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92화 (490/925)

70. 진눈깨비 (6)

적호가 1년 동안 리플레이에 시달리느라 너무 감성적으로 변한 게 아닐까.

아니, 김신록에 관한 건에 있어선 언제나 감성적이긴 했는데…….

적호는 방금까지 상태가 안 좋았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쉬지 않고 감사 인사를 쏟아 냈다.

말 좀 그만하고 쉬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나 적호도 향록이 만든 영약을 먹은 탓인지 지나치게 건강해 보였다.

계속되는 낯 뜨거운 말에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호랑이들이 슬슬 말려 줬으면 했지만, 그 호랑이들의 우두머리가 대놓고 부추겼다.

“하하하하! 그래, 조의신. 너는 우리 호족의 은인이다. 적호, 감사의 마음을 잊지 말도록.”

저 노친네는 내가 민망해하는 걸 알면서도 저런 소리를 했다.

적호가 다음에는 노친네에게 적뢰를 적중시켰으면 좋겠다.

황지호는 분신이 여러 개니까 하나 정도는 번개 세례를 받아 행동 불능이 되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적호는 네가 끓인 차를 마시고 싶어 할 것 같군.”

“네? 아, 차를 준비하겠습니다.”

역시 믿을 만한 건 백호군밖에 없었다.

백호군의 말에 김신록은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보통 황지호가 있는 자리에선 노친네가 차를 준비하는데, 적호의 마음을 생각해 김신록이 오미자차를 대령했다.

적호가 찻잔을 받아 들 때쯤에 겨우 감사 인사 세례가 멎었다.

“하하하하하! 그래, 이만 봐주마. 조금이라도 우리의 마음을 알아줬으면 됐다.”

황지호는 큰 선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말했다.

처웃는 입에 스콘을 밀어 넣고 싶어졌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콘을 응시했는데, 잘 보니 플레인 스콘이 아니라 곶감이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김신록이 자기 입맛에 맞는 스콘을 고른 모양이었다.

백호군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과상을 바라보자 김신록이 백호군의 눈치를 봤다.

“백호 님, 죄송합니다. 이 자리에 오는 건 저와 조의신뿐이라고 상정해서…….”

“죄송할 필요 없다. 여기에 백호가 올 예정은 없지 않았느냐? 잘 준비했다. 백호, 많이 드십시오.”

적호는 곶감이 큼지막하게 박힌 스콘 그릇을 백호군 앞으로 밀었다.

아직도 백호군이 김신록을 기절시켰던 일로 마음이 상해 있는가 보다.

리플레이 건으로 아들을 향한 애틋한 마음이 더 커졌으니 한층 더 원한이 깊어졌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된 이상 백호군 옆에 자리를 잡고 그의 몫까지 곶감 스콘을 먹어야겠다.

“적호의 컨디션은 아주 좋은 것 같으니 이야기를 들어 보겠다. 무엇을 보았지?”

김신록이 끓인 차에 찬사를 쏟던 적호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적호가 찻잔을 내려놓고 답했다.

“너무 많은 것을 봐서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꿈속의 시간은 1년 정도 흘렀을 거라고 하는데, 맞나?”

“네, 저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사망했습니다.”

적호는 담담하게 말했는데, 듣는 김신록은 그렇지 못했다.

눈 속에서 적호가 허무하게 죽는 시나리오가 공개된 후, 적호의 광팬이 탈퇴하기 직전까지 게시판을 도배하며 플마고를 욕했던 기억이 생생했다.

적호의 광팬은 플마고를 접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작년 입학 실기 시험은 12월 초에 있었으니 1년이 좀 넘게 지난 셈이군.”

“기억하고 있는 것을 시간대별로 정리해 보고서로 제출하겠습니다.”

“그게 좋겠군. 조의신, 질문할 게 있나?”

리플레이 건에 관해 질문할 게 많았다.

자세한 질문은 적호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 하는 게 효율이 좋을 거다.

그러니 애초에 리플레이를 한 목적이 된 ‘눈’에 관해 질문하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내린 눈에 관해서 묻고 싶은 게 있어요.”

플마고 속 크리스마스이브, 학생 자치기구 주최로 자선 이벤트를 열던 중.

은광고는 삿된 눈으로 뒤덮인다.

정체불명의 삿된 눈에 관한 유일한 단서는 사망 직전 적호가 읊었던 혼잣말이었다.

풍백과 우사 그리고 운사.

