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티끌 (4)
몇 시간 전, 황명호 대저택의 한옥 별채.
“답은 충분한가요?”
은호가 어느 사이엔가 눈에 어려 있던 감정을 지우고 말했다.
적호는 다정한 목소리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가 고개를 저었다.
“……은호, 당신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겠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게 있습니다.”
“말씀하세요.”
적호가 던진 질문은 세 개였다.
첫째, 후예가 그립지는 않은가?
둘째, 어째서 후예의 존재를 숨겼는가?
이 두 개의 의문은 은호가 비밀을 밝힘으로써 해결되었다.
하지만 세 번째 의문은 해결되지 않았다.
적호는 그 의문을 입에 담았다.
“왜 당신은 손주들을 만나려 하지 않습니까?”
은호의 손주들은 지금 이 저택의 본채에 있다.
은호가 원한다면 저택 내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안전하게 손주들과 만날 수 있다.
지금 그들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는 건 오로지 은호의 의사 탓이었다.
“이제 당신은 호족의 수장이 아닙니다. 게다가 당신의 딸은 이미 세상을 떠났죠. 그러니 당신이 읽었던 천기와 미래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네, 그만한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결과죠.”
은호의 목소리에는 후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딸이 세상을 떠났다는 말에는 괴로워 보였으나, 같은 상황이 주어지면 은호는 주저 없이 똑같은 선택을 할 것 같았다.
은호는 후예를 위해 다시 희생할 각오를 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적호의 의문이 더더욱 깊어졌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의 손주들을 만나도 별문제가 없지 않겠습니까?”
은호는 의문을 표하는 적호를 바라보기만 할 뿐, 바로 답하지 않고 뜸을 들이다 말했다.
“이유가 무엇이든, 저는 제 아이를 버렸어요. 제가 무슨 낯으로 손주를 만나겠어요?”
“은호…….”
“계속 피해 다니는 건 어렵겠죠. 어차피 은광고에서 마주칠 테니까요.”
“그렇다면 입학한 이후에 아이들과 이야기할 생각이십니까?”
적호는 은호와 그의 손주를 만나게 하고 싶은 것 같았다.
아들을 끔찍하게 여기는 적호가 왜 저런 태도를 보이는지, 무엇을 의도하고 저런 말을 하는지 은호는 잘 알았다.
하지만 은호는 후예들과 만날 생각이 없었다.
“말을 섞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하겠죠. 하지만 제가 그 아이들의 조부라는 걸 밝히진 않을 거예요.”
“그러면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적호가 목소리를 높였다.
여전히 사용하는 단어는 정중했으나 적호의 격앙된 감정이 고스란히 은호에게 전해졌다.
“저는 제 아들과 화해하지 않았다면 죽어서도 후회했을 겁니다. 당신과 서호, 이호, 재호가 같은 일을 겪게 할 수는 없습니다.”
“적호 님과 저는 달라요. 같은 일을 겪는다고 할 수는 없어요.”
“네,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전 당신을 알고, 후예들에 관해 잘 압니다.”
은호가 반박하기 전에 적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적호는 자신이 은호를 말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적호는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지금 아이들을 만나러 갑시다. 아직 깨어 있을 겁니다.”
적호는 당장이라도 은호를 끌고 본채로 갈 기세였다.
은호는 그 모습에 먼 옛날 적호가 자신을 찾아와 호신총을 부순 죄를 고했던 순간을 떠올렸다.
은호는 당시 천기를 어긴 대가로 나날이 쇠약해져 억지로 황호에게 임시 수장직을 맡기고 요양 중이었다.
적호의 죄를 들은 은호는 아들을 살리고 싶다면 이 일을 밝히기 전에 웅족의 머리를 쳐 내라고 조언했다.
적호는 그 말을 듣기 무섭게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웅족의 수뇌부로 향했다.
지금 적호는 그때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적호 님은 긴 기간 죄를 짊어지고, 아드님과 엇갈리며 성정이 많이 변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적호가 은호를 이해하고 모든 걸 덮어 주리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적호는 젊은 시절의 불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이 반갑기도 하면서도 당혹스러웠다.
‘내가 잠든 사이에 있던 일들이, 적호 님께 대체 어떤 변화를 일으킨 걸까.’
