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수능 한파 (3)
유상희를 발견한 도원우가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좁히다가 평소 표정으로 돌아왔다.
유상희가 주변에 있을 때는 얼빠져 보이거나 추한 얼굴을 했는데.
“상희 누나, 어서 오세요. 몸은 괜찮아요?”
“응, 난 괜찮아. 준열이가 고생이 많네.”
염준열이 학생회 대표로 유상희에게 인사를 하고 수능 응원 선물 세트를 건넸다.
핫팩과 커피, 초콜릿 등이 들어 있는 봉투를 품에 안은 유상희가 밝게 웃으며 다시 감사 인사를 했다.
평소라면 염준열과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유상희를 보고 도원우가 또 추하게 굴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도원우는 막 도착한 지명수와 대화를 나눌 뿐, 그쪽에는 시선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다가 학생회 아이들과 대화를 마친 유상희가 도원우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원우야, 수능 잘 봐.”
“……고맙다.”
도원우는 머뭇거리다가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한 후, 정말 학생회장이 학생에게 해 줄 만한 격려의 말을 했다.
겉보기에 두 사람은 보이지 않는 갑과 을의 관계에서, 평범한 동급생의 관계로 돌아간 것 같았다.
어색한 공기가 흐르고 있을 때, 지명수가 상황을 수습했다.
“다음에 밥이나 같이 먹자. 바빠서 학생회 회식을 못 갔잖아. 아, 원우가 살 거다.”
지명수가 분위기를 띄우고 도원우를 끌고 먼저 고사장 안으로 들어간 사이, 유상희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뚱한 표정을 짓고 서 있는 유상훈도 함께.
“의신아, 응원 와 줘서 고마워. 달토끼떡 세트 잘 받았어. 수리취찹쌀떡이 정말 맛있더라.”
“따로 더 시켜 먹으려고 했는데 안 팔던데. 그건 한정판이냐?”
나는 이 세계에서 알고 지낸 고3 수험생들에게 모두 달토끼떡 수능 시즌 한정 찹쌀떡 세트를 보냈다.
세트에 포함된 떡 종류도 확인해서 주문했는데, 수리취찹쌀떡은 없던 걸로 기억한다.
수리취를 좋아하는 어느 달토끼가 내가 달토끼떡을 대량 주문한 걸 보고 멋대로 추가해서 보낸 거 같았다.
‘내가 먹을 게 아니었는데…… 나중에 감상을 물으면 뭐라고 대답하지?’
선물용 세트인 걸 제대로 확인도 안 하고 추가 떡을 보냈을 옥토연이 눈에 선했다.
내 감상은 전하지 못하지만, 유상희가 맛있게 먹었다는 사실은 꼭 말해 줘야겠다.
한편, 도시후는 유상희와 유상훈에게 인사하겠다고 또 손을 흔들다가 뒤에 서 있던 생도에게 얻어맞았다.
저놈은 학습 능력이 없나?
“……의신이한테는 늘 신세만 지네. 우리 집 상멍청이 건도 그렇고, 내 일도 그렇고.”
유상희는 그날, TC 연구소 지하에 내가 있었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유상훈이 데려올 법한 정체불명의 까마귀 가면에 바로 나를 연상한 건가?
아니면 나와 만난 적이 있는 아케아가 귀띔을 해 준 걸까?
알아차린 계기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유상희가 눈치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유상희는 작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거듭 인사했다.
그 옆에 서 있던 유상희네 상멍청이는 저를 멍청이라 칭하는 소리에 잠시 인상을 구겼지만, 유상희가 나한테 감사 인사를 하는 건 말리지 않았다.
좀 말려 줬으면 했는데 유상훈은 멀뚱멀뚱 보고만 있었다.
‘하필 이럴 때 독고미로가 쉬는 시간이라니.’
연달아 노래를 부르는 데에도 한계가 있으니, 지금은 잠시 무대를 정리하며 쉬는 시간이었다.
입실하는 수험생 수도 그렇게 많지 않아 주변은 한산했다.
무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가야 할지 고민할 때였다.
끼익!
그때, 고사장 저편에서 급히 차를 세우는 소리가 들렸다.
유상희가 플레이어카의 맹렬한 기세에 말을 잠시 멈추고 그쪽을 볼 정도였다.
멈춰 선 건 검은 몸체의 플레이어카였다.
‘지상을 달려온 건가?’
