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진눈깨비 (2)
―제 아들을 살려 주시면, 아니, 적어도 성년이 될 때까지만 보호해 주신다면 저는 어찌 되어도 좋습니다.
웅족의 피를 뒤집어쓴 적호가 머리를 조아리며 자비를 구걸했다.
적호는 방금 하나를 제외한 호신총을 전부 파괴하고, 웅족의 본거지에 단신으로 쳐들어가 수뇌부를 궤멸시키고 돌아온 참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울 만큼 지쳐 있을 텐데 적호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갈라진 목소리로 쉼 없이 죄를 고했다.
―제 목숨을 내놓아 죗값을 치르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거절한다.
수많은 호족들 사이 가장 앞에 선 호족의 수장 대리, 황호가 차갑게 일갈했다.
적호를 비롯한 모든 호족들은 황호가 이리 차가운 목소리를 내는 걸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네 목숨 하나로 죄를 씻고, 아들을 구명하기에는 지나치게 죄가 무겁다.
내심 적호의 친우인 황호가 그의 편을 들까 경계하던 호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족들은 적호가 긴 기간 고통받기를 원했다.
황호는 적호가 도륙한 웅족의 수급들과 피투성이로 바닥에 납작 붙어 있는 적호를 가리키며 말했다.
―보라, 비록 대죄를 지었으나 적호의 무위는 여전하며 제 혈육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하다. 그 아들이 내 수중에 있는 한, 적호는 호족을 저버릴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적호에게 계약을 제안하고자 한다.
황호는 호족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적호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계약을 제안했다.
―적호가 살아서 죗값을 치르고 내 명을 듣는 한, 나는 적호의 아들을 호족의 후예로 취급하며 그를 보호할 것이다. 단, 적호가 죽는 순간 그 아들을 웅족의 후예로 여길 것이다.
적호에게는 거절할 여지가 없었다.
이런 대죄를 짓고도 감히 하늘 아래에 살아 있는 게 염치없게 느껴졌으나, 죗값을 치르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적호는 자신에게 내려온 단 하나의 동아줄을 움켜쥐었다.
―계약을 따르겠습니다.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죄를 청하는 친우의 모습에 황호가 잠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 모습은 이마를 땅에 붙이고 있는 적호도, 황호의 뒤에 서 있는 호족도 보지 못했다.
황호는 차가운 목소리로 사형 다음으로 여겨지는 최고형을 내렸다.
―대죄를 지은 자에게 엄중히 죗값을 묻겠다. 붉은 형틀을 대령하라!
붉은 형틀에 묶이기 직전, 적호는 계약에 조건을 더해 달라고 요청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있다 해도 부디 저희 부자 관계에 관여하지 말아 주십시오.
호족의 이익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황호는 관대하게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적호는 그날 이후로 붉은 형틀의 사념과 저주에 사로잡혔다.
그사이 이 땅에서 신화와 신비가 잊히며 진족과 인간의 세계는 분리되고 있었다.
두 세계 사이에 접점은 존재했으나, 이에 간섭할 수 있는 건 강력한 힘과 운을 타고난 극소수의 진족과 인간뿐.
그러나 ‘이계 충돌’을 계기로 진족과 인간의 삶이 교차하게 되었다.
호족의 수장 황호는 불안정해진 한반도의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적호를 형틀에서 해방했다.
기나긴 형벌 끝에 풀려난 적호는 호족을 위해 움직였다.
태만해진 황호의 몫까지.
그렇게 이계 충돌이 벌어진 지 약 100년이 흘렀다.
‘어째서 그날 일을 떠올린 거지…….’
옛일을 회상하며 멍하니 있던 적호가 고개를 저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옛날 일이 자꾸 떠올랐다.
현재 적호는 서울을 벗어나 있었는데, 계속 저도 모르게 은광구 쪽을 돌아보곤 했다.
‘오늘은 은광고의 입학 실기 시험이 있는 날이었지. 그래서 그런가?’
교육에 뜻이 있던 신인의 뜻에 따라 신역에는 늘 교육기관이 존재했다.
재산과 배경이 없어도 능력과 열의만 있다면 누구나 공평하게 배움의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신인이 청호와 사라진 후에도 황호는 늘 교육기관을 유지했다.
그리고 적호의 아들은 그 교육기관에서 선생으로서 재직했다.
‘……기분 탓이겠지. 청호의 흔적이나 찾자.’
그리고 그날, 신역으로 복귀한 적호는 아들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게 되었다.
적호의 아들은 웅족의 권속에게 주검도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로 죽었다.
호족의 신역, 그 중심인 은광고에서.
