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티끌 (3)
동굴 저편은 한 치의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웠다.
호랑이들은 안광 스킬을 발동시킨 건지 눈을 번뜩이며 그 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도 뒤따라 안광 스킬을 사용하려던 순간, 코끝에 비릿한 철 냄새가 스쳤다.
‘……피 냄새가 나.’
아직 안광 스킬을 발동시키기 전인데, 피에 절여진 웅족이, 아니, 피칠갑이 된 동굴 내부가 눈에 선했다.
피 냄새 때문에 머리가 붉게 물드는 것 같아 서둘러 안광 스킬을 발동시켰다.
〈스킬 ‘안광’이 발동했습니다.〉
이능파가 안구를 덮는 감각과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어둠에 묻혀 있던 동굴 안이 들어왔다.
후각으로 먼저 느낀 대로 동굴 안은 바닥도, 천정도, 벽도 전부 피로 흥건하게 물들어 있었다.
시간을 오래 들여서 천천히 핏자국을 새긴 걸까.
피가 스며들었을 때의 시간이 다른 건지, 얼룩의 색은 조금씩 달랐다.
호랑이들은 동굴 안에 있는 웅족의 존재에 불쾌하긴 해도 피범벅인 동굴의 상황엔 별 감흥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웅족의 피만 있는 게 아닌 것 같은데.”
황지호가 동굴을 둘러보다가 말했다.
노친네는 대체 어떻게 피를 구분한 걸까?
연륜이 쌓이면 그런 것도 보이나 보다.
“부끄럽게도 흥분한 나머지 웃다가 피를 토하는 바람에…….”
“후후후, 저도 같이 토했답니다.”
흰 가면을 쓴 호족 부부가 쑥스러워하며 웃었다.
호족 부부는 웃었지만 듣고 있는 입장에선 웃음이 안 나왔다.
자식을 잃은 부부가 복수를 하며 웃다가 피를 토하는 모습을 떠올리고 어떻게 웃을 수 있을까.
황지호가 가만히 웃는 부부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몸이 성해야 복수도 하지 않겠느냐. 앞으로는 심신을 잘 다스려라.”
“네, 오래 살아서 더러운 웅족에게 지옥을 보여 줘야죠.”
“그럼요, 새겨듣겠습니다.”
부부가 정말 황지호의 말을 새겨들었으면 좋겠다.
동굴 깊숙한 곳으로 향할수록 피 냄새가 진해졌다.
동굴 가장 안쪽, 막다른 길.
후각이 마비될 정도로 강렬한 피 냄새의 근원이 보였다.
웅족이 있었다.
웅족은 이쪽으로 접근하는 호랑이들을 알아챈 것 같았다.
그러나 허우적거리며 꿈틀거리기만 할 뿐, 웅족은 일어서지도 못했다.
‘……대나무 창이다!’
웅족은 대나무 창에 꿰뚫려 있었다.
결계의 중심, 웅족은 대나무 창으로 고정되어 있었고, 눈과 귀가 대나뭇잎으로 가려져 있었다.
물어보지 않아도 죽호의 작품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죽호는 겉보기에는 온화하고 상쾌한 인상의 청년이었으나 그도 결국 호족이었다.
호족의 수석 주술사다운 면모를 조금 엿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오늘은 호족의 은인께서 오시니 눈과 귀를 가려 뒀습니다.”
“잘했다.”
황지호의 칭찬 한마디에 죽호가 기쁨을 감추지 않았다.
핏덩어리를 앞에 두고 훈훈한 분위기가 흘렀다.
칭찬을 받아 기분이 좋아진 죽호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준비가 되면 시간 왜곡의 결계를 발동시키겠습니다.”
죽호가 가리킨 결계의 경계를 넘어간 건 고문을 시행할 김신록, 가까이에서 고문을 참관하겠다는 호족 부부 셋이었다.
김신록은 버둥거리는 웅족을 향해 걸어갈수록 얼굴에서 인간미가 점점 사라졌다.
은영관 지하에서 처음 김신록의 정체를 알았을 때,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평소 학교에서도 저런 얼굴을 했다면 누구나 김신록이 인간이 아니란 걸 알아챘을 거다.
“대나뭇잎을 떼도 되겠습니까?”
“고문에 필요한 건가요?”
“네. 악몽에서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제 얼굴을 보게 해야 하니까요. 의사소통도 잘 돼야 고문이 수월해집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결계를 발동시킨 후, 잎을 제거하겠습니다.”
죽호는 조금 망설이다가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두루마기 자락이 호선을 그리며 허공에 청죽의 빛줄기를 남겼다.
파아앗!
죽호가 뿌리는 빛이 늘어날 때마다 결계에서 대나무들이 뻗어 나와 성장했다.
푸른 빛을 머금은 대나무들은 하나같이 투명하여 결계 밖에선 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 않는 구조로군. 꽤 신경 썼구나.”