적호는 그 삿된 눈이 내리기 시작한 순간, 적연을 풀고 눈을 맞는다.

‘삿된 눈에 의해 적연이 풀린 것 같지 않았어. 만약 그랬다면 적호가 좀 더 경계했겠지. 적호는 그 눈을 피부로 맞기 위해 적연을 푼 것 같았는데…….’

적호는 그 눈을 맞고 뭔가를 깨달은 것 같았다.

심증을 기반으로 한 추측이라 옳고 그른지 판단하기 힘들었지만.

적호가 자진해서 적연을 푼 게 아니라고 하면, 삿된 눈이 가진 힘을 파악할 수 있는 소재가 될 거다.

“눈 말씀이십니까? 그날 온 건 눈이 아니라…….”

눈이 아니라고?

적호는 눈이 아닌 다른 것을 봤나?

그날 눈이 온 건 확실하니 다른 가능성을 생각하고 있을 때, 적호가 말을 멈췄다.

적호는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닙니다. 제가 잠시 착각한 것 같습니다. 그날 눈이 왔었죠.”

“흠, 정밀 검사를 받은 후에 이야기하는 게 좋겠군.”

“아닙니다! 그저 제가 죽기 직전에 눈이 내리기 시작해 혼동한 것 같습니다.”

적호의 태도가 묘했다.

죽기 직전에 눈이 내린 건 맞긴 한데, 뭔가 마음에 걸렸다.

‘설마 비탄의 웅녀가 온 걸 기억하는 건가?’

적호가 숨을 거두기 직전, 붉은 드레스를 입은 비탄의 웅녀가 나타난다.

비탄의 웅녀가 등장한 후에 적호의 손이 조금 움직였으니 어쩌면 적호는 웅녀가 그 자리에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황지호는 적호의 몸을 한 번 더 살펴본 후 발언을 허락했다.

“저는 그 셋이 내린 눈을 맞아 본 적이 있습니다.”

“맞아 본 적이 있다기보단, 툭하면 눈을 맞았다는 표현이 맞지 않나? 풍백과 우사는 그렇다 쳐도 운사는 화를 잘 안 냈는데 그 힘든 걸 적호가 해냈지. 셋을 동시에 화나게 하면 눈과 우박이 쏟아지곤 했다.”

젊은 시절 말썽꾼 적호의 활약은 들으면 들을수록 새로운 것 같다.

사고뭉치 시절 적호의 거침없는 행보에 김신록은 고개를 갸웃거렸고, 적호는 당당하게 말했다.

“온화한 운사는 화를 잘 내지 않았죠. 하지만 그 힘든 걸 황호도 어렵지 않게 해냈습니다. 왜 남 말하듯 말하는 겁니까?

“하하하하! 너보다 횟수는 훨씬 적다.”

“고작 네다섯 번을 훨씬 적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래 살다 보니 황호의 숫자 감각이 이상해진 것 같군요.”

말하는 걸 보니 황지호 저 노친네도 적호 못지않았나 보다.

적호의 말이 틀린 건 아닌지 황지호는 한 마디도 부정하지 않고 처웃기만 할 뿐이었다.

“하하하하하! 그래서, 넌 그 눈을 맞으며 뭘 느낀 거지?”

“그 눈은 풍백과 우사, 운사가 내리던 눈과 상당히 유사하지만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그 눈에는 장난질에 대한 보복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악의와 사기(邪氣)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눈을 내린 게 그들이 아닐 가능성이 있나?”

황지호는 다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옛 전우가 그 삿된 눈과 엮이지 않았으면 하는 희망이 여실히 보였다.

그러나 적호는 고개를 저었다.

“비록 악한 기운을 품고 있다고 하나 그들이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내릴 수 있는 눈입니다. 저는 그 눈에서 풍백과 우사의 기운을 느꼈습니다.”

죽림 속 가든에서 고문당한 웅족이 ‘그분들’이라고 칭한, 바람과 비를 다루는 쌍둥이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다.

풍백과 우사는 각각 바람과 비를 다루고, 둘의 생김새는 쌍둥이라고 부를 만큼 닮았다고 했다.

그러니 어느 정도 각오했을 텐데, 호랑이들은 괴로움을 숨기지 못했다.

“풍백과 우사가 신역에 삿된 눈을 뿌리다니…….”

적호가 오미자차를 한 모금 마시고는 말꼬리를 흐렸다.

