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진눈깨비 (1)
서족의 수장, 자칭 꾀돌이 서돌의 사무실.
긴 해외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 서돌은 밀린 업무와 마주했다.
다음 해 가을 컬렉션 준비가 마무리된 후에야 서돌은 느루 전속 수석 디자이너가 아닌, 진족으로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서돌이 현재 도전 중인 과제는 은광구를 지켜보고 있는 ‘눈’의 차단이었다.
‘통신용 전파와 상당히 유사한 파장의 이능파를 사용한다는 건 알겠는데…….’
권제인의 귀국과 의뢰, 태만했던 황호의 활동 시작.
이들을 계기로 서돌이 은광구를 드나들게 되었다.
서돌은 은광구를 지켜보는 ‘눈’의 존재를 알아차렸고, 이를 배제하기 위해 움직였다.
마족 여럿, 그것도 7대 마신의 고위 신관이 가담한 연구의 결정체를 파훼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아주 조금씩 실마리가 보이고 있었다.
‘슬슬 질리는데.’
현재 ‘눈’의 대항책 연구의 가장 큰 적은 다양한 분야에 쉽게 빠지고 질리는 서돌 자신이었다.
서돌의 관심사는 여러 분야에 걸쳐 분포되어 있었고, 특히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인간의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전세계에서 펼쳐지는 중이었으니까.
서돌이 연구를 집어치우고 ‘밤말’에 귀를 기울일 때였다.
우우우웅……!
순간, 서돌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서돌의 귀에 ‘밤말’ 대신 강렬한 충격파가 밀려들었다.
반사적으로 귀를 보호하기 위해 이능파를 끌어올렸으나 고막부터 평형기관, 달팽이관 등 청신경과 이어진 귀 내부가 파열된 이후였다.
쾅!
서돌이 급히 일어나 이능을 발동시키는 것을 감지한 부하들이 서돌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가 대기시킨 쥐가 죽었어.”
서돌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한쪽 귀를 막고 있던 손을 뗐다.
손바닥에서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부하는 왼쪽 귀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서돌을 보고 놀란 얼굴을 했다.
“설마 ‘밤말’을 수집하기 위해 파견한 쥐가 당한 겁니까?”
“그래. ‘세 기사의 맹세’를 염탐하던 쥐들이 전멸했다.”
서돌의 귀는 ‘밤말’을 수집하는 쥐와 연결되어 있다.
밤이 되었을 때, 서돌은 제힘이 닿은 쥐의 귀를 빌려 밤말을 모으곤 했다.
서돌이 영국에 직접 간 가장 큰 이유는 쥐들을 심어 두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공을 들여 숨겼는데, 다 찾아내다니.’
서돌은 느루의 로고가 프린트된 비단 손수건으로 손과 귀를 훔치며 혀를 찼다.
귀가 먹먹한 게 왼쪽 귀의 청력을 회복 아이템 없이 재생시키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았다.
귀에 이 정도로 충격이 왔을 때부터 예상했지만, 서돌이 세 기사의 맹세 본거지에 심은 쥐들이 모두 죽어 있었다.
“한 마리도 남지 않았군. 이쪽이 눈치채지 못하게 한 번에, 동시에 죽였어. 하나라도 남았다면 역병을 뿌려 줬을 텐데.”
“귀의 수복이 아직인 것 같습니다. 회복 아이템 카드를 가져오겠습니다.”
“새 손수건도 가져와.”
“네.”
부하가 퇴장한 후, 쓰레기통에 피에 젖은 손수건을 던져 넣은 서돌이 생각에 잠겼다.
일시에 서돌의 쥐가 제거되었다.
아무리 세계 10대 플레이어 팀이라 한들, 서돌이 심은 쥐를 단시간에 전부 찾아내는 건 불가능하다.
아마 며칠간 뜸을 들인 게 분명했다.
‘최근에 입수한 정보는 허위 정보일 가능성이 커. 하지만 쥐를 심기 전과 심은 직후의 정보는 믿을 수 있겠지.’
서돌이 그동안 모은 밤말을 되새기다가 갑자기 빙긋 웃었다.
그간 모은 정보의 흐름을 고려해 봤을 때, 그들이 무엇을 노리고 시작하려는지 짐작이 갔던 탓이다.
아직 지혈이 덜 된 바람에 귀에서 피가 흐르는데, 서돌의 기분은 몹시 좋았다.
‘누구에게 먼저 알릴까요? 황호에게 알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하지만 점수를 딸 겸, 조의신에게 전하는 게 좋겠죠.’
서돌은 아직 조의신을 느루의 앰배서더로 삼겠다는 포부를 버리지 않았다.
검은 이능파를 다루는 조의신을 모델로 삼으면 그림이 될 거라는 디자이너다운 생각도 있었으나, 서돌은 부차적인 요소에 더 주목했다.
‘조의신을 앰배서더로 세우면 만날 구실도 늘어나고, 조의신과 가깝게 지내는 황호와도 엮일 수 있고…… 그러면 신나는 일도 더 늘어날 텐데요.’
