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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89화 (487/925)

70. 진눈깨비 (3)

리플레이의 레벨이 올라 적호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내 예상대로라면 적호는 플마고의 게임이 시작된 시점, ‘이름 없는 조연의 프롤로그’ 때부터 사망하던 순간까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경험하게 될 것이다.

프롤로그가 시작된 시점인 첫날에 사망한 김신록보다 리플레이가 길어질 게 분명했다.

만약 꿈속의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동일하게 흐른다면 적호는 1년 넘게 잠들어야 콘크리트층 붕괴 사건 시나리오를 목격할 거다.

하지만 여태까지 리플레이에 소모된 시간을 고려하면, 꿈속에서 대상자가 느끼는 시간은 몹시 빠르게 흐르는 것 같았다.

‘레벨도 올랐으니 적호의 꿈속 시간은 더 빠르게 흐르겠지.’

적호의 반응을 관찰한 결과, 그 가설에 확신을 더 크게 얻었다.

황지호가 수면향으로 재우기 무섭게 이능파가 크게 요동친 걸 보면, 적호는 곧바로 김신록의 부고를 들은 것 같았다.

플마고 속 적호가 언제 부고를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조련계 웅족이 펼친 결계가 15분 정도 유지되지 않았던가.

현실의 2, 3초가 꿈속의 15분 이상인 셈이니 적호의 꿈속 시간은 어림잡아 수백 배 빠르게 흐르는 게 분명했다.

삣, 삐잇.

그사이에 또 무슨 일이 있던 건지 적호의 심박수와 혈압, 체온 데이터에 미미한 변화가 있었다.

현재 적호의 바이털 사인은 김신록이 사전에 준비한 의료 기기에 의해 모니터링되는 중이었다.

활력징후 리스트를 체크하던 김신록이 불안함 반, 분함 반 섞인 표정을 지었다.

“적호 님의 안색이 나쁩니다. 체온이 또 떨어졌습니다. 맥박도 느려지고…… 적호 님께는 회복 아이템도 못 쓰는데 어찌합니까!”

김신록이 틀린 말은 안 했지만 수치상 0 .1 단위의 변화에 불과해 모든 활력징후는 정상 범위에 속했다.

가족을 과보호하는 건 적호와 아주 판박이였다.

“이능파 상태가 불안정하군. 하지만 정상 범위다.”

황지호가 적호를 살피며 그렇게 말했지만, 김신록은 안심하지 못했다.

황지호는 마치 투정을 부리는 조카나 손주를 보는 얼굴로 김신록을 바라봤다.

교복을 입은 노친네가 교사인 김신록에게 저러고 있으니 좀 뭐했다.

“김신록, 적호가 왜 그리 너를 꾸중했는지 이제 알겠나?”

“……저는 회복 아이템이 통합니다. 이미 리플레이를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하하하하! 그렇게 따지면 적호는 너보다 한참 강한 전설계 호족이고, 사선을 몇 번이나 살아 돌아온 역전의 영웅이기도 하다. 네가 견딘 걸 어찌 못 견디겠느냐.”

황지호가 처웃으며 뱉은 말에 김신록이 입을 다물었다.

저 말에 반박하면 자기 아버지의 위업을 부정하는 것 같아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네가 적호가 강한 걸 몰라서 그런 건 아닐 테지. 적호도 마찬가지다.”

끼익.

말을 마친 황지호가 스툴을 하나 끌어다 적호 가까운 곳에 두었다.

황지호가 툭툭 스툴 위를 두드리자 줄곧 서 있던 김신록이 주저하다가 앉았다.

김신록은 아들이 죽은 악몽 속을 헤매는 적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신수의 무덤에서 만난 것을 계기로 적호와 안다인은 안면을 트게 되었다.

처음에 적호는 자신의 능력을 꿰뚫어 보고 신수와 연이 있었던 안다인을 경계했다.

그러나 곧 안다인의 올곧은 성품에 감화되어 그녀를 신뢰하게 되었다.

적호의 아들이 살아 있다면 1학년 1반의 반장인 안다인의 담임 교사가 되었을 거라는 사실도 한몫했다.

‘안다인 학생과 이야기하면 할수록 감탄하게 되는군. 이렇게 바르고 재능 넘치는 학생이 제자라면 가르치는 보람이 있었을 텐데.’

적호는 아들을 해한 배후를 찾을 겸, 아들을 추억할 겸 은광고를 자주 찾게 되었다.

