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95화 (493/925)

71. 수능 한파 (2)

영하의 기온을 자랑하는 수능 한파 속.

아직 해가 뜨지 않아 주변은 어두웠다.

하지만 천막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가림막이 내려간 것과 동시에 이능파를 뿜고 스포트라이트를 켰기에 제갈재걸이 선명하게 보였다.

“제갈재걸 선생님이잖아! ……홀로그램 아니지?”

“어…… 그림자가 있는 걸 보니까 홀로그램은 아닌 것 같아.”

“직접 만든 것 같습니다. 이음새 부분은 이능으로 고정했지만, 제작 자체는 손수 하셨군요.”

“아니, 그런데 왜 조각상한테 진짜 옷을 입힌 거냐?”

우리 반 아이들뿐만이 아니라 사관학교 생도들, 이제 막 도착한 다른 학교 학생들도 제갈재걸을 보고 경악했다.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왜 수능 응원장을 은광고 축제 기획 작품 홍보용으로 쓰는 것인가.

금찬왕찬의 의도를 알 순 없지만, 이해는 갔다.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굽어보는 제갈재걸을 보기만 해도 훈훈한 기분이 들었으니까.

저 얼굴을 보니 응원받는 기분이 든다.

‘잘 만들긴 했다. 저 옷은 느루에서 만든 것 같은데…… 초거대 사이즈에 맞춰 수제 제작 했나?’

제갈재걸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무슨 옷을 입어도 잘 어울리긴 하지만, 누가 골랐는지 몰라도 저 화려한 색의 정장은 몹시 잘 어울렸다.

이게 티저라면 실제 제갈재걸 화보집은 어떨지 너무나도 기대되었다.

일단 기념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 둬야겠다.

디바이스로 사진을 찍고 있는 사이, 아이들이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저희도 함근형 선생님 모델로 뭐 하나 만들 걸 그랬어요.”

“함근형 선생님 스케치한 거 몇 장 있긴 한데, 조소는 많이 안 해 봤는데…….”

“저번에 주오 아일랜드 갔을 때 우람이가 이계 광석 가공하는 거 봤는데 엄청 잘하더라. 우람이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어느 사이엔가 민그린 화백과 목우람의 협업으로 우리도 뭔가 만들자는 얘기가 나왔다.

자꾸 우리 반 아이들이 2학년 0반 선배놈들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게 뭔가 마음에 걸렸다.

그래도 반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을 존경하고 따르는 건 나쁜 일이 아니지 않나?

반 아이들이 만드는 함근형 선생님 동상이 어떨지 벌써부터 기대된다.

회의를 시작한 우리를 보고 독고미로가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짓긴 했으나 한이가 함근형 선생님 조각상 제작에 협력하겠다고 말하자 돕겠다고 나섰다.

한편,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뭔가를 더 할 모양인 듯했다.

“그럼 해 뜨기 전에 빨리 그걸 하자!”

“어? 그거 안 한다고 하지 않았어?”

“왕찬 저놈은 또 회의할 때 딴생각했구만.”

“그만 떠들고 세팅이나 해라!”

2학년 0반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대한 조각상 뒤에 천막이 몇 개 더 보였는데, 아마 그곳에서 뭔가 터지나 보다.

“와, 은광고에서 말리는 사람이 없어!”

“시후야, 조용히 해.”

멀리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긴 했으나 애석하게도 이 자리에 저 선배놈들을 말릴 만한 이들은 없었다.

2학년 0반을 통제할 수 있는 건 교사 몇몇과 학생기구의 장들 정도다.

마음만 먹으면 노친네를 비롯한 우리 반 아이들이 2학년 0반을 제압할 수 있겠지만, 딱히 말릴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곧 말릴 누군가가 오겠지.’

2학년 0반 선배놈들을 학교 밖에 내놓는데, 은광고 측에서 브레이크를 밟을 준비도 없이 방치할 리가 없었다.

슬슬 금찬왕찬을 통제할 수 있는 누군가가 도착할 거다.

위이잉!

예상대로 그 누군가가 이 자리에 당도했다.

은광고의 교표와 학생회 배지에 새겨진 마크가 코팅된 에어 셔틀이 열리자, 학생회장 염준열을 필두로 학생회 임원들이 하나둘씩 내리기 시작했다.

염준열을 알아본 타교 학생들이 환호를 보냈다.

