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85화 (483/925)

69. 티끌 (6)

1학년 0반 교실.

오후 수업이 끝나고 종례 시간이 가까워졌지만, 조의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의신이가 오늘 쉬나 봐요.”

“오후 수업에도 안 나왔어?”

“응, 공청훤 선생님이 서운해하셨어.”

같은 선택 수업을 듣고 있는 한이의 말에 0반 학생들의 걱정이 깊어졌다.

조의신이 가끔 학교에 안 나오긴 했다.

하지만 학급 행사는 빠짐없이 챙기는 그가 수능 이벤트와 소풍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학교를 나오지 않으니 이상하게 여겨질 법했다.

0반 학생들이 동요하자 황지호의 모습으로 교실에 앉아 있던 황호가 말했다.

“기숙사 방에 있는 것 같더군. 피곤했을 테니 쉬게 하는 게 좋겠지.”

조의신이 기숙사 방에 있다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았다.

늘 바빠 보이는 조의신이 하루 정도 쉰다는 건 반 아이들 입장에선 기뻐할 일이었다.

하지만 황호의 말에 의문을 품는 학생들이 있었다.

“기숙사생도 아닌데 그걸 어떻게 아냐?”

“저는 기숙사생이지만 몰랐습니다.”

맹효돈과 목우람의 말에 반 아이들이 희미한 위화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한이에게 말을 붙이던 독고미로가 미심쩍어하는 눈으로 황호를 바라봤다.

현재 1학년 0반에 소속한 학생 중, 독고미로가 가장 경계하는 상대는 황호였다.

“……디바이스 메신저로 물어봤겠지.”

“의신이는 지호한테 메신저 답변 잘 안 하지 않아?”

송대석의 실드는 민그린의 사실에 근거한 반박에 의해 무참히 무너졌다.

상황을 수습한 건 김유리였다.

“얘들아! 가을 소풍 날짜 말인데, 함근형 선생님이랑 용쌤은 이번 주 토요일이 괜찮대.”

“아, 그러면 수능 이후네…….”

탄식한 권레나 외에도 아이들 모두가 안타까워했다.

다소 늦은 가을 소풍을 준비하던 1학년 0반 학생들은 줄곧 날씨를 걱정했다.

한반도에서 가을과 겨울의 경계선 중 하나로 꼽히는 건 바로 ‘수능 한파’다.

11월에 아무리 온화한 날씨가 이어져도 수능 당일이 되면 마치 약속한 것처럼 추워지는데, 수능 당일에 한파 주의보가 발령된 적도 있을 정도다.

올해에도 수능 당일부터 급격히 추워지기 시작할 거라는 기상 예보가 있었다.

“가을 소풍이 아니라 혹한기 대비 캠프 가게 생겼네.”

“토요일까지 그 두 분과 연락이 되면 좋을 텐데요.”

“그 새끼들 요새 출석부 털어 간 이후로 안 보이던데.”

1학년 0반 학생들이 날씨 예보 애플리케이션을 열어 토요일의 지역별 기온을 체크하고 있을 때.

가끔 처웃으며 반 아이들 사이에 섞여 있던 황호가 번쩍 고개를 들어 창밖을 내다봤다.

“……!”

그 기세에 근처에 앉아 있던 한이가 덩달아 창밖을 봤다.

한이는 1학년 0반 소속 관종들이 창문에 달라붙어 있나 싶어 밖을 살펴봤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뭐야, 왜 그래.”

“조의신이 기숙사 밖으로 나갔다. 중앙 구역으로 가는 것 같은데.”

황호는 기숙사 건물이 있는 쪽을 보고 있었다.

한이는 속으로 ‘어떻게 그걸 황지호가 알지?’라고 생각했지만, 보나 마나 처웃기만 할 게 뻔하다고 생각했기에 말을 섞지 않기로 했다.

현명한 한이와 달리 몇몇 아이는 참지 못하고 황호에게 의문을 표했다.

“아니, 그러니까 저 새끼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지호는 이사장 친척이잖아요. 권력 남용을 해서 의신이를 귀찮게 하는 게 아닐까요?”

“하하하하!”

황호는 생각 없이 처웃는 듯 보였으나,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황호는 오늘 아침 조의신이 학교를 나오지 않고, 디바이스 메시지에도 답변을 하지 않아 부득이하게 위치 추적을 하였다.

