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수능 한파 (1)
오전 수업이 끝난 후.
송대석을 제외한 1학년 0반 아이들이 교실에 모였다.
주말에 가을 소풍이 예정되어 있는데, 송대석이 그때 시간을 내기 위해서는 오늘 미리 일을 해야 한다고 먼저 자리를 비웠다.
‘송대석은 지금 옥토연과 협력하는 중이라고 했지.’
방송국 사건 당시, 월궁계도는 위성이 포착하지 못한 이상 현상을 사전에 잡아냈다.
원인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지만, 송대석의 가설에 의하면 그 이상 현상은 남궁 그룹에서 개발된 이계 시뮬레이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현재 송대석은 옥토연과 협력해서 그 이상 현상을 규명하려 하는데, 이 사실을 아는 건 협회 내에서도 극소수다.
송대석의 가족은 물론, 민그린도 그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나는 옥토연과 홍규빈, 이 둘과 연이 닿아 있어서 알게 되었지만.
“미안해, 내가 대석이 몫까지 열심히 할게.”
“아니야. 다음에 행사 있으면 대석이한테 일 더 시키면 되지.”
김유리가 미안해하는 민그린을 달랬다.
요즘 민그린이 부 활동으로 바쁘고, 송대석도 연구원 일로 바빴기에 최근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시간이 크게 줄었다.
송대석 앞에서 티는 안 내지만 민그린은 꽤 쓸쓸해하는데, 눈치 없는 송대석은 일에 치여 사느라 그걸 모른다.
한이가 민그린에게 솔티드 캐러멜 마카롱을 내미는 사이, 교탁 뒤에 선 김유리가 회의를 진행했다.
“의신이도 왔으니까 오늘 오후랑 내일 일정을 설명할게!”
내일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날이다.
조기 졸업할 예정이 아닌 이상 고1, 2학년과 직접적인 관계는 없었으나 응원 이벤트에 참가하는 이들은 달랐다.
예전 세계에서도 그렇고, 이 세계에서도 후배들이 시험장 앞에서 선배들을 응원하는 문화가 있었으니까.
“오늘 오후에는 크게 두 팀으로 나뉘어 움직일 예정이야. 1조는 그린이랑 같이 플래카드 제작을 마무리하고, 2조는 미로가 부를 수능 응원송 무대 준비를 도와야 돼. 역할이 고정된 사람은 넷이야!”
김유리는 전자 칠판에 아이들의 이름을 썼다.
1조: 민그린
2조: 독고미로, 목우람, 이레나
김유리는 아이들의 특기를 고려해 1, 2조를 우선 배정한 것 같았다.
권레나와 목우람은 이번에도 독고미로 라이브의 반주를 담당하나 보다.
“지금 딱 10명이니까 사다리 타기로 반반 인원을 나눌게.”
성씨 가나다순으로 사다리 타기를 한 결과, 조가 나뉘었다.
1조: 민그린, 김유리, 맹효돈, 한이, 황지호.
2조: 독고미로, 목우람, 이레나, 사월세음, 나.
독고미로는 한이와 황지호가 함께 움직이는 게 다소 불만스러워 보였지만, 사다리 타기 결과에 승복했다.
사월세음은 독고미로의 연습도 볼 수 있고, 나와 같은 조가 됐다며 기뻐했다.
“두 분도 함께 연주하시겠습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맞춰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맞아. 같이 연주하면 좋을 텐데.”
조 편성을 마치자 목우람과 권레나가 제안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위해 악기를 배워 뒀어야 했나?
아니, 잘 생각해 보니 학창 시절에 악기를 배운 적이 있던 것도 같다.
“저는 예전에 삼촌한테 가야금을 뜯는 법을 배우긴 했는데, 연습 안 한 지 오래돼서…… 의신아, 혹시 악기 다루실 줄 아세요?”
“캐스터네츠랑 트라이앵글은 칠 수 있어.”
덧붙여 리코더랑 멜로디언, 탬버린, 소고, 단소, 사물놀이에 나오는 국악기도.
학창 시절 음악 실기 수행평가를 위해 배웠던 악기라면 다룰 수 있다.
다룰 수 있다곤 해도 수행평가 과제곡으로 나왔던 것만 연주할 수 있지만.
“아, 그렇군요! 역시 의신이는 굉장해요!”
“가야금과 캐스터네츠…… 편곡을 위해 일주일 정도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음, 내일이 수능이니까 안 돼.”