* * *
적호가 아들의 죽음을 받아들인 건, 아들의 발인 전날이었다.
적호는 아들의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봤다.
어쩌면 웅족의 손에 납치되어 생존해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날 그 자리에 있던 건 아들이 아닌 다른 교사일지도 모른다 등등.
모든 가능성을 상정해 조사를 거듭했지만, 결국 아들이 얼마나 처참하게 죽었는지 알게 될 뿐이었다.
적호의 분노는 웅족과 태만한 황호에게 향했다.
“당신의 태만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적호의 분노 앞에서 황호는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다.
계약을 어긴 것에 관한 사죄를 했을 뿐이었다.
“아들의 복수는 제가 하겠습니다. 당신은 계속 태만하게 구십시오.”
적호가 내던지듯 그 말을 뱉고 등을 돌렸다.
그게 황호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황호는 김신록의 죽음 이후에 딱히 움직이지 않았다.
황호가 계속 태만하게 굴 작정이었는지, 아니면 호족 사이에서 미묘한 입장이었던 김신록의 복수를 할 생각이 없었던 건지, 그것도 아니면 적호의 의견을 존중해 준 건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황호의 방치 속에서 사건이 흘러갔다.
‘……내 아들은 죽은 후에도 편히 쉬지 못하는구나.’
은광고 입학 실기 시험으로 아이들이 죽었다.
은광고는 관리 감독에 소홀한 책임을 두고 논란에 휩싸였는데, 가장 큰 비난을 받은 건 적호의 아들이었다.
마침 적호의 아들은 연고가 없는 인간으로 설정되어 있어 여론의 희생양이 되기 알맞았다.
이사회는 아이들을 지키지 못하고 죽은 무능한 교사를 언론에 제물로 던져 줬다.
무고한 중학생들이 죽은 이상, 김신록의 제자들과 동료 교사들이 아무리 항변해도 소용없었다.
슬픔과 분노에 젖은 유가족과 대중 앞에서 이들의 항변은 무의미했다.
“……늦었군. 자네 아들이 기다리고 있을 걸세.”
발인 전날, 한밤중.
청룡이 장례식장에 찾아온 적호에게 말을 걸었다.
청룡은 용족들을 이끌고 김신록을 조문한 것 같았다.
김신록의 조문을 온 호족들은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을 텐데, 용족들은 거의 조문을 왔다니.
애초에 인간의 방식으로 장례가 치러지는 게 이상했지만, 적호의 아들은 새 신분을 만들 때마다 늘 장례식을 염두에 뒀다고 했기에 유지를 받들 수밖에 없었다.
그 유지를 받든 게 아들의 유일한 친우, 용제건이었다.
용제건은 호적상 가족이 없는 김신록의 상주를 맡았다.
“적호 씨, 어서 와. 아들의 장례식에 모습을 드러낸 건 처음이네.”
적호는 붉은 형틀에서 풀려난 이후, 아들의 가짜 장례식에 늘 찾아왔었다.
용제건의 말대로 모습을 드러내고 조문 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용제건은 늘 그랬듯이 김신록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단 한 순간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간 치러 온 가짜 장례식과 달리 용제건은 이번 장례식이 치러지는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듯했다.
“이번에 당신 아들의 가짜 이름은 ‘김신록’이라고 해. 성은 신록이가 정했고, 이름은 내가 정했어. 매번 새 이름을 생각하는 게 귀찮고 힘든 것 같더라.”
용제건은 적호가 묻지 않은 사실을 멋대로 떠들기 시작했다.
아들의 가짜 신분의 이름은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이름의 유래는 알지 못했다.
“왜 김씨 성을 쓴 줄 알아? 가장 흔하고, 호족 중에 김씨 성을 쓰는 사람이 없어서래.”
용제건의 설명은 거기에서 그쳤지만, 적호는 아들이 왜 그 성을 택했는지 깨달았다.
아들은 행여 만일의 사태가 벌어졌을 때 호족이 자신과 엮여 피해를 입을까 염려한 게 분명했다.
적호는 아들의 위장용 얼굴 사진이 들어간 신위, 장례식장 입구에 쓰여 있던 ‘故 김신록(金新綠) 님의 명복을 빕니다’라는 문구를 떠올렸다.
아들이 가짜 얼굴, 가짜 이름으로 추모받는다는 게 갑자기 견딜 수 없이 괴로웠다.
용제건은 고통스러워하는 적호를 지켜보다 말했다.
“나는 언젠가 내 친구가 호족의 후예로서, 당신에게서 따온 이름을 사용하길 바랐는데.”
용제건의 말에서는 진득한 그리움과 슬픔이 묻어났다.