독고미로가 나타났을 때도 반응이 있었지만, 과연 스타 플레이어가 등장하니 귀가 따가울 정도로 비명 소리가 커졌다.

염준열은 거대한 제갈재걸 조각상을 보고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먼저 우리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의신아, 안녕. 많이 춥지? 늦어서 미안해.”

“염준열 선배님, 안녕하세요. 괜찮아요.”

오늘도 염준열은 성실하게 제자로서, 선배로서 메시지를 보냈다.

기온이 많이 떨어졌는데 체감 온도는 더 낮을 것 같으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수능 응원 나올 나를 걱정한 것 같은데, 내 제자의 사려 깊음에 다시금 감탄했다.

염준열은 다른 아이와도 인사를 마친 후, 갑자기 이능파를 끌어올렸다.

파아아앗!

염준열이 손을 들어 올리자 홍룡이 등장했다.

열기를 머금은 홍룡의 몸체가 완전히 드러나자 주변이 몹시 따뜻해졌다.

반 아이들이 너도나도 홍룡 쪽을 향해 손을 뻗어 열기를 나눠 받았다.

홍룡은 난로 취급 받는 게 기분 나쁘지 않은지 얌전히 우리 주변을, 특히 내 근처를 느리게 돌아다녔다.

“홍룡 주변에 있어. 난 찬솔이 들이랑 얘기하고 올게. 경구야, 따라와.”

“알았다.”

염준열과 곽경구가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허튼짓을 못 하게 막으러 간 사이, 여기저기에서 염준열이 등장하는 홀로그램을 띄운 게 보였다.

홀로그램 속 염준열이 수능을 보는 이들을 응원하고 있었다.

“방금 전에 나온 생방송 클립이네. 이거 촬영하시느라 늦으셨나?”

“염준열 선배님은 사전에 한 번 찍어서 미리 올리고, 생방송으로 한 번 더 응원 메시지를 보낸 것 같아요.”

사월세음이 홀로그램을 크게 확장해 재생 목록을 보여 줬다.

재생 목록에 있는 건 스타 플레이어들의 수능 응원 릴레이 영상이었는데, 연관 영상으로 염방열, 권제인, 성국언의 응원 영상도 같이 떴다.

은광고 출신의 유명한 플레이어들은 다 응원 메시지를 촬영한 것 같았다.

‘독고미로의 영상도 있긴 한데…… 조회수가 조금 낮네.’

플레이리스트가 종방하고 독고미로가 데뷔에 실패한 후, 독고미로는 조금씩 대중에게 잊히고 있었다.

가끔 인터뷰를 통해, 자료 화면 상으로, 게스트로서 방송에 등장하고 있긴 하다.

하지만 독고미로는 정식으로 데뷔한 게 아닌 유명한 아이돌 지망생에 불과했다.

음원이 나왔긴 하지만 플레이리스트에서 나온 과제곡이고 독고미로가 그 곡으로 활동하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다.

여래훈의 성공을 보고 독고미로에게 계약을 제안한 기획사가 있긴 했지만, 계약이 성사되지 않았다.

‘후려치는 계약이 많겠지. 번듯한 기획사에서는 입장을 보류하고 있는 것 같고…….’

독고미로와 계약이 불발된 기획사 측에서 일부러 언론에 내용을 흘려 기사가 몇 번 난 적이 있었다.

익명을 희망한 기획사 관계자가 기사 속에서 ‘독고미로가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해 계약 진행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라는 식으로 독고미로 탓을 하는 내용이었다.

독고미로의 팬덤이 그 기사 속의 관계자를 추적한 결과, 노예 계약 논란과 횡령, 미정산 등 문제가 많은 매니지먼트 소속으로 밝혀졌다.

플레이어 출신, 오디션 탈락 등을 이유로 후려치는 꼴이 눈에 선했다.

“어? 곽경구 선배님이 찬솔 선배님 들한테서 뭘 압수하고 있어요.”

“아이템 카드에 폭탄 같은 게 그려져 있는데…… 아, 폭죽인가?”

“수능 보기 직전에 폭죽은 좀 그렇지 않냐.”

“얘들아, 2학년 0반 선배님들이 천막 철거하면 무대 설치하자!”

학생회의 활약으로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다소 얌전해지자 우리는 무대를 세팅했다.

학생회는 제갈재걸 조각상을 가리거나 치우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2학년 0반이 결사반대하여 방치하기로 했다.