“다 같이 무대에 서고 싶었는데…… 아쉽다.”
역시 내가 다룰 수 있는 악기로는 무대에 서기 힘들 것 같다.
결국 응원송 라이브는 셋이서 담당하고 나와 사월세음은 무대 정리 등을 돕기로 했다.
사월세음과 나는 권제인의 내한 공연 당시 일일 스태프를 했으니 나름 경력직이라 이야기가 빨리 진행됐다.
조별로 간단히 회의를 마친 뒤 김유리가 다시 전자 칠판 위로 일정표를 띄웠는데, 내일 집합 시간을 확인한 권레나가 의문을 표했다.
“어? 원래 우리가 현장에서 자리 맡기로 하지 않았어? 1학년들이 새벽에 자리를 맡는 게 관례라고 들었는데.”
수능 고사장에는 한 학교 학생만 오는 게 아니다.
다른 학교 학생들도 올 텐데 고사장 정문 앞에 자리를 잡으려면 일찍 가서 자리를 맡을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예전 세계, 이 세계에서 동일하게 그 역할은 보통 1학년이 맡곤 했다.
“2학년 0반 선배님들이 자기들이 자리를 맡겠대.”
“찬솔 선배님 들이요? 제갈재걸 선생님이 그 자리에서 같이 기다려 주실 것도 아닌데 먼저 와 있는다고요?”
사월세음이 지당한 질문을 던지며 의심스러워했다.
집단의 고참이 되면 보통 자리 맡기 같은 귀찮은 잡일은 마다하게 되는데, 다른 선배도 아니고 2학년 0반이 그런다니 의심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오전 6시 이전까지 절대 오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가면 안 돼! 만약 자기들보다 일찍 오는 은광고 학생이 있으면 깽판을 치겠다고 선언하셨거든.”
오전 6시까지 무슨 짓을 할 생각이기에 저런 소리를 하는 건가.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깽판을 치겠다고 선언하면 반드시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 줬으니 우리는 얌전히 6시 이후에 가기로 했다.
“그러면 리허설은 6시 이후에나 가능하겠네. 그전까지는 학교 교문 앞에서 연습해도 될까?”
“학교 측에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독고미로의 말에 나는 황지호를 쳐다봤다.
황지호는 한이에게 피칸파이에서 가장 달달한 토핑이 올라간 조각을 건네주고 있었는데, 귀가 밝은 노친네는 우리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이사장이 허락할 거다.”
방금 이사장의 허락을 받았으니 교문에서 뭔 짓을 해도 상관없을 거다.
몇몇 아이들이 황지호를 미심쩍어하며 바라봤지만, 노친네는 신경 쓰지 않고 처웃었다.
* * *
수능 당일, 오전 6시.
준비를 단단히 마친 우리들은 수능 고사장에 도착했다.
한반도 교육열의 상징, 대수능답게 이른 시각, 수능 한파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고사장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아직 정문에 도달하지 않았는데도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정도였다.
“손 시려, 장갑 끼고 올걸!”
“이능파로 감싸면 따뜻합니다.”
“……그런 섬세한 컨트롤은 못하는데.”
“와……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다들 응원하러 오신 걸까요?”
일찍 고사장으로 입실하려는 학생과 응원하러 온 학부모와 학생들을 취재하고 있는 기자들을 보던 사월세음이 감탄했다.
한편, 마스크와 모자로 얼굴을 가린 독고미로가 카메라를 보고도 편안한 눈을 했다.
플레이리스트 막방 때도 느꼈지만, 독고미로는 카메라 공포증을 거의 극복한 것 같다.
사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추위에 몸을 떠는 민그린도 마찬가지였다.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민그린은 사람보다 추위에 더 질색한 것 같았다.
“보통 수능은 학교에서 친다고 들었습니다. 여기는 학교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여기는 플레이어 전용 고사장이라서 그래! 이능파 대책이 되어 있지 않은 학교에 고등학생 플레이어가 수능을 보러 가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서…….”
김유리가 고사장에 관해 간결히 설명했다.
이능을 가진 플레이어들이 국가고시를 치를 때는 특별히 격리된다.
시험을 치르다 흥분해서 이능파를 발산해 기물이 파손되는 경우도 있고, 사고가 발생하기도 하니까.
또 플레이어의 경우, 이능을 활용한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부정행위 할 가능성도 있다.
이를 막기 위해 플레이어 감독관을 배치해야 하므로 플레이어들은 특별한 고사장에서 시험을 치르게 된다.
