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498화 (496/925)

71. 수능 한파 (5)

적호가 용제건을 은영관 최상층으로 안내했다.

최상층은 사무실이나 고문실이 아닌 적호의 개인실인 듯했다.

생활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으나 유리 케이스 안에 허술한 솜씨의 장식품이 눈에 띄었다.

그중 용제건은 수제 종이 카네이션에 주목했다.

김신록도 저 수제 종이 카네이션을 유리 케이스 안에 넣어 두고 애지중지하며 용제건은 손도 못 대게 했다.

‘저택에 있던 그 아이들이 만들어 준 건가 보네.’

용제건은 황명호 대저택에서 만난 세 명의 후예를 떠올렸다.

은호는 솜씨가 좋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의 후예는 아니었나 보다.

‘이게 있는 걸 보니 정말로 여긴 적호 씨의 사적인 공간 같은데…….’

사과와 술자리를 미끼로 고문실로 유인해 웅녀와의 거래에 관해 추궁할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던 용제건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적호가 차린 술상을 보니 더더욱 놀랐다.

11월 제철인 삼치를 메인으로 한 회, 매운탕, 전과 잘 숙성된 붉은색의 지초주(芝草酒)에 입가심용 용정차까지.

적호가 앞서 말한 대로 용제건은 단맛을 그리 좋아하지 않고, 염준열과 마찬가지로 해산물을 즐겨 먹는다.

적호가 준비한 술상에 오른 것들은 전부 용제건의 입맛에 맞는 것들뿐이었다.

“아들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걸 물어봤습니다. 입에 맞지 않는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하십시오.”

용제건은 그 말을 듣자 크게 웃음을 터뜨릴 뻔한 걸 참아야 했다.

자신의 음식, 술 취향에 관해 묻는 적호를 보며 김신록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얼마 전에도 김신록을 크게 놀려 먹은 바람에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아마 누가 그런 걸 물으면 ‘그딴 용이 뭘 좋아하는지 제가 알게 뭡니까.’라고 대답했겠지만, 경애하는 아버지가 한 질문이니 꾹 참고 성실하게 대답했을 거다.

“다 좋아하는 것들이야. 신록이가 내 입맛을 잘 아네. 잘 먹을게.”

오늘 일로 김신록을 놀려 먹으면 일주일은 심심하지 않을 거다.

용제건은 준비된 메뉴를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감상을 머릿속에 준비했다.

메뉴에 관한 소감만 읊어도 김신록이 진저리를 칠 걸 생각하니 매우 신이 났다.

“제가 올리는 술을 받아 주십시오.”

“고마워, 적호 씨.”

적호와 용제건이 번갈아 술을 따르고 술잔을 부딪쳤다.

술잔도 매우 신경 써서 준비한 듯했는데, 붉은 호랑이가 새겨져 있는 게 기성품이 아니라 주문 제작 한 작품 같았다.

‘황호 씨가 자주 애용하는 브랜드네. 황호 씨가 선물해 준 거겠지? 요새는 친하게 지내나 보네.’

용제건은 술잔을 감상하고 안주의 맛을 즐기며 천천히 술을 음미하는데, 적호는 그럴 기분이 아닌지 거푸 술을 들이켰다.

보아하니 적호는 억지로 이능파의 흐름을 막아 알코올의 해독 작용을 억제하는 것 같았다.

독한 술을 저렇게 빨리 마시고 이능파의 흐름까지 막으면 제아무리 진족이라도 중추신경계의 활동이 둔화되고 만다.

간단히 요약하면, 지금 적호는 취하고 있었다.

“저는 아들을 위해서 아무것도 못 했습니다. 아비로서 면목이 없습니다.”

취기가 오르는 건지 적호의 입이 점점 가벼워지고 있었다.

용제건은 적호를 말릴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고민은 정말 잠깐에 불과했다.

유희용의 본능이 전설계 호족, 그것도 친우의 아버지가 취하는 걸 보고 싶다고 외치고 있었다.

‘적호 씨가 취하고 싶은 이유, 나를 불러내 이렇게 대접하는 데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 대놓고 캐물으면 어떤 짓을 해도 입을 열지 않을 거야.’

용제건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적호의 입을 열게 하기로 했다.

마침 저도 즐겁고, 적호도 만족할 수단이 바로 앞에 마련되어 있었다.

“그렇지 않아. 신록이가 당신을 얼마나 존경하는데. 자, 한 잔 더 마시자. 신록이를 위해 건배할까?”

“……감사합니다. 정말, 저는 당신을 크게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전혀 오해가 아닌 것 같은데.

용제건은 그렇게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취하고 싶어 하는 적호를 위해 술을 양껏 따라 줬다.