그 결과 조의신은 기숙사 방에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일요일에 해가 지도록 깨어나지 않던 조의신이 호족의 가든까지 방문했으니, 피곤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하루 내내 쉴 줄 알았거늘.’

황호는 은인의 휴식을 기껍게 여기고 있었는데, 갑자기 황명호 이사장의 분신 앞으로 보고가 하나 올라왔다.

황보윤 교장은 오늘 교무회의에 불참하겠다고 사유서를 제출했는데, 그 사유로 든 게 ‘학생과의 면담’이었다.

황호는 황보윤 교장이 학생과 교류가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워 그 학생이 누구인지 확인해 봤다.

그 학생은 다름 아닌 조의신이었다.

“얘들아! 수능 날에 사전 답사 갈 건데 같이 갈 사람?”

“저요!”

“그날 현악부도 쉬니까 나도 갈래.”

“그러면 저도 가겠습니다.”

황호가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김유리에 의해 다시 대화의 주제가 바뀌었다.

1학년 0반 반장의 수고도 모른 채, 황호는 분신을 움직여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

*    *    *

중앙 구역, 행정 관리동의 최상층에 위치한 교장실.

나는 옛 한국 지부장이 넘긴 데이터 칩 분석을 마치자마자 황보윤 교장에게 면담 신청을 넣었다.

비밀 통로의 원리에 관해 묻지 옛 한국 지부장의 AI가 황보윤 교장을 언급하며 데이터 칩을 내밀었다.

―이걸 보여 주면 윤이가 답을 해 줄 거다.

단순하게 말뜻을 받아들이면 데이터 칩을 황보윤 교장에게 보여 주라는 뜻이겠지만, 그렇게 생각하기 어려웠다.

데이터 칩은 구형이라는 것 외에는 별 특징이 없다.

이걸 다짜고짜 황보윤 교장에게 보여줘 봤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다.

0반 학생의 장난질이라고 생각하고 상대도 안 해 줄 가능성이 컸다.

‘옛 한국 지부장이 보여 주라고 한 건 데이터 칩 그 자체가 아닌 내용물이겠지.’

옛 한국 지부장은 더미 파일 안에 정보를 숨겨 뒀는데, 그 더미 파일 자체에도 가치가 있었다.

데이터 칩에 가득 찬 텍스트, 그림, 영상 파일들.

그 데이터들은 책의 내용을 타이핑하거나 스캔하거나 촬영한 결과물이었다.

조사해 본 결과 데이터들은 평범한 책이 아닌, 소실된 것으로 알려졌거나 일부만 남아 있는 고서들의 전문(全文)이었다.

‘고서, 희귀서들이 은광고 지하의 이계 시뮬레이터 속에 보존되고 있었다니.’

황보윤 교장은 고서, 희귀서 수집가로 유명하다.

일개 학생의 면담 신청은 몰라도 희귀서 관련 정보는 무시하지 못할 거다.

그래서 황보윤 교장 앞으로 면담 신청서를 작성할 때, 첨부 파일로 스캔된 파일 몇 개를 보냈더니 바로 답장이 왔다.

당장 만나자는 말과 함께.

학생들과의 접촉을 꺼리는 황보윤 교장답지 않은 태도였다.

“안녕하세요.”

“안녕. 인사성이 밝네. 앉아.”

실내라서 그런지 황보윤 교장은 평소 얼굴을 가리고 있던 스카프를 착용하지 않은 상태였다.

교장실의 밝은 조명 덕에 황보윤 교장의 얼굴이 잘 보였다.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된다고 하지만, 그냥 봤을 때는 30대 후반인 함근형 선생님보다 젊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올해 72세인 홍경복 화백과 대영웅 송만석과 동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아니겠지만 일단 묻겠는데, 시완이가 그걸 준 건 아니지?”

“성시완 선배님 말씀하시는 건가요?”

“어.”

이 자료를 얻는 과정에서 성시완이 개입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성시완이 내게 준 건 아니었다.

성시완을 끌어들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사실대로 말하기로 했다.

“아니요.”

내 대답에 황보윤 교장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황보윤 교장의 손끝에서 희미하게 이능파가 피어오르는 게,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방금 한 질문도 그렇고 황보윤 교장은 이 희귀서의 출처에 관해 아는 것 같았다.

“그러면 첨부한 자료의 출처를 확인해야겠는데. 대답에 따라서 협회에 넘길 수도 있어.”

황보윤 교장에게는 처음부터 출처를 밝힐 생각이었다.

