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수능 한파 (6)
얼마 전, 괴도 네온과 구슬비는 군계이학이 되어 출석부 획득에 성공했다.
의상도, 획득 과정도 완벽했다.
그러나 무사히 괴도 짓을 성공한 희열도 잠시, 그들은 새로운 문제에 봉착했다.
1학년 0반 등교 거부자의 명단과 주소를 확인하긴 했지만, 이들을 등교시키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얘네 둘은 너무 멀리 살고, 얘는 학교에서 가깝게 살긴 하는데…….”
주소를 본 구슬비가 목소리를 흐렸다.
구슬비는 은광고 입학이 확정된 후, 멀린의 수업을 받고 스승을 돕기 위해 세계 곳곳을 돌아다녔다.
하지만 출국 전에 은광구 곳곳을 돌아다닌 적이 있었다.
어쩐지 가까이 가기 싫은 곳이 있었는데, 하필 등교 거부자는 그곳에 살고 있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괴도의 행적은 복잡미묘하면서도 불명확하지만, 사고는 언제나 단순, 명쾌 해야 하는 법!”
“그런 법이 어딨어.”
“괴도의 법이다. 그럼 우리 반 아이를 만나러 가 볼까!”
괴도 네온의 의상은 늘 멋지지만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특히 숨 쉬듯이 내뱉는 괴도 철학은 들을 때마다 새롭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구슬비는 그 괴도 철학을 관철하고 실행하는 괴도 네온이 조금 멋있어 보이는 자신에게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렇게 괴도 네온은 등교 거부자의 집에 쳐들어갔지만, 구슬비의 예상대로 실패했다.
괴도 네온은 화려한 의상을 입은 것과 달리 풀 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패했다. 그 안에 들어가려면 필사의 각오를 해야 한다.”
“그 정도야?”
“그렇다. 그래도 얻은 게 있다!”
괴도 네온은 백합 모양의 부토니에르(boutonnière)를 보란 듯이 내보이며 코트 자락을 휘날렸다.
주황색 트렌치코트에 곳곳에 흑자색으로 포인트를 주고 있었는데, 부담스러운 꽃 장식이 눈에 띄면서도 장식과 옷이 하나의 예술품처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구슬비는 그 눈에 띄면서도 멋진 의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괴도 네온이 곧게 등을 펴고 코트 자락을 휘날리는 모습이 마치 참나리가 피어나는 과정처럼 보였다.
“그 집 정원에 참나리가 아름답게 피어 있더군. 거기에서 영감을 얻어 신작을 만들었다. 시작품인데 어때?”
괴도 네온의 새 옷은 완벽하고 멋지고 눈에 띄었다.
구슬비는 감탄사를 뱉기 위해 말을 고르며 입을 뻐끔거렸다.
괴도 네온은 그 표정에 벌써 구슬비의 칭찬을 받은 것처럼 우쭐거리며 만족스러워했다.
구슬비가 아직 뭐라고 하지 않았는데, 괴도 네온은 싱글벙글 웃으며 벨벳 케이스를 하나 꺼냈다.
벨벳 케이스 안에는 옷감으로 만든 참나리 모양의 장식품이 몇 개 들어 있었다.
“급하게 만드느라 아직 코르사주(corsage)밖에 완성하지 못했다. 네 몫의 코트는 빠른 시일 내로 만들겠다.”
구슬비가 코르사주가 든 벨벳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괴도 네온의 큰 손에 들려 있었을 때는 코르사주가 다소 작아 보였는데, 구슬비 손에 들려 있으니 딱 맞았다.
지나치게 자신과 잘 어울리고 멋진 디자인이라서 그런 걸까.
구슬비는 코르사주를 쳐다보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마워. 잘 쓸게.”
“천만에. 이 몸의 파트너가 항상 아름답고 눈에 띄는 모습으로 있어야 하는 건 당연하다.”
코르사주를 착용한 구슬비를 보고 뿌듯해하는 괴도 네온과 눈이 마주쳤다.
구슬비는 괜히 민망한 기분이 들어서 대화 주제를 바꿔 버렸다.
“지금 참나리가 필 계절이 아닌데. 온실이 있었어?”
“아니, 야외에 있었다. 그 집 주인이 이능을 쓴 것 같더군.”
괴도 네온은 참나리가 피어 있는 규모와 장소에 관해 설명했는데, 설명이 길어질수록 구슬비는 감탄이 나왔다.