즉, 이 고사장에서 수능을 치르는 수험생들은 전원 플레이어인 셈이다.
두두둥!
우리가 정문 앞에 거의 도달했을 때, 베이스 드럼 두드리는 소리와 우렁찬 함성이 귀를 때렸다.
“파적(破敵)! 선배님들의 수능 건승을 기원합니다!”
정문 한쪽, 예복 차림의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생도들과 군악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들은 사관학교 3학년 생도 수험생들이 들어갈 때마다 경례를 하며 구호를 외쳤다.
활기 넘치는 장면이었으나 사람에 따라서는 입장할 때 벌칙을 받는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 기운 넘치는 집단 맨 앞에는 플레이어 군사관학교 고등부 1학년 생도들의 기수장, 장남욱이 서 있었다.
‘단체 메시지방에서 그날 보자고 말했지.’
장남욱은 단체 메시지방에 군사관학교 수능 응원 일정에 관해 긴 메시지를 남긴 바 있었다.
대충 요약하면 그날 얼굴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는데, 유상훈은 새벽 응원 안 나올 거니까 못 볼 거라고 딱 잘라서 말했다.
장남욱은 서운해하긴 했지만, 유상훈이 유상희를 바래다주러 함께 이동할 거라는 말에 금방 서운함을 삼켰다.
장남욱은 나를 발견하곤 반가워하며 눈인사를 했다.
단체 활동 중이라서 튀는 행동을 못 하는 것 같은데, 앞줄에 서 있던 도시후는 까불거리며 우리한테 손을 크게 흔들면서 아는 척하다가 뒤통수를 한 방 맞았다.
‘뭐, 도시후 저놈은 맞아도 싸지.’
제천대성이 도시후를 봐줬다곤 해도 무지기는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데.
걱정은 장남욱 혼자 다 하는 것 같다.
일단 처맞으면서까지 인사를 했으니 대충 손을 흔들어 답인사를 해 줬다.
착한 우리 반 아이들 중에 도시후와 면식이 있는 아이들이 그놈을 알아보고 인사를 해 줬는데, 도시후가 또 정신을 못 차리고 좋아라 하며 손을 휙휙 휘두르다가 또 얻어맞았다.
하여튼 도시후는 지나치게 멀쩡해 보이니 저놈한테는 당분간 신경 끄기로 했다.
“음…….”
도시후를 본 김유리는 곤란한 표정을 하며 머리를 짚었다.
사관학교 교류전 때, 김유리는 농구장에서 도시후를 보고 이런 말을 했었다.
―의신아, 시후 말인데…… 쟤는 물가에 가면 안 될 것 같아.
―상위 존재들이 동시에 말하는 바람에 뭐라고 하는지 잘 안 들리긴 하는데, 대충 쟤랑 놀지 말라는 내용인 것 같아.
김유리에게 멋대로 광림을 통해 힘을 준 상위 존재들은 전부 물과 인연이 있는 신들이다.
무지기는 물을 다루는 진족이니, 그들은 도시후에게 얽혀 있는 무지기의 원념을 읽고 그런 말을 한 듯하다.
김유리가 나에게 작게 속삭였다.
“전보다 덜하긴 한데 아직 좀…….”
제천대성이 달래 줬다고 하지만, 무지기의 원념은 아직 여전히 도시후에게 남아 있는 건가.
김유리에게만 관심이 있는 상위 존재들이 저런 소리를 할 정도면 그 원념의 크기는 상당할 것 같다.
언젠가 무지기가 일어나면 도시후는 그 분노를 마주해야 할 텐데…….
“……저게 대체 뭐냐?”
생각에 잠겨 있을 때, 2학년 0반이 자리를 맡았다는 고사장 정문 바로 앞에 도착했다.
그 앞에는 거대한 가림막이 설치되어 있어 뒤가 보이지 않았다.
또, 금찬솔과 왕찬솔이 천으로 된 가림막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있어 접근하기가 싫었다.
우리가 떨떠름해하며 가림막 앞에 접근했을 때였다.
“후후후, 이때만을 기다렸다.”
“자, 보아라! 은광고 축제 역사에 남을 화보집의 티저를!”
우리를 보고 희번덕 눈을 뜬 금찬왕찬이 크게 손짓하자 가림막이 밑으로 내려갔다.
휙!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천막이 사라지자, 거대한 제갈재걸이 등장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