용제건의 말에 순간 적호는 문득 어느 사실을 떠올렸다.
용제건의 근본은 소원을 이루어 주는 여의보주(如意寶珠).
용제건은 유희용으로 유명하지만, 본래 여의주의 용이라고 불리지 않았던가.
친우의 죽음을 이리도 슬퍼하는데, 친우를 위해서라면 그 힘을 발휘해 주지 않을까?
적호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용제건에게 물었다.
“……당신은 여의보주였죠.”
용제건은 적호가 아직 말을 끝맺지도 않았는데, 딱 잘라 말했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 소원은 빌 수 없어.”
적호는 용제건의 말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텅 빈 장례식장, 용제건의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부활을 원치 않나 봐. 신록이는 늘 자기가 태어난 바람에 아버지가 고통받는다고 여겼거든. 이참에 잘됐다고 생각하나 봐.”
용제건은 손 위에 옥색의 여의보주를 구현했는데, 이능파가 흐릿했다.
수천 년을 산 용족의 총아가 품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미한 이능파였다.
용제건은 이미 수차례, 어쩌면 수십, 수백 차례 김신록을 살리고자 시도한 것 같았다.
마지막 희망이 산산조각 나자 적호는 하늘과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들이 되살아나지 못하는 이유조차 전부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적호는 이후 적연으로 몸을 감추고 아들의 발인과 운구, 화장까지 지켜보았다.
아들의 장례식 이후로 적호는 검은 옷만 입게 되었다.
한 번도 아버지답게 굴지 못한 속죄의 의미를 담아서.
* * *
적호는 아들의 복수를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혼자서 웅족의 흔적을 찾고 싸우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웅족은 12지 동맹의 결계를 뚫고 들어왔다. 누군가가 배신한 거다.’
적호는 배신자의 후보를 제외해 보려 애썼다.
은호에게 큰 은혜를 입었던 토족.
호족과 비밀리에 동맹을 맺고 있던 견족.
그리고 확실치는 않지만 아들과 교류가 있던 용족.
이 셋 외에는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아니, 용족도 아들과 친분이 있었을 뿐, 용족을 위해 웅족과 손을 잡고 자신의 아들을 저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웅족의 배신 과정을 아는 적호의 입장에선 확실한 조건을 걸고 맹약을 나눈 토족과 견족 외에는 믿을 수 없었다.
적호는 고민 끝에 토족의 신역을 수소문해 직접 찾아갔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토족의 신역은 초토화되어 있었다.
달토끼떡 본사를 통해 옥토연과 접선에 실패했을 때부터 뭔가 이상하다고 여겼는데, 토족은 누군가에게 습격당해 전멸당한 듯했다.
회토의 토끼, 옥토연만이 윤회의 굴레를 넘어 다시 부활해 있었다.
“옥토연! 무슨 일이 있던 겁니까?”
옥토연은 말라붙은 핏자국과 잿더미 사이에서 실실 웃다가, 울다가, 비명을 지르기를 반복했다.
적호가 이능파를 흘려 넣어 진정시킨 후에야 옥토연이 입을 열기 시작했다.
“서호와는 만났어? 서호는 호족한테 갔잖아. 서호는 잘 있지? 이호랑 재호는 지키지 못했어. 미안해, 미안해…… 은호…….”
적호는 옥토연이 무엇을 말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적호가 되물었다.
“서호가 누구입니까?”
“……몰라? 서호는 호족한테 안 갔어? 은광고에 없어? 은호, 은호 어떻게 해, 서호가!”
옥토연은 그 뒤로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발광했다.
이능파를 방출하면서 그저 잠든 은호를 연호하는 걸 보니 옥토연이 미쳤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적호는 광증에 빠진 옥토연과 대화를 나누는 걸 포기하고 견족과 접촉하기로 했다.
견족과 접선하기 위해선 맹약과 이어진 호족의 신수를 회유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호족의 신수는 이미 죽은 이후였다.
‘신수가 죽었다니……!’
호족의 신수가 남긴 미약한 기운을 따라 천익산을 뒤진 결과.
적호는 신수의 주검을 발견했다.
신수의 무덤 앞에는 ‘솜뭉치’라는 작은 명패와 함께 강아지용 장난감, 꽃 몇 송이가 놓여 있었다.
적호가 황망한 얼굴로 신수의 무덤 앞에 서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적호의 적연을 꿰뚫어 보고 말을 걸었다.
“……누구세요?”
국화 꽃다발과 강아지 간식 세트를 들고 온 여학생의 교복에 ‘안다인’이라는 명찰이 붙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