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86화 (484/925)

69. 티끌 (7)

진족과 후예, 인간.

이들의 가장 큰 차이점은 진명의 존재 여부다.

또한 진족과 후예의 경우, 혼이 매우 불안정하다고 한다.

예전에 황지호가 ‘깊은 잠’에 관해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진족과 후예의 혼은 아주 불안정해. 후예는 진족보다 비교적 안정적이긴 하지만 언제든 그 혼이 육신을 떠나 버릴 수 있어. 그 혼과 육신을 잇는 쐐기가 진명이다.

백호군처럼 진명을 분실한 진족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소수다.

진명을 잃을 정도로 극한의 상황에 처하면 죽거나 깊은 잠에 빠질 테니까.

그러니 진족과 후예를 선별해 공격한다면, 황보윤 교장의 말대로 진명의 존재 여부를 확인하는 게 제일일 것이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황보윤 교장이 쉽게 말하긴 했지만, 의문이 남았다.

“어떻게 진명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죠?”

“진족과 후예는 서로를 알아보잖아.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면 인간도 진족과 후예를 구분할 수 있겠지. 그 사람의 손주에게도 그런 능력이 있을걸.”

진족과 후예는 서로 알아본다.

염준열이 황지호를 보고 진족임을 알아본 것처럼.

또, 성국언에게는 진족과 후예를 구분할 수 있는 이능이 있다.

상위 존재가 가호를 내린 성국언의 눈.

성국언은 이능을 발동시킨 상태에서 그 눈으로 대상을 관찰해, 대상이 인간인지 아닌지 판별할 수 있다.

‘진족과 후예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 건 진명의 존재 여부를 감지했기 때문이었나. 그럼 성국언이 지닌 능력도 같은 원리로 발동하나?’

보통 사람들은 이를 그저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는데, 황보윤 교장은 어째서 그들이 당연하게 서로를 알아보는 건지 캐 본 건가.

“그 점에 착안해서 연구를 진행했지만, 쉽지 않았어. 연구 주제 자체도 까다로웠고 이런 연구를 한다는 게 밝혀지면 진족과 후예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잖아. 보안을 지키면서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시켜야 했지.”

진족임을 드러내는 이들보다는 숨기고 사는 이들이 많다.

인간과 적대적인 이들일수록 그런 경향이 두드러진다.

심지어 황보윤 교장은 선별하는 방법을 찾아낸 데에 이어 공격하는 수단까지 얻지 않았는가.

황보윤 교장은 짙게 웃으며 자신의 연구 성과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진족과 후예는 무의식 깊은 곳, 심중(心中)에 진명을 봉인해 둬. 그 심중을 꿰뚫어 보고, 진명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방법을 몇 가지 찾아냈지.”

……한 가지도 아니고 몇 가지?

청소년 플레이어들의 최정점에 선 은광고의 교장은 과연 남달랐다.

황보윤 교장은 어둠의 시대를 지낸 고참 플레이어인데, 진족과 후예의 눈을 피해 저런 연구 결과를 낸 건가.

“첫째, 자신도 진명이 있을 경우. 이건 인간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지. 진명이 있는 존재는 본능적으로 서로를 알아보는 모양이야.”

첫 번째 방법은 앞서 황보윤이 말한 내용만으로도 추측 가능한 내용이었다.

또 비밀 통로에 있는 장치에 적용할 수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황보윤 교장의 설명이 계속되었다.

“둘째, 대상의 무의식, 꿈으로 깊게 침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것.”

두 번째 방법도 아는 내용이었다.

호족의 가든 안, 황지호가 이런 말을 했다.

―악몽은 꿈을 통해 우리의 무의식을 침범한다. 그렇게 침입한 악몽은 우리가 심중(心中)에 봉인한 진명을 삼켜 버리지.

악몽이 꿈과 무의식을 침범해 심중에 봉인한 진명을 삼킬 수 있다는 건, 진명의 존재 여부를 판별할 수도 있다는 거다.

설마 황보윤 교장은 악몽에 관해 알고 있는 걸까?

“혹시 악몽의 신에 관해 알고 있나? ……표정을 보니 아는 것 같군. 고등학생 중에 인섬니움에 관해 아는 이가 있다니.”

황보윤 교장은 흥미진진해하는 얼굴로 내 쪽을 봤다.