자칭 위대한 드루이디스인 구슬비는 온실이 아닌 야외에서 계절에 맞지 않는 꽃을 피우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상대가 만만치 않았다.
자칫하다간 등교를 시키기는커녕 얼굴조차 못 볼 가능성이 컸다.
물론 패배를 인정할 생각이 없는 괴도 네온과 구슬비는 포기하지 않았다.
“우리의 계획은 아직 시작된 직후다. 차근차근해 나가면 된다. 모험을 거듭하다 보면 경험치가 쌓이고, 스킬 레벨이 오르고 이내 큰 위업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다른 애들부터 찾으러 가자.”
둘은 상담 끝에 다른 등교 거부자를 먼저 찾아가기로 했다.
다른 등교 거부자를 만나기 위해 출국할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가끔 1학년 0반의 동향을 살피던 구슬비가 그들의 일정을 파악했다.
“……쟤들 소풍 가나 본데?”
“뭐라고! 우리가 없는데 그런 빅 이벤트를 기획하다니!”
두 사람은 서러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눈에 띄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기에 분하고 서운했다.
사실 이들이 소풍에 배제된 건 단순히 등교를 하지 않은 탓이었지만, 관종들의 복잡한 사고 회로는 그런 단순한 사실을 파악하지 못했다.
그들은 반드시 소풍에 참가하리라 다짐했다.
“우리도 가자. 수능 날에 소풍 사전 답사를 할 거래!”
“그래, 마침 신작이 완성됐다. 같이 입고 가지!”
“응!”
두 관종이 참나리의 화신이 되어 1학년 0반을 만나러 가려던 그날.
수능 한파가 밀어닥쳤다.
창문을 열고 영하로 떨어진 기온 속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을 손으로 확인한 구슬비가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이 날씨라면 참나리 트렌치코트를 입기 힘들어. 바람이 많이 불어서 코르사주가 뭉개지기도 쉽고.’
이능파로 옷과 장식품을 감싸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능파를 장시간 발산해 유지하기 위해선 체력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그랬다가는 1학년 0반을 염탐하기 힘들어질 거다.
그뿐만이 아니다.
옷 위를 이능파로 덮으면 관종으로서의 아이덴티티가 위험해진다.
‘모처럼 예쁘고 튀는 옷을 입었는데 이능파 색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게 되잖아!’
구슬비는 벗어날 수 없는 관종의 딜레마에 시달렸다.
도통 행동 방침을 정하지 못하고 그저 구슬비가 수능 한파 앞에 좌절하고 있을 때였다.
“걱정하지 마. 거사를 앞두고 내가 의상에 소홀히 할 리가 없지. 기상 변화는 늘 철저하게 체크하고 있었다!”
괴도 네온이 마치 마술쇼를 하듯, 언뜻 보기엔 아무것도 없었던 아지트 벽을 두드렸다.
그러자 벽에 숨겨진 클로젯의 문손잡이가 드러났고, 괴도 네온은 이를 크게 열어젖혔다.
덜컥!
문이 열리자 구슬비는 눈을 의심했다.
클로젯 안에서 극지에서 보이는 총천연색 빛의 장막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정체는 오로라 빛의 패딩 점퍼였다.
구슬비는 네온이 부린 위대한 마술에 입을 틀어막고 감탄했다.
“세상에…….”
“이계 직물로 만든 오로라 패딩이다. 그 어떤 추위 속에서도 자유롭게, 눈에 띄게 움직일 수 있다. 심미적으로도 기능적으로도 완벽하지!”
이계 직물은 견고하고 색을 자유롭게 낼 수 있지만 다루기 어렵고 자재가 지나치게 비싸 잘 사용되지 않는다.
괴도 네온은 이를 아낌 없이 써 마술을 부린 거다.
괴도 네온은 구슬비 몫의 오로라빛 패딩을 꺼내 그녀의 어깨에 걸쳐 주며 말했다.
“한파 속, 저 멀리서부터 모두의 시선을 붙잡아 두는 오로라처럼 빛나자.”
구슬비는 감동으로 벅차올랐다.
이 옷을 입으면 춥지도 않고, 눈에 띄는 것은 물론 1학년 0반을 감시하기에도 좋을 것이다!
이 둘은 즉각 오로라빛 패딩을 입고 1학년 0반을 쫓아다녔다.
그만 눈에 너무 띄는 바람에 금방 발각되었지만.
비록 들키긴 했지만, 두 관종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이 너무 큰 건 어쩔 수 없다며 그리 아쉬워하지는 않았다.