온갖 핑계를 대서 술을 마시게 부추겼는데, 유희계 용답게 무수한 술자리를 경험해 온 용제건의 말솜씨에 적호는 속수무책으로 취했다.

결국 적호는 단 한 번도 거절하지 않고 용제건이 주는 술을 전부 마시게 되었다.

빈 병이 수북이 쌓이자 적호는 목소리가 조금 꼬일 정도로 취하고 말았다.

“용왕신의 총아인지 탕아인지 모를 당신이…… 그렇게나…….”

“하하하, 술에 취해서 그런지 본심이 나온 거 같은데.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탕아의 술을 받아 줘, 적호 씨.”

용제건의 기나긴 용생(龍生)을 되짚어 보면 총아보다는 탕아라는 말이 잘 어울리긴 했다.

용제건은 적호의 솔직하고 신랄한 의견에 동감하며 술을 더 따랐다.

용제건은 적호가 취한 것을 확인하고 운을 뗐다.

“신록이도 이 자리에 있으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부를까? 아버지와 술자리를 할 수 있다면 기뻐할 텐데.”

“부르지 않아도 됩니다…… 여기에는 그 아이가 좋아할 만한 안주나 술도 없고…….”

“하하하, 신록이는 아버지와 잔을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할걸? 오히려 부르지 않았다고 서운해할지도 몰라.”

김신록을 여기에 부르지 않은 이유.

이는 왜 적호가 취하고 싶은지, 어째서 용제건에 대한 적호의 평가가 바뀐 건지 판단할 척도가 될 거다.

평소라면 적호는 용제건이 떠보기 위해 그런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아챘겠지만, 그는 많이 취한 상태였다.

“그 아이를 이 자리에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때 저는 당신과 제대로 그 아이를 애도하지 못하고…….”

그때?

그 아이를 애도해?

용제건은 흥미진진해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적호는 말하기 어려운지 말꼬리를 흐렸다.

용제건은 적호가 손을 자주 뻗던 안주를 앞으로 밀어 주고 술도 한 잔 더 따라 주었다.

용제건이 따라 준 술을 단숨에 들이켠 적호가 다시 말을 시작했다.

“그걸 보고 난 이후에는 전…….”

‘그걸 보고 난 이후’라는 말이 몹시 걸렸다.

당장이라도 적호에게 말을 더 붙여 정보를 뜯어내고 싶었지만, 용제건은 자신을 억눌렀다.

평소 용제건은 보통 화술을 이용해 상대에게 듣고 싶은 말을 이끌어 낸다.

그러나 용제건은 지금은 입을 다물고 적호가 하고 싶은 말을 하도록 내버려 둬야 한다고 판단했다.

용제건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별생각 없는 척 웃으며 술잔을 부딪치며 적호의 말을 기다렸다.

적호는 연거푸 두세 잔을 더 마신 후에 꼬인 혀로 말했다.

“은인에게 평생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당신도 조의신에게…… 잘…….”

적호의 눈이 감길 듯 말 듯 가물가물했다.

조의신의 이름을 말한 적호는 술을 몇 잔 더 마시다가 곯아떨어졌다.

정말 취할 생각이었는지 끝까지 이능파의 흐름을 막을 줄은 몰랐다.

수면 상태에 도달하니 이능파가 다시 순환하기 시작하며 진족 특유의 회복력이 발휘되어 안색이 좋아진 걸 확인한 용제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잠들었네. 적호 씨가 잠든 모습은 처음 보는데.’

아무리 취할 생각이라고 해도 용제건 앞에서 이렇게나 틈을 보이다니, 정말 용제건을 믿고 신뢰하는 듯했다.

하루아침에 적호가 용제건을 대하는 태도가 변한 건 몹시 기이한 일이었다.

물론 용제건은 이런 이상하고 기묘한 상황을 즐기기로 했다.

‘조의신이라…….’

용제건은 주변에 걸려 있던 적호의 겉옷들 중 하나를 택해 적호에게 덮어 줬다.

적호는 오늘 검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눈에 잘 띄도록 밝은색의 겉옷을 골라 덮어 주었다.

전설계 호족이 술 취해서 잠든다고 해서 감기가 걸릴 일은 없겠지만, 적어도 적호를 배려했다는 흔적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용제건이 먼저 자리를 뜬다는 메모를 남긴 후,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딩동.

용제건의 디바이스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용제건의 디바이스 주소록에 등록된 디바이스 코드는 많지만, 정작 연락을 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오늘따라 용제건을 찾는 이들이 많아서 그의 기분이 한층 더 고양되었다.

디바이스에 뜬 이름을 본 용제건은 홀로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조의신] 용제건 선생님, 안녕하세요.

