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티끌 (5)
“어서 오세요. 인사가 늦어 죄송해요.”
예의 바르게 인사하는 은호를 보자 울컥한 적호가 달려들었다.
적호가 은호에게 도달하기 전, 그 앞을 백호군이 가로막고 황지호가 적호에게 말을 걸었다.
“적호, 김신록이 이 자리에 있는 걸 잊었나?”
황지호의 말에 적호가 급히 멈춰 섰다.
김신록은 붉은 번개를 목격한 이후로 미동도 하지 않았다.
김신록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멋있고 진중하며 영웅인 아버지의 모습과 친구와 싸우는 철없는 호랑이의 모습이 충돌하는 모양이다.
적호가 고장 난 것처럼 가만히 있는 김신록에게 다정히 말을 걸었다.
“아들아, 바람이 차다. 안으로 들어가자.”
“……아, 잠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많이 피곤한 모양이구나. 수석 주술사의 결계 안은 체력과 심력 소모가 크다고 들었다.”
아들을 걱정하는 말에 김신록이 정신을 차렸다.
김신록은 지금까지 자신이 피곤해서 헛것을 봤다고 결론지은 것 같았다.
적호 부자의 단란한 모습을 지켜보던 은호가 씁쓸한 표정으로 웃었다.
“두 분은 정말 사이가 좋으시군요.”
“부러우시면 본채에 가서 후예를 만나십시오.”
“저는 아직 그 아이들을 만날 생각이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둘이 왜 싸웠는지 알 것 같았다.
우리가 자리를 비운 사이, 두 호랑이들은 은호가 후예를 만나는 문제로 의견이 갈린 거다.
나만 눈치챈 건 아닌지 황지호가 관자놀이를 누르고, 백호군이 은호를 가만히 응시했다.
‘싸움이 더 커지기 전에 저택에 도착해서 다행이다.’
은호의 별채 안.
적뢰를 뒤집어썼지만, 별채 내부는 멀쩡했다.
응접실 안으로 이동하는 동안 건물 안을 살펴봐도 눈에 띄는 이상은 없었다.
적호의 적뢰로 뚫을 수 없을 만큼 건물이 견고하고 결계술의 수준도 뛰어난 덕인 것 같았다.
“은호가 깨어난 직후, 후예를 만나지 않겠다고 의사 표현을 했고 우리는 은호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응접실의 상석에 앉은 황지호가 제 바로 옆에 앉힌 적호를 보며 말했다.
“왜 갑자기 은호와 후예를 만나게 하려고 한 거지?”
“그건…….”
벼락을 꽂은 것처럼 거침없이 답할 줄 알았는데, 적호는 망설였다.
적호는 한참을 입을 열 듯 말 듯 하다가 은호를 보고는 결국 입을 다물었다.
황지호는 적호를 추궁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은호에게 물었다.
“은호, 할 말이 있나?”
모두에게 차를 대접하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찻잔에 차를 따르던 은호가 손을 멈췄다.
은호는 찻잔을 내려다보다 입을 열었다.
“아직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계속 숨기기는 힘들겠죠.”
“말하기 곤란한 내용인가? 말하지 않아도 된다.”
“괜찮아요, 적호 님께는 말씀드렸으니까요. 또, 적호 님은 친우들과 아드님에게 비밀을 갖고 싶어 하지 않을 것 같아요.”
황지호가 은호에게 도망갈 여지를 남겨 줬지만, 은호는 말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다.
은호는 마음이 편해 보였는데, 도리어 적호가 눈에 띄게 긴장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적호 님께 옛이야기를 했습니다.”
“옛이야기?”
“네, 제가 잠들기 전의 이야기요.”
은호는 자신과 후예 사이에 얽힌 이야기를 꺼냈다.
은호가 읽은 천기(天機).
당시 호족의 수장이었던 은호의 선택.
무녀의 배신으로 인한 천기의 변동.
무력하게 태어난 아이.
그 천기를 다시 한 번 비틀기 위해 토족에게 아이를 맡긴 것.
은호가 긴 이야기를 일단락 지었다.
“……네 후예가 무슨 예언을 타고났든, 나는 그 후예를 지켰을 거다.”