호랑이들 중 가장 먼저 기운을 차린 건 백호군이었다.

“운사는?”

백호의 질문에 적호가 고개를 저었다.

“저는 운사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적호의 말에 기운을 잃었던 노친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황지호는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이상하군. 풍백과 우사의 힘만으로는 눈을 내릴 수 없다. 그들이 비바람은 불러도 빗물을 눈송이로 바꿀 수는 없다.”

“네, 그건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피부로 직접 느껴 봤을 때 운사의 기운을 감지할 수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무엇보다?”

적호는 이 부분은 확실하지 않은지 고심했다.

“……하늘이 새하얬습니다.”

“그게 무슨 뜻이지?”

“운사의 특기는 먹구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늘은 흰 구름으로 덮여 있었습니다. 눈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죠.”

먹구름이 검게 보이는 원리를 아주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구름 속 물방울이 커질수록 빛을 반사하는 대신 흡수하게 된다.

그 결과 구름을 통과하는 빛이 적어져 어둡게 보이는 거다.

즉 두껍고 밀도가 높은 구름일수록 어두워 보인다.

비나 눈은 수증기가 무거워져 내리는 것이니, 보통 먹구름에서 비와 눈이 내린다.

신화 속 존재와 이능은 물리 법칙을 무시하곤 하니 확신할 수는 없지만, 눈을 뿌리는 구름이 하얬다는 건 뭔가 이상하다.

“운사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고, 먹구름도 보이지 않았다라.”

“한 번 더 리플레이를 하면 확신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적호 님, 안 됩니다. 몸 생각을 하셔야죠. 조의신도 오늘은 지쳤을 겁니다.”

“나도 은인의 걱정을 했다. 심려치 마라.”

적호는 내 걱정을 하느라 리플레이 제안을 삼갈 생각인 듯하다.

자기 몸 생각은 안 하는 것 같아 아들이 불만스럽게 느끼는 것 같은데.

어차피 나나 적호의 몸 상태가 만전이라도 리플레이를 무한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다.

“리플레이는 바로 사용할 수 없어요.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요.”

손민기에게 시험했을 때에도 그렇고 리플레이에는 쿨 타임, 초기화까지 대기 시간이 존재했다.

적호는 태연하게 행동하고 있지만 정신적으로는 꽤 지쳐 있을 거다.

처음 눈을 떴을 때 꿈과 현실을 혼동했던 것도 그렇고, 회복까지 얼마나 걸릴지 알 수 없다.

“그러면 운사에 관해서 더 알아봐야겠군. 적호, 오늘은 쉬고 내일 내 서재로 오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오늘 자리는 이만 여기에서 파하는 건가?

나중에 적호가 제출할 예정인 보고서를 보여 달라고 부탁해야겠다.

운사에 관한 기록도 보여 달라고 요청해 보고…….

헤어지기 전 할 말과 기숙사로 돌아간 이후의 행동방침에 관해 생각해 보고 있을 때, 황지호가 물었다.

“적호에게 할 질문이 더 있나?”

“보고서를 읽고 질문하고 싶은데.”

“그래, 그렇다면…….”

어쩐지 불길했다.

당장 기숙사로 돌아가겠다고 선수를 치려고 했지만, 그 전에 황지호가 먼저 말했다.

“조의신, 너는 죽림으로 향하기 전에 출처를 밝힐 수 없지만 중요한 정보를 얻었다고 했지. 그걸 분석할 거라는 말도 했고. 아마 너는 그걸 분석하느라 밤을 샜겠지.”

황지호는 마치 내가 데이터를 분석하는 걸 본 것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그 데이터는 아마 황보윤 교장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더군. 그렇지 않았으면 네가 교장에게 갑자기 면담을 청했을 리도 없고, 교장이 네 면담 신청에 응할 리도 없겠지.”

“……조의신 군, 황보윤 교장과 만난 겁니까? 황보윤 교장이 재직 중에 학생과 개인적으로 면담한 건 한 손으로 꼽을 정도로 적습니다.”

평소에도 얼굴을 숨기고 다니는 상사와 만났다는 사실이 이상했던 걸까, 김신록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황지호의 날카로운 질문이 계속되었다.

“조의신, 어제 네가 밤을 샌 이유에 관해서 들어 보도록 하지. 한밤중에 성시완과 계이담, 두 사람과 함께 선도부 회관에 간 이유에 관해서도.”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