교통 체증의 가능성 때문에 보통 수험생들은 에어 셔틀, 에어 택시를 이용하는데 지상을 달리다니 의외였다.
지상을 달려온 것도 의외였지만, 주목을 끈 건 플레이어카 그 자체였다.
“저거 전 세계에 다섯 대밖에 없는 플레이어카다.”
“헐…… 실물은 처음 봐.”
“저 차 한국에도 있었냐?”
이계 금속을 매끈하게 다듬어 구현한 몸체와 디자이너의 사인과 넘버링이 새겨진 엠블럼을 본 이들이 감탄했다.
주변에서 떠도는 정보를 종합한 결과.
저 차의 소유주 중 넷은 10대 플레이어 팀의 팀 마스터인 듯하다.
그리고 남은 하나는 한국 유수의 플레이어이자 재벌 4세가 소유 중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저 안에 있는 건 설마…….’
플레이어 전용 수능 고사장.
그리고 재벌 4세가 소유 중이라는 플레이어카.
이 둘을 종합하니 답이 바로 나왔다.
검은 플레이어카의 문이 열리자 그 안에서 상기된 얼굴을 한 오혜지와 주수혁이 내렸다.
오혜지가 내린 것과 동시에 운전석의 창문이 내려갔는데, 창문 너머로 주수겸 전무 이사가 보였다.
“……바래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끝나면 연락해라.”
“……네.”
주수겸은 고개를 끄덕이는 오혜지를 보고 입꼬리를 보일 듯 말 듯 올리며 웃고는 바로 사라졌다.
세계 최고의 슈퍼카, 플레이어카다운 제동 속도답게 무서운 속도로 주수겸은 자리를 떴지만, 남겨진 오혜지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멍하니 손목을 만지작거렸는데, 그 손목에는 예의 그 샌드핑크색 손목시계가 있었다.
주수혁이 부드럽게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면 계속 거기에 서 있었을 것 같았다.
‘오혜지를 울린 주제에 또 무슨 짓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주수겸이 뭔가 잘못한 게 아닐까?
오혜지가 다이나믹하게 등장한 것도 그렇고, 의문이 넘쳐 났다.
오혜지와 주수혁이 나란히 서서 은광고 응원석 쪽으로 돌아오자 당연히 질문 세례와 관심이 쏟아졌다.
“저거 누구임? 수혁이랑 똑같이 생겼던데?”
“차 개쩐다. 나도 타 보고 싶다.”
“혜지 누나, 수능 잘 보세요!”
오혜지가 응원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선물을 받는 틈에 주수혁에게 다가갔다.
주수혁은 전투라도 하고 온 것처럼 이능파가 다소 들떠 있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무슨 일 있었어?”
“그게…… 사정이 있어서 혜지 누나를 바래다주게 된 거야.”
주수혁이 말꼬리를 흐렸다.
말하기 곤란할 정도로 복잡한 일이 있었나 보다.
주수혁을 곤란하게 할 수 없어서 더 추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포기하고 나중에 따로 알아보려고 다짐했을 때, 유상희가 말했다.
“혜지 성격이면 1시간은 더 일찍 왔을 텐데. 설마 긴장해서 늦잠이라도 잔 게 아닐까?”
“아니거든.”
오혜지가 어느 사이엔가 우리 쪽에 와 있었다.
유상희와 오혜지는 도원우기환만큼이나 팽팽한 라이벌 사이로 유명했는데, 과연 둘이 웃으며 서로를 바라볼 뿐인데도 긴장감이 상당했다.
“수능 준비는 잘 했어? 학교도 빠지면서 수능 준비할 정도로 열심이시던데, 당연히 잘 보겠지.”
“응, 내가 혜지보다는 잘 볼 것 같아.”
“그건 어렵지 않을까? 만점 위로는 점수가 없잖아.”
“설마 모의고사에서 딱 한 번 만점 받은 걸로 자신감이 생긴 거야? 혜지야, 수능하고 모의고사는 달라.”
오혜지랑 유상희는 그 이후로도 덕담인지 악담인지 모를 말을 주고받으며 웃었다.
겉으로 봤을 때는 친한 건지 안 친한 건지 알 수 없었는데, 하기 어려운 말을 막 할 정도로 격이 없는 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플마고에서 두 사람이 같이 있던 장면이 드물어서 잘 몰랐는데, 생각보다 더 가까운 사이인 것 같았다.