그러다가 적호는 안다인 외에도 한 학생을 주목하게 되었다.

바로 지익회장인 성시완이었다.

적호가 성시완을 처음 본 건 아들의 장례식장 때였다.

아들의 관을 운반하는 건 대부분 교사진이 맡았지만, 김신록이 담임을 한 반장 외에도 성시완이 운구 행렬에 섞여 있었다.

성시완은 김신록에게 지익회 고문을 맡아 달라며 부탁하다가 다소 친해진 모양이었다.

‘예전에 아들을 잘 따랐던 성국언 국회의원의 사촌이었지.’

성시완은 장례식 때 봤을 때보다 더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시완은 지익회장에 재임하고 있었는데, 올해 고문이 된 교사와 충돌이 잦은 듯했다.

지익회 고문의 이름은 최편득이었다.

‘안다인 학생의 담임도 최편득 교사였는데…….’

최편득에 관해 조사해도 딱히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황호를 비롯한 호족의 도움을 받지 못해 표면적인 조사에 그치긴 했으나, 서류상 최편득은 아주 깨끗한 교사였다.

적호는 최편득을 그저 학생에게 까다롭게 구는 교사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어딘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적호는 아들의 복수에 눈이 멀어 12지 내의 배신자와 웅족을 찾는 데에 더 집중했다.

‘사고가 잦군…….’

은광고 안팎으로 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은광고 내적으로는 교무부장 제갈재걸이 돌연 퇴직해 학교 행정이 크게 흔들렸는데, 최편득이 임시 교무부장 자리에 오르며 상황이 수습되었다.

외부에서는 어린이날에 잠실 야구장에 돌연 나타난 이계로 인해 큰 인명 피해가 나서 나라가 뒤집어지기도 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주오 그룹과 TC 그룹이 대립하며 정세가 불안정하게 흘러갔지만, 적호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제 아들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것을 모른 척하는 건 불가능했다.

한밤중, 천익산에 있는 신수의 무덤 앞.

적호는 그곳에서 넋을 놓고 있는 안다인을 외면할 수 없었다.

“…….”

여름 방학 사이, 은광고에 큰일이 벌어졌다.

1학년 0반, 1반, 2반 합동으로 간 청소년 수련회에서 이계와 에너미 대량 발생 및 0반 학생의 폭주로 수많은 학생들과 주민이 사망했다.

세간에서는 이계와 에너미 쪽에 관심이 더 쏠리긴 했으나 사실상 가장 많은 피해를 낸 건 어느 학생의 폭주였다.

폭주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섬을 덮은 에너미로 인해 더 큰 피해가 났겠지만 그 학생은 죄책감을 못 이기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었다.

그 학생의 이름은 김유리, 안다인의 절친이었다.

“……유리는 제가 힘들 때 곁에 있어 준 유일한 친구예요. 저는 유리가 괴로워할 때 뭘 한 걸까요.”

적호는 어떻게 안다인을 위로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적호는 자신의 죄에 짓눌려 정작 친우들이 괴로워할 때 곁에 있어 주지 못했으니까.

아니, 친우들의 괴로움의 근원은 대부분 자신 탓이었다.

“이능을 각성할 때쯤에 예언 이능을 가진 분을 만난 적이 있어요. 아니, 어쩌면 단순한 사기꾼일지도 모르지만요.”

신수를 잃은 탓일까, 천익산은 조금씩 죽어 가고 있었다.

적호는 언젠가 지맥이 회복되고 다시 신수가 태어나리라 기대했지만, 어째 천익산은 날이 갈수록 색과 생기를 잃어 갔다.

어둠 속에서 안다인이 적연으로 몸을 감춘 적호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주변이 어두워지면 새벽 별을 따라가라는 말을 들었어요. 하지만…….”

을씨년스러운 천익산의 밤하늘은 별빛 하나 없이 새카맣기만 했다.

과연 새벽이 올 건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어두웠다.

그때, 누군가가 어둠을 헤치고 짐승처럼 빠르게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파삭!

적호는 저도 모르게 적뢰를 뿌릴 뻔했으나 접근하는 기척이 누군지 알고 손을 거뒀다.

안다인도 상대를 알아본 것 같았다.

“……상희 언니?”

수풀 속에서 부스스한 머리를 한 유상희가 휘청거리면서 걸어 나왔다.