“네, 황호 님이라면 제 아이를 지켜 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이도 목숨을 부지했겠죠.”
은호는 황지호를 곧게 바라보며 말했다.
“황호 님이 살아 계신 동안에는요.”
황지호가 침묵했다.
은호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황지호는 은호가 어떻게 대답할지 알고 있었을 거다.
알고 있었는데도 왜 굳이 저 말을 한 걸까.
‘정말 죽더라도 그 후예를 구할 생각이었던 거겠지.’
호랑이들이 고뇌에 빠진 가운데, 은호의 말이 계속되었다.
“제가 무녀의 배신을 사전에 알았다면, 천기가 뒤틀리는 것을 막았겠지요. 그랬다면 제 후예는 이 땅을 수호할 전사가 되었을 거예요.”
은호는 백호군, 황지호, 적호, 김신록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은호의 후예가 무사히 태어났다면, 신화시대에 호족이 겪은 시련은 한층 가벼워졌거나 아예 시련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은호는 호족이 자신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은호의 옆얼굴에서 짙은 죄책감이 묻어났다.
“하지만, 제 무능과 무지로 제 아이는 전사로서의 숙명도 잃고 평생 부모 없이 살다가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아이가 남긴 후예들을 제가 어떤 낯으로 볼 수 있을까요?”
은호의 말에 공기가 무거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은호는 호랑이들이 생각할 시간을 주기 위해서인지, 잠시 기다리다가 물었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세요?”
과연 은호가 정체를 밝히고 그의 후예를 만나야 하는가.
은호의 질문에 가장 먼저 답한 건 적호였다.
“저는 여전히 은호가 서호, 이호, 재호와 만나기를 바랍니다.”
먼저 이야기를 들었던 적호는 흔들림이 없었다.
김신록과 긴 오해를 최근에 풀었던 적호의 입장에선, 은호도 자신의 혈육과 마주하길 바라는 것 같았다.
“나는 내 동생이 원하는 대로 하길 바란다.”
백호군은 초지일관 은호의 의견을 우선시했다.
동생을 아끼는 마음이 남다른 내 주력 플레이어블 캐릭터다운 선택이었다.
“나는 처음에 은호의 의사를 존중하겠다고 밝혔고, 이를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적호의 생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황지호는 중립을 지키되 적호의 말에도 힘을 실어 줬다.
황지호는 은호를 존경하는 상대라고 말한 적이 있다.
황지호는 그런 상대의 의견을 존중하긴 하지만, 가족과 만났으면 하는 마음도 있나 보다.
“…….”
한편, 김신록은 말없이 적호 쪽을 바라봤다.
아버지의 의견을 따를 생각인가 보다.
자식 된 입장에서 아버지의 의견을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을 거다.
아니, 그냥 김신록도 은호의 후예들이 은호와 마음을 터놓는 것을 바라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호랑이들이 어떤 선택을 할지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의신이 형은요? 설마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은호가 내 생각을 읽은 것 같은 말을 했다.
호랑이들의 가족사니까 외부인인 내 의견까지 물어볼 줄은 몰랐다.
은호는 온화한 얼굴로 웃었는데, 어쩐지 기묘한 압력이 느껴졌다.
“제 후예도, 저도 의신이 형이 구해 주셨잖아요. 호족의 은인에게 의견을 묻는 건 당연한 일이죠.”
“조의신, 은호의 말대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황지호 저 노친네는 왜 갑자기 끼어들어서 한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다.
또, 적호와 김신록은 기대에 찬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혹시 내가 적호 부자 때처럼 적극적으로 움직여 주길 바라는 걸까.
“의신이 형이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해요. 제가 그 아이들을 만나고, 제 정체를 밝혀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은호의 직설적인 질문이 날아왔다.
솔직히 말하면, 은호가 후예들과 만났으면 좋겠다.
하지만 은호의 입장도 이해가 갔다.
‘만약 내게 가족이 있다면, 만나고 싶었을 것 같은데.’
피가 이어진 먼 친척이 있긴 했지만, 그건 가족이 아니었다.
남보다 못한 이들을 가족이라고 부를 수 없었다.