서돌이 오로지 본인의 흥미 충족을 위한 망상을 펼치고 있을 때, 사무실로 돌아온 부하가 순은 트레이를 내밀었다.
트레이 위에는 회복 아이템 카드와 새 손수건 외에도 소독약, 서돌이 즐겨 마시는 차 등이 올라가 있었다.
“영국으로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한국에 체류 중인 세 기사의 맹세 팀원을 노리시겠습니까?”
서돌의 부하가 침착하게 말하긴 했으나 말투에서 분노가 묻어났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서돌은 서족의 얼굴을 대표하는 수장이다.
밤말 좀 엿들었다고 귀가 아작 났으니, 부하 입장에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타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까요.”
서돌은 달래듯 말했다.
분노하던 부하가 서돌의 나긋나긋한 존댓말을 듣고 흠칫 굳었다.
“세 기사의 맹세는 까마귀를 경계하느라 움직이지 않았죠. 하지만 최근 까마귀는 뭔가에 열중하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 틈을 노려 움직일 것 같아요.”
“그들이 어떻게 움직일지 알고 계십니까?”
“네. 아, 제인이도 그 일에 관심이 있는 것 같으니 알려도 괜찮을 것 같긴 한데, 귀가 상한 게 열받으니까 직접 움직일래요.”
치료를 마친 서돌이 자신의 왼쪽 귀를 만지작거렸다.
청력을 비롯한 귀의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당분간 이 귀로 밤말을 듣는 건 불가능할 듯했다.
서돌은 다시 울컥한 기분이 들었으나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상상하니 다시 기분이 좋아져 존댓말로 말했다.
“……그 말 뼈다귀 같은 새끼들의 입장에서는 원하는 걸 하지 못하는 게 제일 짜증 나겠죠?”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서돌은 새 손수건을 품에 넣은 후, 사무실을 나설 준비를 하며 말했다.
“지금부터 은광고의 목우람을 지켜볼 거예요.”
* * *
은광고 내부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중앙 구역 식당.
나는 지금 반강제로 황지호 손에 이끌려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
‘배가 그렇게 고프지는 않은데.’
밤을 지새워서 그런 건지 앞으로의 일정 때문인 건지 허기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막상 식당에 오니 배가 고픈 것 같기도 했다.
오늘 밤에는 비도 온다고 하니 고심 끝에 굴전이 포함된 한식 메뉴를 택하고 줄을 섰을 때였다.
드르륵!
위생 두건과 마스크로 중무장한 누군가가 나와 황지호 앞에서 핸드 카트를 세웠다.
보이는 건 눈밖에 없었는데, 좋은 말로는 순해 보이고 나쁘게 말하면 호구 같은 눈을 보니 누군지 바로 알 것 같았다.
“부반장, 안녕하십니까? 오늘 결석하셔서 다들 걱정하셨습니다. 많이 드십시오.”
목우람이 중앙 구역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나 보다.
그런데 지금 시간대에는 원래 다른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나?
인사를 하고 지나치려다가 질문을 던졌다.
“방과 후에는 탁거산 선생님 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어?”
“그랬습니다만, 오늘부터는 중앙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소풍 비용을 벌기 위해서요.”
설명을 덧붙이는 목우람의 목소리에는 조금 기운이 없었다.
“지난 주말까지 탁거산 선생님께서도 당분간 방윤섭 학생을 방치하라고 하셨습니다.”
목우람의 설명에 의하면, 저번 주까지는 방윤섭을 봐줬던 탁거산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주말에 이르자 탁거산 도인은 목우람에게 방윤섭을 포획해 올 것을 의뢰했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셈 아닌가? 왜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는 거지?”
“……제가 방윤섭 학생을 놓쳤기 때문입니다.”
황지호의 질문에 목우람은 면목 없어 하는 얼굴로 답했다.
목우람이 방윤섭을 놓치다니, 뭔가 이상했다.
방윤섭에게 천운이 따른 걸까?
목우람의 말을 들어 보니 운도, 우연도 아닌 것 같았다.
“갑자기 방윤섭 학생의 기량이 크게 상승했습니다. 저로는 감당이 안 되더군요. 탁거산 선생님께서는 방윤섭 학생이 특훈이라도 하는 걸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만…….”
자괴감에 빠진 목우람은 책임을 지고 아르바이트를 그만두었다고 한다.
탁거산 도인은 언제든 목우람의 복귀를 기다리겠다는 눈치였지만.
‘방윤섭의 갑작스러운 기량 상승이라니.’
정말 방윤섭이 실연당한 충격으로 특훈을 거듭해서 새로 태어난 걸까?
그러면 좋겠지만, 방윤섭의 썩은 근성이 쉽게 고쳐질 것 같지는 않은데.
석연치 않은 기분이 들었다.
“식사할 때는 즐거운 마음으로 해라, 조의신.”
앞에서 잔소리를 하는 노친네가 있으니 석연치 않은 감정이 더더욱 커졌다.
자리를 잡고 식사를 마칠 때까지 황지호는 노친네가 할 법한 잔소리를 했다.