어쩐지 황지호와 비슷한 태도였는데, 왜 황지호가 황보윤을 교장으로 지목했는지 알 것 같았다.

“이계 충돌이 일어났을 때, 인섬니움이 이 땅을 휩쓸며 ‘악몽의 티끌’을 남겼다고 해. 그 티끌에 잠식된 진족을 봤는데, 진명이 삼켜질까 봐 두려워하던데? 그걸 계기로 감을 잡았지. 티끌만으로는 진명을 삼킬 수 없는 모양이지만.”

악몽의 신 인섬니움은 100년 전에 이 땅에서 크게 움직였나 보다.

12지 동맹 회담 당시, 서돌의 말에 의하면 15년 내지 20년 전부터 악몽이 잠잠해진 것 같지만.

용제건은 그때 악몽이 남긴 티끌을 입수해 김신록에게 전해 준 건지도 모르겠다.

“꿈으로의 침투 자체는 몽마들, 혹은 꿈과 관련된 이능을 타고난 이들이라면 가능해. 하지만 심중까지 깊숙하게 잠입하는 건 쉽지 않아. 일일이 대상을 재워서 꿈에 잠입하는 것도 어렵고.”

황보윤 교장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악몽의 티끌을 사용한 고문 광경을 봐서 잘 안다.

티끌에 잠식되기 전, 웅족은 반드시 잠들었다.

하지만 이는 호족의 가든이라는 배경, 죽호의 삼엄한 결계, 김신록의 이능파가 스며든 티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웅족이 통상 상태라면 쉽게 잠들지는 않았을 거다.

‘비밀 통로에 진입한 진족과 후예를 판별해 재우기에는 뭔가가 부족한데.’

그렇게 판단한 나는 황보윤 교장에게 질문했다.

“비밀 통로에 사용하신 건 세 번째 방법인가요?”

“그래. 티끌이 무의식을 잠식하는 프로세스를 관찰, 분석해서 알아낸 방법이지.”

황보윤 교장이 세 번째 방법을 바로 말하지 않고 설명을 길게 한 이유가 저거였나 보다.

“진족과 후예는 딱히 서로의 무의식을 침투하지 않아도 서로의 진명 존재 여부를 판단하잖아. 상위 존재도 그렇고. 나도 빠르게 진족과 후예를 판별하고 싶었어.”

‘빠르게 상대를 판별하고 싶다.’

그런 이유로 황보윤 교장은 위험한 연구를 한 걸까.

정보의 처리 속도가 승패를 결정하긴 하지만, 지금 황보윤 교장은 순수한 학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위대한 발명과 발견을 이뤄 낸 과학자와 모험가들이 보통 저런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책에 미쳐 있는 황보윤 교장은 학자다운 기질이 있는 것 같다.

“연구 결과, 진족과 후예는 어떤 힘에 노출되었을 때 무의식이 흔들리고 진명이 미미하게 반응한다는 걸 알았지.”

“어떤 힘이요?”

황보윤 교장은 어느 사이엔가 활짝 웃고 있었다.

처음에 면담을 신청했을 땐 무표정이었는데, 언제 저런 표정을 짓기 시작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동안 밝힐 수 없었던 자신의 연구 결과를 밝힐 상대가 등장해 기쁜 걸까.

황보윤 교장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바로 지력이야.”

진족, 후예와 인간을 구분하는 세 번째 방법.

그 답은 바로 ‘지력’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답에 조금 놀란 얼굴을 하니 황보윤 교장이 신이 난 얼굴로 설명했다.

“지맥의 가까운 곳에 이능파 변환기를 설치해 내가 구성한 알고리즘에 따라 지력을 변질시켜 대상을 스캔하면, 심중의 진명 존재 여부를 빠르게 판단할 수 있어.”

비밀 결사의 회합 장소가 은광고 지하에 있었던 이유가 그거였나.

옛 한국 지부장이 은광고 안이 안전하다고 판단했고,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할 거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지력이 충만한 은광고 학교 부지의 지하, 지맥 가까이에 판독기를 설치할 수 있어서일 것 같다.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선 지력이 센 곳에 자리를 잡아야 했는데…… 어지간한 지역은 진족이 다 차지했더군. 은광고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이계 충돌 이후 진족이 이 땅에 몰려온 이유는 지력 때문이다.

12지 동맹 소속 진족들은 한반도에서 지력이 강력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 땅에 황보윤 교장이 들어가긴 어려울 거다.