문제는 어느 범위까지 밝히는가였다.

‘성국언과 성시완에 관해선 일단 덮어 둘까. 이무기의 귀천 건도 적당히 넘어가는 게 좋겠네.’

플마고와 이 세계에서의 황보윤 교장의 행보.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데이터.

이들을 바탕으로 판단해 봤을 때, 그녀는 아군임에 틀림없었다.

‘……그 데이터가 전부 사실이라면, 황보윤 교장을 의심할 필요가 없어.’

전자 데이터화된 희귀서 더미 데이터 속에 감춰진 자료는 옛 한국 지부장의 ‘일생’ 그 자체였다.

플레이어로서 각성한 순간부터 목숨을 던져 혼을 건 계약을 깼을 때까지의 모든 기록이 남아 있었다.

시대의 흐름과 거대한 힘 앞에서 옛 한국 지부장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무력한 현실 속에서도 단 한 번도 포기하거나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보고 듣고 느끼고 추리하고 짐작한 것들을 모두 기록으로 남겨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해 그 데이터를 남겼다.

그 데이터 안에는 옛 한국 지부장이 신뢰했던 동료, 황보윤 교장에 관한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다.

비밀 통로가 건재한 걸 보면 황보윤 교장이 변절한 것 같지도 않았지만, 조심해도 나쁘지 않을 거다.

‘일단 필요한 내용만 전하자.’

만일에 대비해 두 사람과 그림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기로 했다.

물론, 계이담은 황보윤 교장한테 어떤 꼴을 당해도 상관없으니, 그놈이 연루된 건 다 까발릴 생각이었다.

선도부 회관을 연 ‘계’새끼에 관해선 다 이야기할 작정이다.

내 말을 계기로 계이담이 불이익을 당하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다.

“이 자료는 은광고 괴담에 관해 조사하다가 얻게 된 거예요.”

나는 그간의 여정에 관해 밝혔다.

비밀 결사 괴담과 실제로 존재한 비밀 통로.

그 안에 숨겨진 이계 시뮬레이터와 옛 한국 지부장 AI와의 대결.

그 결과 얻게 된 이 자료에 관해서.

가끔 부연 설명을 요구할 때만 입을 열던 황보윤 교장이 물었다.

“……그래서, 왜 나한테 이걸 보여 줄 생각을 한 거지?”

“그분의 AI가 조언해 주셔서요.”

“조언?”

“비밀 통로에 존재하는 어떤 공격 수단의 원리에 관해 물었더니 ‘윤이’에게 물어보라는 답변을 들었어요.”

‘윤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옛 한국 지부장이 입꼬리를 내렸다.

황보윤 교장에게서 느낀 날 선 분위기도 한결 가라앉아 있었다.

“……나를 ‘윤이’라고 부르는 건 그 사람밖에 없었지.”

황보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옛 한국 지부장일 거다.

데이터 속에서도, 옛 한국 지부장의 AI도 황보윤 교장을 계속 윤이라고 칭했으니까.

“바보 같은 사람, 희귀서를 미끼로 걸지 않았더라도 도왔을 텐데.”

데이터에 남은 기록을 보면, 황보윤 교장을 설득하는 데에 꽤 오래 걸렸다고 하던데.

옛 한국 지부장은 희귀서를 미끼로 당시 은광고에서 평교사로 재직 중이던 황보윤 교장을 계획에 가담시켰다고 한다.

황보윤 교장은 은광고에 그런 통로를 만드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말하며 계속 옛 한국 지부장을 설득하려고 했었다.

희귀서를 미끼로 설득하니 결국 넘어오긴 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을 모르는 척 말했다.

“교장 선생님이 그 비밀 통로를 만드는 걸 도우셨나요?”

“그래.”

“원리에 관해 물어도 될까요?”

황보윤 교장이 말하는 걸 거부하면 희귀서 자료를 두고 교섭하려고 했다.

하지만 황보윤 교장은 의외로 금방 답을 줬다.

“……그 사람의 AI가 납득한 인물이니, 말해도 되겠지.”

황보윤 교장은 옛 한국 지부장을 상당히 신뢰하는 것 같았다.

황보윤 교장은 교과서를 읽는 교사가 할 법한 어조로 술술 말했다.

“원리는 간단해. ‘진명’을 가진 존재의 혼을 공격해서 수면 상태에 빠지게 하는 거야.”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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