“아직 황호 님에 비하면 멀었습니다.”
죽호는 겸손하게 말했으나 황지호의 칭찬을 듣자 결계로 만든 대나무숲이 한층 울창해졌다.
죽호는 제 감정을 잘 못 숨기는 타입인 것 같았다.
이윽고 피로 물든 동굴 안이 대나무숲 덕에 청량한 공기로 가득 찼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대나뭇잎을 치우겠습니다.”
어느 사이엔가 죽호의 손가락 사이에 대나뭇잎 몇 개가 들려 있었다.
죽호가 그 대나뭇잎을 향해 ‘후’ 하고 입김을 불자, 웅족의 눈과 귀를 막고 있던 잎이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다.
여전히 웅족의 몸을 꿰뚫은 대나무 창 때문에 몸의 거동은 부자유스러웠지만, 시야가 트이자 목을 이리저리 돌려 대기 시작했다.
웅족은 김신록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웅녀……?”
그 말에 동굴 전체가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조용해졌다.
웅족이 김신록의 얼굴에서 웅녀의 흔적을 찾아냈나 보다.
오랜 기간 피를 흘리며 제정신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는데, 쓸데없이 저런 걸 알아보다니.
정적 속에서 웅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웅녀의 자식이군. 아직도 살아 있었…… 커억!”
콰득!
비웃음 섞인 말이 끝나기 전에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호족 부부가 웅족의 목을 짓밟았다.
웅족은 비명을 지르지 않았으나 숨이 막히고 고통스러운지 컥컥대며 버둥거렸다.
웅족은 자신의 목을 밟은 호족 부부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잘도, 웅족의 후예 편을…… 크어억!”
웅족의 말은 중간에 끊겼지만 웅족이 호족 부부에게 무슨 개소리를 하려 했는지는 짐작이 갔다.
웅족에게서 후예를 잃은 주제에, 왜 웅족의 후예이기도 한 김신록을 편드는 듯한 짓을 하는 것인가.
웅족은 저런 말로 빈정거리려 했을 거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한 게 아닌지, 백호군과 황지호가 그 목을 밟고 싶은 듯 굳은 얼굴로 결계 너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와 대조적으로 김신록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호족 부부와 대면했을 때는 그렇게 흔들렸는데.’
김신록은 호족의 말과 태도에는 상처받아도 웅족한테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가족 같은 이들, 쓰레기와 다름없는 존재.
김신록은 둘 중 전자 쪽에 더 마음을 쏟는 타입인가 보다.
김신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담담하게 웅족에게 고했다.
“나는 너를 고문할 호족의 후예다.”
휘이이…….
김신록은 그 말을 마치고 봉인된 상태의 봉투를 열었다.
그러자 악몽의 티끌이 죽호의 청죽색의 이능파가 가득한 결계 안으로 퍼졌다.
검붉은 티끌은 공기 중으로 퍼지려다 김신록의 유도로 웅족의 피부로 슬금슬금 뻗어 나갔다.
웅족은 그 티끌이 몸에 닿는 순간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거세게 버둥거리며 발광했다.
웅족은 자식을 잃은 부부의 분노보다 저 악몽의 티끌을 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악! 이거 놔, 놔아아아! 치워! 치우라고!”
웅족이 온 힘을 다해 몸을 뒤틀어 봤자 몸에 꽂힌 대나무 창에 피가 더 묻어 나올 뿐.
결국 모든 티끌은 웅족에게 스며들었다.
티끌이 흘러나온 순간부터 한발 물러나 있던 호족 부부가 안광을 발동시켜 하나하나 빠짐없이 지켜보며 즐겼다.
“이제부터 결계 안의 시간과 밖의 시간의 흐름이 다르게 느껴질 겁니다.”
죽호가 결계의 출력을 올리자 대나뭇잎이 ‘솨아아’ 하고 흔들리는 소리가 울렸다.
척 보기엔 결계 안과 밖은 별로 다를 바가 없었지만, 이능파의 흐름이 확연히 다르게 흐르는 게 느껴졌다.
악몽의 티끌에 잠식된 웅족은 3~4분에 한 번 꼴로 잠들었다 일어나길 반복했다.
웅족은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경악과 공포로 이지를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마다 김신록은 질문을 하나 던졌고, 답하지 않으면 이능파를 흘려 웅족을 다시 악몽 속에 밀어 넣었다.
“생각보다 빨리 끝날 것 같군요. 허세를 부리긴 했지만, 상당히 긴 기간 사냥당했으니 정신이 한계에 다다랐겠죠.”
김신록의 말에 그동안 웅족을 상대로 ‘사냥’을 행한 호족 부부가 몹시 뿌듯해했다.
김신록의 말대로 웅족은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몇 시간 정도가 흘렀을 때.
웅족은 땀과 눈물을 비 오듯 흘렸는데 그 탓에 피가 씻겨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
“흐윽…… 흑…….”