은호의 속을 읽은 것처럼 적호가 시원시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날, 조의신은 저와 제 아들 앞에서 동의 없이 아들의 행적을 폭로했습니다. 그 덕에 저는 아들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습니다.”
은호는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조의신이 둘의 화해에 개입했다고는 들었으나 그런 방법을 썼을 줄은 몰랐다.
호족과 후예 앞에서 비밀을 폭로하는 건 나름의 각오를 해야 했을 텐데, 역시 자신이 존경하는 선배답다고 생각했다.
적호가 지금 그 존경하는 선배 때문에 폭주하는 것 같긴 했지만.
“누군가는 조의신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 제가 당신을 힘으로 끌고 가겠습니다.”
잠시 속으로 조의신의 칭찬을 하던 은호가 힘으로 끌고 간다는 말에 정신을 차렸다.
‘힘으로 부딪치면 적호 님을 이길 수 없어.’
적호가 전설계로 격하되었다고 한들, 최전선에서 싸웠던 전사라는 건 변함이 없었다.
반면에 은호의 광림은 전투용이 아니었고 스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계술을 조금, 치유계 스킬을 조금 쓸 줄 알 뿐, 전투에는 잘 맞지 않았다.
호족들을 전투력 순으로 줄 세운다면 은호는 단연 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것이다.
결국, 은호는 다른 수를 쓰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적호님. 그 아이들을 만나 보겠습니다.”
“은호, 잘 생각했습니다! 당장 갑시다.”
적호가 몹시 기뻐하며 은호를 업고 뛸 기세로 말했다.
은호는 부드럽게 미소 짓고는 적호를 진정시켰다.
“저는 지금 16세의 천은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 아이들을 만난다면 본모습으로 외양을 되돌리고, 성년의 모습을 하고, 의복도 바꾸는 게 좋겠죠.”
“그 아이들은 당신이 어떤 모습이든 기뻐할 것 같습니다만.”
“아이들의 마음을 생각하셔야죠.”
은서호와 은이호는 현재 16세.
진족이 아무리 겉으로 보이는 나이에 둔감하다고 하나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가 같은 나이의 모습이라면 미묘할 것이다.
적호는 한시라도 빨리 은호와 후예들을 만나게 하고 싶었으나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제가 머무는 별채에 들러 몸단장을 하겠습니다.”
한옥 별채를 나와 은호가 머무는 별채로 향했다.
현대식 별채 앞, 은호가 같이 따라 들어오려는 적호를 제지했다.
“적호 님, 미로 정원 이동용 셔틀을 대기시켜 주시겠어요?”
“알겠습니다.”
적호는 별 의심 없이 그렇게 행동했다.
그리고 은호가 별채 안으로 들어간 순간.
철컥, 철컥철컥.
위이잉……!
기계음이 크게 울려 등을 돌리니, 별채가 폐쇄되기 시작했다.
최신 보안 기술을 갖춘 현대식 별채의 문이 모두 잠기고, 창문 위로 견고한 덧창이 내려오기 시작했다.
적호는 멍청한 얼굴로 폐쇄되는 별채를 응시하다가 외쳤다.
“은호! 이게 무슨 짓입니까!”
[보면 모르세요?]
목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을 정도로 철저하게 폐쇄가 된 바람에 은호는 통신 장비를 통해 답했다.
그야 보면 알았지만, 어처구니가 없는 상황이었다.
적호는 노발대발하며 말했다.
“제 말에 알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이들을 보러 가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적호 님의 뜻을 이해했다는 뜻으로 그리 말한 겁니다. 아이들은 만나겠죠. 언젠가는요.]
은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적호가 속았다는 걸 알고도 모른 척한 것은 분명했다.
“이깟 현관문, 제 힘으로 부수겠습니다!”
분노에 찬 적호가 이능파를 끌어올려 붉은 벼락을 현관을 향해 쏘았다.
파지지직! 파앗!
그러나 붉은 벼락은 황금과 은의 결계에 가로막혀 상쇄되었다.
은호의 안위를 걱정한 황호가 그가 머무는 별채에 미리 방비를 해 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이능파의 빛깔을 보니 황호의 결계에 은호가 세공을 더한 게 분명했다.
