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진눈깨비 (7)
학교 안에서 호족의 눈을 피해 움직이는 게 쉬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다.
그러나 이렇게 일찍 발각될 줄은 몰랐다.
호족의 가든 건으로 바쁠 테니 내 행적을 파악하고 지적하는 데에 조금 더 걸릴 줄 알았는데.
“계이담 군과요? 또 대련을 하신 겁니까? 선도부 회관에 선도부원 전용 대련장이 있긴 합니다만…….”
김신록이 대놓고 이상하게 여겼다.
얼마 전에 계이담을 죽사발로 만들어 놓고 야밤에 또 만난 게 이상한 모양이다.
대련을 위해 또 만난 거라면 변명 거리가 되겠지만, 문제는 시간과 장소다.
지익회 주요 인물 두 명이 일반 학생과 아무 상관 없는 선도부 회관에서 한밤중에 대련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김신록은 계이담의 문병을 갔다가 대련의 원인에 관해 들었지.”
김신록은 지익회 고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일단은 지익회장인 계이담에게 왜 1학년 기숙사생과 싸웠는지 물어도 이상하지 않다.
상대가 ‘계’새끼인 게 마음에 걸리지만.
“계이담의 말에 의하면 옛날에 조의신 네게 잘못한 게 있다고 하던데…… 조의신, 너는 은광고의 입학 실기 시험을 치르기 전에는 은호가 있던 세계에 있지 않았나?”
“그렇죠. 그래서 은호가 제 나이를 생각 안 하고 조의신을 ‘의신이 형’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황지호의 말에 적호도 의문을 품은 듯했다.
‘계’새끼의 입방정이 화를 자초했다.
저런 개소리를 뒤에서 했다는 걸 알았다면 선도부 회관에서 팼어야 했는데.
계이담이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든 게 열받긴 했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어차피 드러나는 건 계이담의 밑천뿐이니까 말해도 상관없겠지.’
나는 계이담에 관해 솔직하고 객관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옛날에 엮인 적이 있어. 근성도 없고 인성도 바닥이고 가지고 있는 정보도 적고 나보다 지나치게 약하니까 별 도움이 되진 않을 거야.”
굳이 장점이 있다면 팼을 때 스트레스가 조금 풀린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얼굴을 보면 스트레스가 쌓이니 크게 보면 시간 낭비에 불과했다.
결과적으로 계이담은 도움이 안 되는 악플러, 인격이 파탄 난 쓰레기에 불과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호랑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쪽을 봤다.
‘계’새끼도 내가 있던 세계에서 왔다고 간접적으로 인정했으니 조금 놀란 걸지도 모르겠다.
“하하하하! 조의신 네가 이렇게까지 악평을 하다니! 어떤 짓을 했기에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
“계이담 군은 은광고 내의 평가가 나쁘지 않습니다. 고문인 제가 봐도 괜찮은 지익회장인 듯합니다. 이 세계에 와서 다소 개심했거나 본색을 숨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군요.”
김신록은 지익회 소속 제자를 감싸 줬다.
어쩌면 김신록이 계이담의 문병을 간 것도 진짜 계이담을 걱정해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적호는 김신록의 그 마음을 알았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아들을 바라봤다.
“네가 계이담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아주 잘 알았다. 그렇다면 한밤중에 계이담과 동행하여 선도부 회관에 간 건 그만큼 중요한 일이었다는 거겠지?”
계이담 때문에 되는 일이 없는 것 같다.
이번 건은 계이담이 없었더라도 들통날 사안이긴 했지만, 어쨌든 계이담 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말을 신중하게 택하자.’
그의 생애를 엿본 이후, 옛 한국 지부장이 어째서 진족과 후예를 그리 경계했는지 잘 알게 되었다.
옛 한국 지부장과 거래를 한 상대는 마족이었고, 마족은 어느 진족과 손을 잡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상당히 지명도가 있는 그 진족은 의도를 숨기고 옛 한국 지부장에게 접근해 몇 번이나 그를 떠보곤 했다.
그 진족은 한반도의 안정화를 위해 협력하겠다며 손을 내밀었고, 옛 한국 지부장은 그 진족과 손을 잡을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행히 그 전에 속내를 파헤쳐 최악의 사태는 면했지만.
‘그 진족이 긴 꼬리일 가능성이 크겠지.’
그 진족이 얼마나 간교하게 옛 한국 지부장을 꼬드기려 했는지 잘 알았기에, 그는 자식들에게 진족과 후예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대를 두 번 거친 결과, 성시완은 비교적 진족과 후예를 딱히 의식하지 않았으나 성국언은 달랐다.