……한 곳, 여기 은광고만 빼고.

“그래도 은광고에는 교사로서 들어올 수 있었지. 게다가 이곳을 관리하는 진족은 태만했으니까, 눈을 피해 움직이기도 좋았어.”

노친네의 태만이 황보윤 교장의 연구를 진척시켰다!

이 말만 들으면 뭔가 이상하지만, 인과관계는 들어맞았다.

옛 한국 지부장과 황보윤 교장은 이사회가 썩어 가고 이사장이 노는 틈을 타 비밀 통로를 만든 듯했다.

“처음 목표는 진족과 후예, 인간의 구분뿐이었지만…… 그 사람의 의뢰로 혼을 공격하는 기믹을 추가했지.”

구분 그 자체보다 공격 수단이 더 위험한 것 같은데, 황보윤 교장의 목소리는 어딘가 식어 있었다.

정말 황보윤 교장의 목표는 종족의 구분 그 자체뿐이었던 것 같았다.

그래도 진족과 후예를 단숨에 무방비한 상태로 만드는 기술이니, 허투루 들을 수 없어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

황보윤 교장은 내 요청을 받아들여 설명을 더했다.

“지력을 잔뜩 끌어다 써도 혼에 조금 타격을 줘서 재우고, 전후 기억을 몇십 분 지우는 게 고작이야.”

황보윤 교장의 말에 의하면, 비밀 통로에 마련된 공격 수단은 강력한 지맥과 가까운 곳이 아니면 설치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비밀 통로에 있던 스캐너와 트랩도 지맥과 가까웠기에 설치할 수 있었다고 한다.

황보윤 교장이 설명을 마친 후 물었다.

“질문이 더 있니?”

교사다운 물음이었다.

황보윤이 학자 기질을 타고난 희귀서 수집가, 괴짜 교장이라고 해도 일단은 교사니까 당연한 걸까.

“아뇨, 답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예의 바른 아이구나.”

황보윤 교장의 교사다운 면모는 거기까지였다.

황보윤 교장은 처음 내가 희귀서 파일 중 일부를 보여 줬을 때 지은 심각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럼 그 사람이 남긴 희귀서 파일 좀 줄래? 다음 페이지를 읽고 싶은데.”

내가 궁금해하던 사항을 모두 알려 줬으니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나는 순순히 추려 낸 파일을 황보윤에게 건넸다.

황보윤 교장은 당장 희귀서를 탐독하고 싶은 듯, 디바이스 코드를 교환한 후 바로 축객령을 내렸다.

궁금한 게 더 있으면 또 질문해도 좋다는 말을 남기긴 했지만.

‘그럼 다음 약속 장소로 가 볼까.’

황보윤 교장과의 면담은 끝났지만, 아직 오늘 일정은 끝나지 않았다.

시계를 보니 아직 시간이 있었다.

다음 약속 장소도 교내라 아마 여유 있게 도착할 것 같았다.

교장실을 나와 행정 관리동 밖으로 나설 때였다.

“이제 면담이 끝났나 보군.”

밖으로 나가니 황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부 활동 시간이 아닌가?

신문부 활동을 빼먹고 여기에서 뭐 하는 건지 모르겠다.

황지호는 나를 살피다가 말했다.

“조의신, 설마 밤을 샜나? 기숙사에서 쉬고 있던 게 아니었나 보군. 영약도 먹지 않고 뭐 한 거냐.”

……대체 영약을 먹지 않은 건 어떻게 안 거지?

일부러 안 먹은 건 아니고, 그냥 자료 분석에 바빠서 잊고 있었을 뿐인데.

일단 변명은 해 두기로 했다.

“저녁 먹고 영약 먹을 생각이었어.”

“그 얼굴을 보니 식사도 안 한 것 같군.”

변명은 통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 행적만 더 밝혀졌다.

말하는 꼴을 보니 황지호는 내 다음 약속에 관해서도 알고 있는 것 같다.

“바쁜 것 같지만 중앙 구역 식당에 들렀다 가는 게 좋겠군. 오늘 메뉴가 나쁘지 않아.”

이 학교의 식당 메뉴가 나쁜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 전에 튀어나온 황지호의 말에 삼켰다.

“적호와 은영관에서 만나기로 한 걸 안다. 그 전에 식사는 해야 되지 않겠나? 리플레이에는 체력이 꽤 소모되는 것 같으니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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