“오늘 늦은 건 그냥 우리 집 윗분들이 또 발작을 일으켜서 그래.”
“……혜지 누나.”
“괜찮아. 숨겨 봤자 뭐 해.”
오혜지는 한숨을 한 번 쉬고 그사이에 있던 일들을 설명했다.
“그 사람들은 내가 대학가는 게 싫대.”
오혜지의 집안사람들은 그녀가 대학에 가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주오 그룹 경영에 관여하거나,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 현역으로 뛰는 걸 바라는 것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신부수업을 받길 원하더라. 빨리 결혼했으면 하니까, 대학도 안 갔으면 하고.”
“혜지야, 그게 무슨 미친 소리니. 어르신들이 정말 그런 말을 한 거야?”
“우리 집안 사람들은 명이 짧다고 일찍 결혼해서 가족이 늘길 바라나 봐.”
“노망이 어떻게 나면 그렇게 되는 걸까? 정말 고생이 많다.”
오씨 집안 늙은이들은 대체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무슨 개소리를 한 건가!
듣기만 해도 혈압이 치솟는 기분이었다.
유상희가 가끔 격렬한 맞장구를 쳐 줬는데, 나는 그것보다 더 심한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수능 전날에 좀 방심하고 있다가 무기를 다 빼앗기고 이능 금속으로 된 방에 갇혔거든. 무기 없이 부수고 나오기 힘들더라.”
“그럼 수혁이가 꺼내 준 거야? 수혁아, 정말 고생 많았어.”
오혜지가 이야기를 하기 전,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는 게 보였다.
주수혁과 주수겸이 오혜지를 바래다준 이유를 생각해 보면 오혜지가 뭐라고 대답할지 바로 짐작이 갔다.
“응, 수혁이하고…… 수겸 오빠가.”
‘수겸 오빠’라는 말에 머리에 열이 올랐다.
나는 아직도 오혜지를 울린 주수겸을 용서하지 못했다.
플마고의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이 오혜지를 구출한 점은 몹시 칭찬할 만한 일이지만, 그 과정에 주수겸이 끼어 있다는 게 영 탐탁지 않았다.
“전 주의를 끄는 역할밖에 안 했어요. 혜지 누나가 갇힌 걸 파악하고, 구한 건 수겸이 형이 한 일이에요.”
주수혁은 겸손하기까지 했다.
주수겸이 주수혁과 얼굴도 닮았고, 쓰는 스킬도 같다 보니 여러모로 뛰어난 점은 있으나 역시 주수혁이 최고였다.
오혜지는 조금 붉어진 얼굴로 손목시계에서 손을 떼고 말했다.
“……어쨌든, 이런 일도 있었으니까 내가 수능 더 잘 볼 것 같아.”
“혜지야, 네가 구출된 건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그건 아니야.”
오혜지와 유상희는 티격태격거리며 같이 입실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중요한 날에 함께 이동하고 대화를 나누며 긴장을 풀 정도면 친한 게 맞는 것 같다.
그 이후, 입실 시간 종료까지 비교적 조용했다.
천익산에서 아침 훈련을 하다가 3학년 0반이 지각할 뻔해서 성시완과 임연화가 끌고 오긴 했다.
또, 독고미로의 팬인 3학년 0반 소속 국악부 학생이 날뛰기도 했다.
“미로가 이 밖에 있잖아! 난 나가야겠어!”
“마침 나 시험관도 맡고 있는데 같이 들어가야겠다. 가자!”
하지만 3학년 0반 국악부 선배놈의 난은 강한 담임 임연화에 의해 금방 끝났다.
임연화는 사관학교 생도들에게 거수경례를 한 번 하고 국악부 선배를 질질 끌고 고사장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내 무사히 은광고 수험생들은 전원 고사장 입실에 성공했다.
고작 서 있었던 것뿐이지만 큰일을 해낸 기분에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대를 정리하던 중에 김유리가 제안했다.
“의신아, 우리 끝나고 소풍 사전 답사 갈 건데 같이 갈래?”
몇 시간 안 걸릴 거라는 말에 바로 고개를 끄덕여 반 아이들과 같이 가기로 했다.
이번 소풍 사전 답사 멤버는 권레나, 김유리, 맹효돈, 목우람, 사월세음, 황지호, 나.
이렇게 일곱이 가게 되었다.
무대 정리를 마치고 해산해 이동할 때,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꾀돌이] 오늘 목우람의 외출이 기네요?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