“곧 영약을 마셔야 할 텐데, 적어도 식사는 즐겁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저 노친네가 영약도 챙겨 온 건가!
향록이 예비 영약을 황지호에게 맡길 때부터 느낌이 안 좋더니.
결국 나는 은영관에 가기 전에 영약도 마시게 되었다.
“학교를 안 와서 행여 악몽의 티끌에 영향을 받은 게 아닌가 걱정했다.”
은영관의 로비.
사람의 귀가 없는 장소에 도착하자 황지호가 말했다.
나는 그 티끌을 전혀 위협적으로 느끼지 않았는데, 진명이 있는 존재는 다른가 보다.
“뭐, 뒤에서 적호와 접선해 리플레이를 하겠다고 약속할 정도면 걱정할 필요 없겠지.”
딱히 숨긴 건 아니었는데.
적호에게 디바이스 메시지를 보낼 때, 황지호에게 보고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저 적호의 판단에 맡긴 것뿐이다.
“그럼 가지.”
엘리베이터에 먼저 올라탄 황지호가 버튼을 조작했다.
복잡한 순서를 거치긴 했지만, 예전에 백호군이 누른 버튼과 조금 차이가 있는 걸 보면 다른 층으로 가는 것 같았다.
곧 엘리베이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하 1층.
지하 2층.
지하 3층.
암전.
표시되지 않은 층으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가 이윽고 멈춰 섰다.
‘저번보다 덜 내려간 걸 보니, 고문하던 장소보다는 위층인가 보네.’
문이 열리자 황지호가 걷기 시작했는데, 입꼬리가 조금 올라가 있는 게 마음이 걸렸다.
그 이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
“…….”
황지호가 가장 안쪽에 위치한 문을 열자, 적호와 김신록이 있었다.
둘은 어두운 얼굴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다.
가운데에는 백호군이 서 있었는데, 평소대로 무표정이긴 했으나 다소 난감해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조의신, 둘이 처음으로 부자 싸움을 했다. 김신록이 적호에게 대드는 건 처음 봤지. 하하하하! 오래 살고 볼 일이군.”
“여기에 있는 시설은 적호 님이 아니라 제가 리플레이를 받기 위해 준비한 겁니다. 적호 님이 저 모르게 이 시설을 이용하시려 할 줄은 몰랐습니다.”
김신록의 말을 들으니 상황 파악이 됐다.
이 방에는 한 명이 누울 수 있을 만한 크기의 소파 외에 협탁이 놓여 있었다.
협탁 위에는 동색의 향로가 있었는데, 저번에 김신록에게 리플레이를 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과 같은 형태였다.
김신록은 나에게 리플레이를 받기 위해 수면향을 비롯해 이 공간을 준비한 모양이었다.
‘김신록은 적호 몰래 이 시설을 준비했고, 적호는 김신록 몰래 이 시설을 사용하려다가 걸린 거구나.’
부전자전이라는 말이 참 잘 어울렸다.
김신록이 아직도 적호에게 화가 난 것처럼, 적호도 아들의 기분을 풀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네가 이곳을 쓰느니 차라리 내가 쓰는 게 낫다!”
적호는 강경한 태도로 소파에 드러누우며 말했다.
“자, 조의신! 저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어서 리플레이를 써 주십시오.”
김신록이 누운 적호를 멀리서 지켜보며 아주 어두운 얼굴을 했다.
이 상황에서 정말 리플레이를 써도 괜찮은 걸까?
내가 부자 사이를 틀어지게 한 거나 다름없지 않은가.
황지호가 상황을 수습했다.
“싸울 만큼 사이가 좋아진 건 경사스러운 일이다만, 그만하도록.”
적호가 드러누운 소파 옆, 황지호가 스툴을 끌어다가 앉았다.
황지호의 손에는 동색의 향로가 들려 있었다.
이번에도 직접 수면향을 다룰 생각인가 보다.
“조의신,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으니 리플레이를 하려면 사전에 내게 말하거라.”
이미 늦었지만, 조금 후회하고 있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그냥 호랑이들한테 다 말할걸.
나는 먼저 김신록에게 사과하기로 했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적호 님께서 제게 밝히지 않은 것뿐이니까요. 저도 그 리플레이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리플레이를 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맞습니다, 조의신. 조의신이 사과할 일이 아닙니다.”
합은 척척 맞지만 적호와 김신록 부자가 화해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저 둘을 보니 리플레이를 사용하는 게 점점 꺼려졌다.
플마고 속의 적호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뻔히 알면서 어떻게 리플레이를 쓸 수 있겠는가.
전용 메뉴의 리플레이 항목을 눈앞에 두고도 손가락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을 때.
말없이 서 있던 백호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괜찮다, 조의신.”
백호군은 적호 주변에 있는 호랑이들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이 자리에는 적호의 아들과 황호 그리고 나도 있다. 걱정할 것 없다.”
그 말을 들으니 식어 있던 손끝에 온기가 도는 것 같았다.
리플레이 목록 속, 적호를 택하자 시스템 음이 울려 퍼졌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에이 (4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