성국언의 경우, 은광고에서 겪은 일들이 큰 영향을 미친 것 같긴 하지만…….
‘옛 한국 지부장을 속이려 한 진족이 호족이 아닌 건 분명해. 그러니 밝혀도 되겠지.’
옛 한국 지부장의 유지도 있으니 조금 더 정보를 정리하고 전달하고 싶었는데, 이렇게 된 이상 대략적인 사항이라도 전해야겠다.
진족과 후예를 공격하는 기믹에 관한 수단은 좀 더 생각해 보고 전하고, 공유해야 할 정보는 바로 전달하면 될 거다.
“어둠의 시대 말기, 정확히는 무쇠팔 송만석 선배님이 플레이어 활동을 시작한 무렵의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장이 누구였는지 기억해?”
“기억한다.”
황지호가 곧바로 대답한 건 의외였다.
태만하게 지내던 놈이니 금방 잊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그러니까 사망한 것으로 처리된 신분을 쓰던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지.”
옛 한국 지부장의 기억 속에서 황지호가 등장했다.
수십 년 전, 황명 그룹의 전신이 되는 기업 사장의 모습으로.
대충 역산해 봤을 때 그 모습은 현재 황지호가 사용하는 분신 중에선 최고령인 황명호보다 더 나이가 있었다.
“아, 그때 일은 저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적호와 김신록도 옛 한국 지부장을 기억하고 있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꽤 오래된 이야기지만 옛 한국 지부장이 찾아와 황지호에게 한 제안을 떠올리면 기억할 수밖에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일면식도 없는 나를 찾아와 ‘천자(天子)’를 빌려달라고 할 줄은 몰랐다. 담이 크더군.”
황명 그룹이 소유한 크루저, ‘천자(天子)’.
지금은 세월이 흘러 구형이 되었기에 은광고 학생 전용 실기 전함으로 사용하고 있는 거대한 여객선이다.
어둠의 시대 당시엔 희귀했던 이계 금속으로 도배를 한 천자는 해상에 나타난 이계에 대응하기 위해 협회와 플레이어군에 징집된 적도 있었다.
징집이라고는 하지만, 협회나 정부가 처한 상황을 고려하면 호족한테 큰소리를 낼 수 없었다.
위험한 정세 속에서 호족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찌 되겠는가.
황지호가 싫다고 하면 천자는 결코 징집될 수 없었다.
“말을 길게 하지 않았는데도 강직한 성품과 기개가 느껴졌지. 과연 그 시대를 헤쳐 나온 플레이어다운 모습이었다. 그자가 이번 일과 관계가 있나?”
“어.”
김신록은 옛 한국 지부장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으니, 내가 뒤에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다.
김신록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그분은 성국언 선배님과 성시완 선배님의 조부야.”
황지호는 그것까지는 몰랐는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듣고 보니 성국언과 닮은 것 같기도 하군. 바로 연상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다.”
성국언도 황지호를 찾아가 담판을 지은 적이 있었는데.
조손 간 직접 만난 적이 없는데 핏줄을 속일 수 없는 건지 참 닮아 있었다.
“선배님들과 인연이 닿아서 그분에 관해 알게 됐어. 그러다가 그분이 남긴 정보를 입수하게 됐는데…….”
성시완과 가까워진 걸 계기로 만나게 된 성국언.
성국언의 의뢰로 조사하게 된 은광고 괴담.
‘이무기의 귀천’과 탈환 과정.
선도부회관과 학생회관 사이에 숨은 비밀 통로와 이계 시뮬레이터.
그 안에서 벌어진 일들.
많은 이야기가 있었지만 대부분 생략했다.
나는 호랑이들에게 정보에 관해서만 털어놓았다.
“20%가량 정보가 손실되었다고 하는데, 중요해 보이는 실마리를 찾았어.”
“어떤 거지?”
“한반도에 숨겨진 동결형 이계를 심은 마족과 결탁한 진족의 존재.”
“그 일에 마족만 얽혀 있을 리가 없지. 자세히 말해 봐라.”
나는 디바이스를 켜 데이터 칩에서 추출한 지도 데이터를 전개했다.
전개한 지도에는 붉은 점 몇 개가 찍혀 있었고, 그 옆에 내가 남겨 둔 메모가 적혀 있었다.
“그 진족과 마족의 접선 장소와 시간, 방법을 특정했어. 꽤 예전 정보라 이 정보를 바탕으로 추적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아.”