웅족은 엉엉 울다가 눈을 떴다.
눈을 떴을 때, 김신록이 보이자 웅족은 정신없이 김신록 쪽으로 기어가려고 했다.
웅족은 마치 도움을 요청하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나무 창에 꿰뚫린 몸뚱어리를 끌고 가는 건 불가능했다.
땅바닥을 긁으며 기어가느라 손톱이 상하기만 했다.
‘……대체 어떤 악몽을 꿨기에 저렇게 변하는 거지?’
악몽의 티끌도, 그 악몽의 티끌을 다루는 김신록도 굉장했다.
죽호는 악몽의 티끌을 두고 열변과 감탄을 토했는데, 결계를 제어해야 하는 입장이 아니면 당장 안에 들어갈 기세였다.
“다시 묻지. 이번에 답하지 않으면 다음 질문은 다섯 번의 악몽이 더 지난 후에 던질 거다.”
김신록은 넋이 나간 웅족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말했다.
웅족은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크게 움찔거렸다.
김신록은 묻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않으면, ‘다음 기회’를 바로 주지 않았다.
‘한 번의 악몽이 지난 후에 다시 묻겠다’라는 말은 세 번, 네 번의 악몽이 지나가도 지켜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말을 바꾸는 김신록을 두고 웅족이 울분을 표출했지만, 이쪽이 주도권을 잡는 한 그런 발악은 아무 소용 없었다.
‘오히려 아직 발악할 기운이 남아 있다고 판단하고 더 몰아붙였지.’
김신록이 제대로 약속을 지켜 주는 건 오로지 웅족이 제대로 답변을 했을 때뿐이었다.
게다가 김신록은 아직 이번 고문으로 알아내고자 하는 정보에 관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김신록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들에 관해서만 질문하고 있어. 상대가 얼마나 순종적으로 변했는지 확인할 겸, 진짜 이쪽에서 원하는 정보를 숨기기 위해 심리전을 펼치는 거겠지.’
김신록을 ‘절대 개겨서는 안 될 교사’라고 판단한 내 감은 틀리지 않았다.
김신록의 능력은 악몽의 티끌이라는 사기 아이템을 제어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다.
교묘한 심리 트릭을 자유자재로 쓰는 게 김신록의 고문 능력의 핵심일 것 같았다.
“너는 웅족의 수장이 아닌 자의 명령으로도 움직였다. 직접 얼굴도 봤지. 그자에 관해 말해.”
김신록은 다른 웅족을 고문한 결과, 어느 정보를 잡았다.
웅족의 수장과 동급이거나 그 위에 해당하는 누군가가 웅족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누군가를 직접 만난 건 지금 고문당하고 있는 저 웅족이었다.
‘흑막일 가능성이 커. 만약 저 웅족이 본 게 그 흑막이라면…….’
흑막의 정체를 잡는 단서가 될 거다.
모두가 웅족이 입을 여는 순간을 기다렸다.
“그분은…… 아니, 그분들은…….”
그분들?
설마 흑막은 한 명이 아닌 건가!
아니, 어쩌면 저 웅족이 만난 건 흑막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을 때, 웅족의 입이 열렸다.
“……바람과 비를 다루는 쌍둥이입니다.”
하늘이 열렸던 신화시대.
신인은 날씨를 관장하던 세 관리와 함께 땅으로 내려왔다.
이들은 먼 옛날 전사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플마고의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속에서 적호는 이들이 눈을 내렸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흑막의 존재와 그 밑에서 움직이는 자들의 정체는 거의 밝혀지지 않은 채로 플마고는 엔딩을 맞이했다.
‘흑막 곁에 있던 그 쌍둥이들은 풍백과 우사였구나.’
흑막의 정체는 여전히 불분명했지만, 그 밑에 있는 쌍둥이가 풍백과 우사인 건 확실해졌다.
황지호와 나눈 대화와 플마고 속 전개를 통해 짐작하긴 했지만.
‘여기에서 정보를 더 캐려면…… 적호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일단 황명호 대저택으로 가서 얘기를 해 볼까.’
김신록이 더미로 준비한 질문을 몇 개 더 던진 후, 고문은 마무리되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지. 수고했다, 김신록, 죽호.”
“……네.”
황지호가 자리를 수습하긴 했지만 호랑이들은 기운이 없어 보였다.
죽림을 떠나 다시 황명호 대저택으로 향하는 사이, 모두가 침묵했다.
호랑이들은 옛 전우 생각에 혼란스러워했고 나는 나대로 생각에 잠겨 있느라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황명호 대저택은…… 전쟁 중이었다.
파지지직! 펑!
은호가 머무는 별채 현관에 붉은 벼락이 내리쳤다.
벼락은 은빛의 결계와 상쇄되어 지워졌지만, 스파크가 여기저기로 튀는 바람에 별채 곳곳이 그을렸다.
적호가 은호의 별채를 향해 벼락을 날려 대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