혹시 내게 다른 가족이 있었다면.
이런 생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은호의 후예들은 토족들과 가족처럼 지냈고, 삼 남매 사이의 우애도 좋다.
그러니 나와 입장이 전혀 다르지만, 후예 입장에서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은호와 후예의 입장, 양쪽 다 생각해 보고 싶은데…….’
고심한 결과, 시기를 고려해 답변을 미루기로 했다.
“은광고 입시가 얼마 안 남았어. 우선 아이들이 공부에 집중하게 도와야 하지 않을까? 입학시험이 끝나면 다시 이야기하면 좋을 것 같아.”
은호와 은서호, 은이호는 현재 수험생이다.
수험생에게 갑자기 출생의 비밀과 맞닥뜨리게 하는 잔혹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호랑이들은 김이 샌 듯했으나 내 의견에 동의했다.
적호가 몹시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긴 했지만, 교사인 아들이 있어서일까.
결국 적호도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기숙사 내 방.
내일은 월요일이고 호랑이들에겐 각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이르게 해산했다.
황명호 대저택에서 아직 볼일이 있긴 한데, 호랑이들의 상태를 고려해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다음에 적호를 만나면 물어봐야 할 텐데.’
웅족이 언급한 바람과 비를 다루는 쌍둥이.
풍백과 우사로 추정되는 존재에 관한 단서를 잡은 건 플마고 속의 적호다.
비록 지금의 적호는 풍백과 우사에 관해 모르지만, 그 정보를 잡을 수단이 있다.
‘리플레이’.
김신록에게 사용했던 전용 메뉴의 기능이다.
‘적호의 리플레이는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아니, 애초에 리플레이를 사용할 수는 있을까?’
내가 수백, 수천 번을 리플레이하긴 했지만 결국 어떤 결말을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며 엔딩을 봤다.
적호의 리플레이는 아마 내가 ‘이름 없는 조연의 튜토리얼’의 결말을 받아들인 이후부터 진행될 거다.
즉, 김신록과 13조 수험생들이 웅족의 권속에 의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다음부터다.
‘적호에게 김신록이 사망한 이후의 미래를 보여 준다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상상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혔다.
하지만 ‘안 한다’는 선택지를 택하기가 어려웠다.
김신록의 리플레이로 얼마나 큰 정보를 얻었던가!
김신록의 리플레이가 없었다면, 긴 꼬리의 후보 중 하나였던 원족의 수장 제천대성을 계속 의심하고 있었을 거다.
그랬다면 황지호가 제천대성과 접선할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천대성의 협력을 얻지 못했다면 TC 연구소 건은 매우 복잡하게 흘러갔을 거고, 도시후를 비롯한 몇몇 관계자의 목숨이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리플레이 건은 당장 진행할 수 있는 게 아니야.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전날, 밤을 새긴 했지만 푹 자고 영약까지 먹은 덕에 아직 움직일 만했다.
기숙사 방에 도착하자마자 딴생각이 들지 않도록 디바이스를 켜고, 데이터 칩을 꺼냈다.
옛 한국 지부장이 건넨 데이터 칩은 구형이었으나 다행히 최신 기종의 디바이스와도 호환되는 타입이었다.
데이터 칩 안에 있는 파일을 본 순간, 말 그대로 눈이 돌아갔다.
데이터 칩 안에는 방대한 양의 텍스트 파일과 그림과 영상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제대로 된 정보가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다운로드에 시간이 걸린다 했더니…… 더미 정보가 너무 많은데. 이걸 전부 읽고 해석해야 하는 건가?’
어렵게 얻은 정보를 놓칠 수 없었다.
나는 숨을 가다듬고 가장 위에 있는 파일을 열었다.
한 줄, 한 프레임.
무엇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파일을 훑기 시작했다.
어느 사이엔가 날이 바뀌고, 해가 떴지만 나는 계속 정보 분석에 몰두했다.
‘지부장이 남기려 했던 정보는…… 이건가?’
수많은 정보 속에서 내가 실마리를 잡은 순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렸다.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의 차원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스킬 ‘이차원 미래 개변 적합체 전용 메뉴’의 리플레이 기능이 2단계에서 3단계로 상승합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