유상희의 눈에는 핏발이 서 있었고 손에는 핏빛 칼날이 들려 있었다.

유상희가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만든, 마수를 사냥하는 복수의 칼날이었다.

텅 빈 눈으로 안다인을 바라보던 유상희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하니까 밤에는 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상훈아.”

“…….”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는 유상희는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적호는 아들이 죽은 날에 같이 희생당한 학생들에 관해 조사를 했다.

그 조사 대상에는 유상훈의 친누나, 유상희도 포함되어 있었다.

유상희는 치유의 힘을 가졌던 아케아 대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와 계약한 이후 가끔 헛것을 보곤 했다.

복수의 상위 존재는 유상희의 복수심을 부추기기 위해 가끔 유상훈을 보여 줬다.

“상희야, 먼저 가면 어떡하냐.”

“봐, 명수야. 여기 상훈이가 와 있잖아.”

안다인이 말을 잃고 있을 때, 학생부회장 지명수가 숨을 몰아쉬며 나타났다.

지명수는 상황을 설명했다.

두 사람은 늦은 시각까지 마수종 에너미가 등장하는 이계를 함께 공략했다.

지명수가 유상희를 집까지 바래다주려 했을 때, 갑자기 유상희가 동생을 마중 가야 한다면서 은광고로 뛰어가다가 여기까지 왔다고 한다.

“미안. 원우가 있으면 말릴 수 있을 텐데, 나 혼자 힘으론 잘 안 되네.”

“도원우 선배님은 아직 많이 바쁘신가요?”

“요새 집안일로 좀. 학생회 일도 밀렸고. 원우는 먼저 집에 갔는데, 에어 리무진에 올라타자마자 일하더라.”

도원우는 최근 TC 그룹 내부 사정에 휘말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사건으로 차기 총수 일가가 중상을 입은 이후로 도원우는 계속 예의 그 집안일에 시달렸다.

그 와중에도 도원우는 학생회장으로서 학생회 업무를 소화했고, 유상희의 기약 없는 복수도 도왔다.

도원우는 오늘도 유상희와 함께 이계 공략을 마치고 지명수에게 유상희의 배웅을 부탁한 후에 먼저 귀가했다고 한다.

“미안해, 상훈이가 아니라 다인이구나. 어두워서 잘못 봤어.”

“……아니에요. 주변이 많이 어두웠으니까 헷갈릴 수도 있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유상희가 몹시 미안해하며 안다인에게 사과했다.

유상훈과 안다인의 체격 차를 생각하면 아무리 어두워도 헷갈릴 수가 없는데, 아이들은 모두 유상희의 변명을 받아들였다.

지명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유상희에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늦었다. 그만 들어가자.”

“응, 다인이 먼저 바래다주자.”

안다인이 적연으로 몸을 감춘 적호에게 눈인사를 하고 완전히 하산한 후에도 적호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적호는 뇌리에 유상훈의 이름을 부르던 유상희의 모습이 생생히 남아 있었다.

‘나도 복수를 상징하는 상위 존재와 손을 잡으면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들의 복수를 할 힘을 얻을 수 있을까.’

천신을 배반한 죄와 저주를 짊어진 적호에게 누가 가호를 내리고 광림을 빌려주겠는가.

적호는 이 생각을 어리석다고 하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적호는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내 아들이 죽었는데, 어째서 할 수 있는 게 없는 거지! 나는 마수를 도살하는 저 아이만도 못하구나.’

조사를 하고, 시간이 흐를수록 상황은 악화되었다.

적호가 찾은 실마리와 그에 연루된 존재들은 실종되거나 죽어 있거나 사라져 있었다.

마치 적호가 어떻게 나올지 아는 것처럼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듯했다.

소름 끼치는 무언가가 적호의 주변을 옥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수렁 속으로 빠지는 기분이 들었지만 적호는 헤어나올 방법을 알지 못했다.

‘백호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까.’

적호는 도움을 청할 만한 유일한 상대를 떠올렸다.

신역의 수인인 백호는 은광구에서 벗어날 수 없으므로 마음먹고 찾는다면 그와 접촉할 수 있을 것이다.

백호는 아들의 스승이기도 했으니 힘을 빌려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호는 금방 생각을 바꾸었다.

‘진명을 잃은 친우를 위험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그렇게 적호가 아무런 실마리를 잡지 못한 채 겨울이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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