용제건은 예의 바르게 선생님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메시지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마침 조의신으로부터 다음 단서를 캘 필요가 있었는데 먼저 연락을 줄 줄이야.

[조의신] 상담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연락 가능할 때 답변 부탁드립니다.

용제건은 이동 중에 조의신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조의신은 상담과 부탁이라는 표현을 써서 용제건에게 메시지를 보냈는데, 아주 재밌는 내용들이라 용제건에게는 포상이나 다름없었다.

‘이번 소풍은 정말 재밌겠네.’

용제건이 은영관 밖으로 완전히 나왔을 때였다.

기척이 느껴진 곳을 바라보니 용제건의 친우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야.”

대충 용제건을 부른 김신록이 날아오듯 걸어왔다.

아마 적호가 용제건의 안주, 술 취향을 묻는 걸 듣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했나 보다.

용제건 앞에 멈춰 선 김신록이 얼굴을 찡그렸다.

“술 냄새 나.”

이능파로 술 냄새를 가리는 건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김신록을 약 올릴 겸, 용제건은 굳이 이를 숨기지 않았다.

“신록이네 아버지랑 마시다가 나왔어. 안주랑 술, 다 맛있더라. 잘 먹었어.”

술자리라는 말에 김신록은 대놓고 불만스러워했다.

자신도 아버지랑 같이 술을 마시고 싶었나 보다.

“……적호 님은 위에 계셔?”

“응, 취하셔서 주무시는 중이야. 오늘 술이 조금 과했거든.”

“……?”

김신록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은영관의 최상층을 한 번, 하늘을 한 번 봤다.

수능 한파가 밀려온 날답게 날은 추웠지만 아직 해가 훤했다.

적호가 해가 한창 떠 있는데 술판을 벌여 잠들 정도로 취했다는 게 믿을 수 없는 것 같았다.

용제건은 그걸 보고 큰소리를 내어 웃으려다 애써 참았다.

오늘 있었던 일들로 어떻게 김신록을 놀려 먹을지 머릿속에서 생각하며 말했다.

“일단 겉옷을 덮어 드렸는데, 소파에서 앉아 주무시기 불편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부추기니 멍하니 있던 김신록이 급히 은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용제건은 그 모습을 배웅하다가 비행술을 써 날아올랐다.

이능파를 순환해 희미하게 어려 있던 취기를 날려 버린 후,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럼 조의신이 부탁한 걸 준비해 볼까.’

*    *    *

잠실의 테마파크.

한때 국내 최고의 유원지로 꼽혔던 이곳은 현재 임시 휴업 상태였다.

손님이 없다 보니 개장했을 때와 휴업 상태가 그리 다를 바 없긴 했지만.

“현재 이 테마파크는 운영이 일시적으로 중단된 상태다. 오는 손님도 없으니 관계없겠지.”

테마파크의 새 오너인 호족의 수장이 그렇게 말하자, 우리 반 아이들이 화색을 띠었다.

처음에 황지호가 갑자기 일정을 변경해 잠실로 가자고 할 때는 의문스러워하던 아이들이 이제 한껏 들떠 있었다.

“우리가 그럼 유원지 하루 전세 내는 거야?”

“와…… 유원지는 처음 와 봐!”

“저도요! 아, 같이 비행하면서 구경하실래요?”

테마파크에 처음 와 본 아이들이 눈이 휘둥그레져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집안 사정으로 유원지같이 사람이 많은 장소, 용돈이 필요한 장소에는 못 오던 아이들이 많았기에 다들 신세계라도 본 듯한 태도였다.

“야, 놀이기구 다 안 움직이는 거 같은데.”

맹효돈이 전원이 들어오지 않은 놀이기구들을 보며 묻자 황지호가 답했다.

“그날에는 모든 놀이기구를 가동할 거다. 리모델링이 시작되기 전에 기존에 있는 놀이기구는 전부 매각할 예정인데, 팔기 전에 상태를 확인할 겸 시험 운행을 할 필요가 있겠지.”

놀이기구도 전부 갈아 치울 생각인가.

놀이기구 가격도 만만치 않을 텐데 저 돈이 다 어디에서 나온 건지 모르겠다.

들떠 있는 아이들의 질문에 하나하나 답해 주던 노친네가 갑자기 날카로운 표정으로 정문 저편을 바라봤다.

“흠.”

설마, 그들이 황지호가 감지할 정도로 벌써 접근한 건가?

주변에 대기시켜 둔 호족들의 배치를 다시 한 번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황지호가 긴장한 나를 보고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저기에 있는 건 우리 반 아이들이다.”

황지호의 시선 저편, 오로라 빛이 나는 패딩을 입은 관종 둘이 정문 뒤에 숨어 있는 게 보였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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