‘차라리 본채에 가서 후예들을 데리고 나올까? 아니, 그런 짓을 하면 데리러 간 사이에 은호가 밖으로 달아나겠지. 디바이스로 불러낼까? 하지만 별채 내에 비밀 탈출구가 존재할지도 모르고…….’
적호의 머리가 복잡하게 돌아갔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은호는 카메라를 통해 적호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다.
그에 반해 적호는 은호의 모습을 확인할 수 없었다.
‘은호가 위험을 감수하고 밖으로 나갈지도 모른다. 그건 안 돼!’
적호는 고민하다가 협박하듯 말했다.
“이렇게 제가 적뢰로 공격하면 본채에 있는 후예들이 알아차릴 겁니다!”
[본채는 황호 님이 만드신 미로 정원 안에 있지요. 외부의 소란 따위는 전해지지 않을 거예요.]
분하지만 은호의 말이 맞았다.
미로 정원과 황금 담장은 황호가 만든 최강의 결계로, 저택 안과 밖, 별채와 본채 사이를 차단하는 완벽한 벽이었다.
적호는 결국 처음 썼던 수단을 쓰기로 했다.
“어쩔 수 없군요. 별채를 부수겠습니다!”
파지지지직!
다시 붉은 벼락이 저택에 내리쳐 은호가 부른 결계와 부딪쳤다.
* * *
어제와 오늘, 많은 일이 있었다.
밤을 지새워 옛 한국 지부장이 준비한 환상을 공략하고, 아침에 나를 기다리던 백호군과 천사를 만났다.
그러다가 호랑이 저택에서 자고 일어나 사약맛 영약을 마시고 호족의 가든으로 향했다.
호족의 가든에서 몇 시간에 걸친 고문극을 감상한 후에는 풍백과 우사의 존재에 관해 들었다.
모든 일이 다소 현실감이 없었지만, 지금 이 상황이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내가 헛것을 보고 있나?’
황지호는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고, 김신록은 눈을 깜빡이며 적뢰를 부르는 적호를 응시하고 있었다.
백호군은 은호의 별채를 응시하며 동생의 안부를 걱정하는 것 같았으나, 은빛의 결계가 건재한 걸 보고 마음을 놓았다.
호랑이들의 반응을 보니 같은 걸 보고 있는 듯했다.
“……적호, 뭐 하는 거냐.”
황지호의 질문에 적호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황호, 잘 왔습니다. 빨리 저 거슬리는 결계를 치워 주십시오.”
“얘기를 들어 볼 테니 적뢰를 뿌리는 걸 멈춰라. 지금 나는 친우들이 싸우는 걸 보고 싶지 않다.”
황지호가 현관 앞에 설치된 카메라 렌즈를 올려다봤다.
“은호, 무슨 일이 있었지?”
[적호 님이 제 신체의 자유를 위협하고 있어요.]
“그건 보면 안다. 일단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지.”
[…….]
은호는 망설이는 것 같았다.
적호의 기세가 워낙 험악해서 걱정하는 건가?
아니면 혹시 황지호가 적호 편을 들까 봐?
무슨 일이 있는 건지 알 수 없으니 판단하기 어려웠다.
“은호, 문을 열어도 된다.”
[……백호 형님?]
“내가 있는 한, 적호나 황호가 너를 어찌할 수 없다.”
백호군의 목소리는 서늘했는데, 같이 듣는 나도 덩달아 안심되었다.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이 과연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웠다.
적호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지만.
“동생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감쌀 생각이십니까?”
아들이라는 이유로 김신록을 무조건 감싸는 적호가 할 소리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지금 김신록이 옆에서 적호가 하는 걸 다 보고 있는데 저래도 괜찮나?
김신록은 지금 반응이 전혀 없는데, 아마 자신이 헛것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는 중인 것 같다.
호랑이들이 가족을 아끼는 건 잘 알겠다.
철컥.
철컥, 철컥.
은호는 백호군을 믿기로 한 건지 문을 열기 시작했다.
폐쇄된 별채가 개방되는 사이, 은호가 덧붙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제 형들을 계속 밖에 세워 둘 수는 없죠.]
이윽고 문이 열려 은호가 모습을 드러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