* * *
오로라빛의 패딩을 보니 바로 두 명의 관종이 떠올랐다.
황지호가 굳이 ‘우리 반 아이들’이라고 언급을 하지 않았더라도 알아봤을 것 같았다.
우리 반 아이들도 관종들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앗, 루이스 페레나와 드루이디스에요! 안녕하세요!”
“최근 안 보여서 걱정했는데, 소풍에는 올 생각인가 봐. 다행이다.”
“저 옷은 뭐냐? 저런 건 어디에서 파는 건데.”
“직접 만드신 것 같습니다. 굉장히 솜씨가 좋군요.”
“색감이 특이한 걸 보니까 이계 직물을 쓴 거 같아. 저런 색은 웬만한 물감으로도 내기 힘든데…… 굉장하다.”
반 아이들도 슬슬 관종들에게 익숙해진 건지 아무렇지 않게 한마디씩 했다.
관종들과 자주 마주치지 못한 독고미로는 괴도 네온의 가명, ‘루이스 페레나’와 구슬비가 자신을 소개할 때 언급한 ‘드루이디스’에 위화감을 느낀 것 같았다.
“……특이한 이름이네.”
“예명 같은 게 아닐까? 연주가 플레이어 중에 가면을 쓰는 사람이 많대.”
처음엔 두 관종들에게 당혹감을 표현하던 권레나도 이제 슬슬 익숙해졌나 보다.
한편, 들통난 관종들은 우리의 상황을 보고 크게 리액션 했다.
“크윽, 들통났군!”
“우리의 존재감을 이 정도 거리에서 지우는 건 무리였어. 휴…… 아깝다!”
“어쩔 수 없다. 그건 우리 같이 눈에 띄는 존재들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니까.”
어디가 어떻게 아깝다는 거지?
저 오로라빛의 패딩을 입은 순간 숨는 건 이미 포기했던 게 아니었나?
둘은 진심으로 은밀하게 행동하려 마음먹었던 것인지 다소 아쉬워했다.
주목을 끈 게 만족스러운지 그렇게 크게 안타까워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쟤들 저러고 가는 거야? 진짜 갈 거 같은데?”
“숨는 건 몰라도 도망 실력은 기가 막히네.”
둘은 빠르게 퇴각할 기세였다.
두 관종은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에 포획해 붙잡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황지호가 진심을 다해 잡는다면 모를까, 여기에서 관종을 붙드는 건 어려웠다.
김유리는 아쉬웠는지 퇴각하는 관종들을 향해 크게 소리를 내 외쳤다.
“우리 소풍은 이번 주 토요일이야! 이 테마파크에서 계속 놀 예정이니까 꼭 와서 같이 놀자!”
김유리가 이능파를 실어 목소리를 낸 건지, 테마파크 전체에 그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에코를 작게 남기며 퍼지는 소리를 관종들도 들은 건지, 김유리 쪽을 슬쩍 보다가 도망쳤다.
관종들이 완전히 사라진 후, 아이들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쟤들 올까?”
“관심받으러 올 거 같은데.”
“그럼 쟤들 몫 도시락도 준비해야겠다! 마카롱이면 오로라랑 비슷한 색을 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 이후에는 반 아이들과 돌아다니며 소풍 계획을 짰다.
최대한 효율적인 동선을 구상해 모든 놀이기구를 한 번씩 타자며 아이들이 들떴다.
예비로 시간을 남겨 가장 재밌었던 놀이기구는 또 타자며 완벽하게 계획을 구상했다.
구상한 결과, 이동 루트 후보가 여러 개가 나와 그날 제비뽑기로 순서를 정해 돌기로 결정했다.
‘의도한 거는 아니지만, 자연스럽게 그들에게 우리 반의 소풍 일정이 전달되었어. 숨기고 싶은 부분은 숨길 수 있고.’
테마파크에서 어떤 동선으로 움직일지 파악할 수는 없겠지만, 김유리가 관종들에게 일정을 큰 목소리로 알린 덕에 일이 수월해졌다.
분명 우리를, 정확히는 목우람을 감시하는 누군가가 우리의 소풍 일정을 알게 된 셈이다.
목우람이 하루 종일 학교 밖에서, 그것도 방문객이 극소수인 테마파크에서 지낼 예정이니 그들이 이를 놓칠 리가 없다.
수능이 치러진 오늘은 목요일.
소풍을 가는 날은 토요일.
나는 남은 시간과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하며 텅텅 빈 테마파크를 둘러보았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