정보가 오래되었기에 걱정했는데, 호랑이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모든 호랑이들이 밝은 표정으로 지도를 보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조의신. 뒤는 우리가 맡도록 하지. 잘했다.”
“독자적인 은폐 기술을 사용해 접선 사실을 숨기고 있던 것 같군요. 들키기 어려운 만큼 한 번 드러나면 파훼하기 쉽죠. 이 정도면 추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도와 메모를 저장하던 호랑이들이 나를 보며 흐뭇해하는 얼굴을 했다.
저 표정을 보니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또 내 얼굴에 금칠을 할 작정인 것 같았다.
“하하하, 우리의 은인이 계속 은혜를 베푸는군. 이를 어찌 다 갚으면 좋을지 모르겠다.”
“평생 갚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늘 조의신 군에게는 신세만 지는군요.”
겨우 그만뒀다 싶었는데 호랑이들이 또 감사 인사 세례를 퍼부었다.
밤새도록 데이터 칩을 분석할 때보다 칭찬이 쏟아지는 몇 분간이 더 괴로웠다.
가만히 이쪽을 보기만 하는 백호군이 고마울 정도였다.
그로기 상태가 되었을 때 황지호가 기습을 가했다.
“그런데 황보윤 교장과는 왜 만난 거지? 이 정보와 관련이 있나?”
……그건 밝힐 수 없을 것 같은데.
나는 애써 말을 돌렸다.
“그분과 황보윤 교장 선생님 사이에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것 같아서. 한번 뵙고 싶었어.”
황지호는 이 변명을 수상히 여기는 것 같았으나 은인이라고 잔뜩 띄워 준 상황이니 추궁하기 어려웠나 보다.
마침 등교할 시각이 되어 김신록은 출근해야 했는데, 덕분에 나도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호랑이들은 나를 저택으로 부르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은영관에서는 기숙사가 더 가깝다는 핑계로 빠져나갔다.
기숙사에 돌아가면 수면을 취하고, 영약과 식사를 제때 챙겨 먹겠다는 약속을 한 후에야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 * *
꿈 없이 자고 눈을 떠 보니 주변이 어둡고 고요했다.
기숙사에 돌아와서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정보를 분석하고 약속한 대로 식사와 영약을 먹고 잠든 것까지는 기억한다.
그런데 눈을 떠 보니 날이 바뀌고 새벽이 되어 있다.
12시간 넘게 잠들었다는 생각에 놀랐다.
피곤하긴 했는데 이 정도로 오래 잤다니.
디바이스를 켜 일정표를 확인하니 ‘수능 D-1’이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수능과 상관없지만, 반 아이들과 3학년을 위한 수능 이벤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간 바빠서 수업과 이벤트 준비를 빠졌으니 면목 없었다.
‘오늘은 오전 수업만 한다고 했지.’
오후에는 1, 2, 3학년이 같이 듣는 선택 수업이 있다.
그러니 오늘 은광고에서는 학급별 공통 수업만 진행될 예정이다.
오늘만큼은 꼭 출석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르게 학교를 나갔다.
등굣길은 아직 어두웠지만, 드문드문 등교하는 학생들이 보였다.
대부분 1, 2학년 학생들이었는데, 다들 우리 반처럼 수능 이벤트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내가 제일 먼저 오는 건 오랜만인 것 같은데.’
1학년 0반 교실.
반에는 아무도 없었다.
옛 한국 지부장이 보여 줬던 우리 반 교실은 아이들의 시신과 피로 엉망이었는데, 지금은 곳곳에 이벤트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그 흔적들을 지켜보며 반 아이들의 등교를 기다렸다.
제일 먼저 등교한 건 권레나였다.
“의신아, 안녕. 잘 쉬었어?”
권레나가 환하게 웃으며 말을 걸었다.
최근 보였던 피곤한 모습과 딴판이었다.
“저번에 알려 준 애플리케이션 말인데, 지금도 잘 쓰고 있어. 고마워.”
기사 검색 애플리케이션을 소개한 건 말인가?
그때 권레나는 이여름과 연락이 안 돼서 불안해했었는데, 표정을 보니 일이 잘 풀린 것 같았다.
“연락은 됐어?”
“응! 협회에서 받던 조사가 끝났다고 하셨어. 새로 맡게 된 업무가 있어서 바빠질 것 같다고 하셨는데…….”
권레나는 웃으며 말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었다.
바로 권레나와 이여름의 연락이 닿게 된 시점.
홍규빈이 남궁 그룹과 연관된 사건에서 손을 뗀 것과 비슷한 시점이었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나는 이여름에 관해 이야기하는 권레나의 밝은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생각에 잠겼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