치를 테고, 호랑이들이 잘 챙겨 주겠지만.
“시험 보느라 고생했어. 은광고 필기시험 때에는 선물 준비할게.”
“고마워요, 의신이 형. 모처럼 응원해 주셨으니 좋은 결과를 낼게요.”
은호는 그렇게 답하며 웃었는데, 어쩐지 의욕에 차 보였다.
은호가 말한 좋은 결과는 어느 정도 수준을 의미하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나치게 좋은 결과를 낼 것 같아 걱정이었다.
“조의신은 더 쉴 생각이 없어 보이니 준비해야겠군.”
이 광경을 보던 황지호가 툭 내뱉었다.
죽림에 갈 준비를 하는 건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황지호가 손을 뻗어 제지했다.
그러고는 내가 줄곧 외면하고, 잊고 싶었던 것을 내밀었다.
섬뜩한 기분에 숨을 들이켰다.
“오늘 분 영약이다, 조의신. 이 몸이 직접 끓여 주마.”
황지호의 앞에 약탕기가 놓여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