결국 제갈재걸 조각상과 민그린의 플래카드를 배경으로 간이 무대가 설치되었다.

“방음 아이템과 결계는 이 몸이 설치하지.”

수능 고사장 앞이니 무대 앞에는 관객석 대신 방음 결계가 설치되었다.

노래를 듣고 싶은 수험생만 방음 결계 안으로 들어오라는 배려였다.

작년에 2학년 0반이 수능 금지곡을 중간고사 기간에 트는 바람에 학생들이 원성을 쏟아 냈다기에 이를 고려한 대책이었다.

‘딱히 수능 금지곡 취급 받지 않는 곡이라도 특정 소절이 떠올라서 집중이 안 될 때가 있으니까. 주의해야지.’

무대가 완성될 즈음에는 해가 뜨고, 프로 플레이어 팀들이 도착했다.

주변에 이계가 발생하는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전국의 모든 고사장에 프로 플레이어 팀이 배치된다.

플레이어 수험생이 수능을 치르는 플레이어 전용 고사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고사장에 있는 건 전원 플레이어들이니 낮은 레벨의 이계는 맨손으로도 대처할 수 있겠지만, 수능을 보다 말고 뛰쳐나올 수 없는 노릇이니까.

프로 플레이어 팀이 도착한 이후로 수능을 치르기 위해 고사장으로 오는 수험생들이 늘어났다.

그리고 독고미로의 응원송 무대가 시작되었다.

“리허설 때 잠깐 봤던 것보다 더 잘하는 거 같아.”

“관객이 많아서 힘을 받아서 그런가 봐요!”

사월세음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상은 정반대였다.

곳곳에서 독고미로를 촬영하는 디바이스들 때문에 몹시 긴장한 상태였다.

응원송을 부르는 독고미로는 이 추운 날에도 살짝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독고미로는 오랜만의 무대라는 생각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수험생 중에 절반 이상이 방음 결계 너머로 독고미로를 흘끗 보기만 하고 지나쳐 버리긴 했지만, 다행히 열혈 팬들이 무대 주변을 지키고 있어서 쓸쓸한 분위기는 들지 않았다.

“플레이리스트 방청을 갔어야 했는데……!”

“너희들만 가니까 좋았냐?”

2학년 0반 선배놈들이 제갈재걸 조각상 앞에서 노래하는 독고미로를 감명받은 얼굴로 보며 구시렁거렸다.

당시 방청권 쟁탈전에서 승리한 이들이 대놓고 우월감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그렇게 가고 싶었으면 이겼어야지.”

2학년 0반 소속, 연극부 에이스 연가람이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당시 플레이리스트 파이널 라운드 방청권을 쟁취한 2학년 0반 선배놈들은 금찬솔, 왕찬솔, 연가람 그리고 독고미로의 홈마 정해온.

이 넷을 정한 기준에 관해선 제대로 듣지 못했지만, 지금 2학년 0반 선배놈들의 열렬한 반응을 보니 어지간해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저 넷은 혼돈이 넘치는 2학년 0반 내에서도 승리를 거머쥘 만한 실력자인가 보다.

“도원우 선배님이다!”

“원우 형, 어서 와요!”

플래카드를 들고 독고미로의 무대를 지켜보고 있을 때, 학생회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도원우가 추한 시절이 길었지만, 일단 유명한 플레이어였기에 그가 등장하자 타교 학생들도 들뜨는 것 같았다.

“응원 와 줘서 고맙다. 안 추워?”

“준열이가 부른 홍룡 덕에 괜찮습니다. 여름에는 열기 때문에 고생했는데, 겨울에는 쓸모 있네요.”

“하하, 쓸모라니. 원우 형, 응원 선물 세트 받아 가세요.”

도원우가 곽경구와 염준열을 시작으로 학생회 멤버들과 대화를 나눴다.

도원우는 금찬왕찬에게도 ‘사고 치지 마라.’ 하고 당부의 말을 남겼는데, 선배놈들은 독고미로의 무대에 집중하느라 건성으로 그 말을 흘려들었다.

도원우가 2학년 0반 선배놈들에게 말을 붙이는 걸 포기하고 우리 반 아이들에게 뭔가 한마디 하려고 했을 때였다.

“상희 언니도 오셨어!”

“누구랑 같이 있는데…… 동생인가?”

그 말에 도원우가 휙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햇살을 등진 유상희와 유상훈이 은광고 응원 무대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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