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늦가을 소풍 (2)
‘ㅡ.ㅡ’가 뜬 순간, 1학년 0반 교실이 조용해졌다.
김유리는 오류로 문구가 뜨지 않았을 가능성을 생각했는지, 내 쪽을 흘끗 보았다.
물론 오류는 없었기에 나는 그저 문제없다는 의미를 담아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황지호가 크게 처웃기 시작했다.
“하하하하하하!”
황지호는 반 아이들이 질린 표정을 지을 정도로 처웃다가 말했다.
“조의신, 그걸 기억하고 있었나! 그렇게 인상 깊게 인식되었을 줄은 몰랐군. 하하하하!”
말하는 걸 보니 황지호는 저게 예전에 자신이 사용한 이모티콘인 걸 기억하고 있나 보다.
노친네가 비록 나이는 있지만 기억력은 좋구나.
처웃는 소리 탓에 슬슬 귀가 따가워질 때쯤, 다소 진정한 황지호가 헛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흠, 내 메시지를 자주 읽고 씹은 이유가 이모티콘을 쓰지 않아서인가? 앞으로 중요한 메시지에는 필히 이모티콘을 넣어야겠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나는 딱히 이모티콘이 없어서 황지호의 메시지를 무시한 게 아니다.
다행히 착한 우리 반 아이들이 이 점을 바로 반박했다.
“이모티콘 안 써도 부반장이 메시지 안 씹던데.”
“내 메시지도.”
“저도요!”
하지만 황지호는 다른 아이들의 반박을 그리 신경 쓰지 않았다.
이미 머릿속에서 결론을 내린 것 같았다.
“앞으로는 가끔 이모티콘을 사용하마.”
그냥 이모티콘을 쓰고 싶어서 저러는 게 아닌가?
저럴 줄 알았으면 그냥 노친네라고 쓸 걸 그랬다.
고등학생 흉내를 내는 걸 잊고 애늙은이처럼 말할 때가 많으니 노친네라 써냈어도 다들 납득했을 텐데.
“아, 이제 곧 선생님 오시겠다.”
“샤를로트는 함근형 선생님이랑 먹으려고 아직 포장을 안 뜯었어요. 브레드 나이프 가져올게요.”
함근형 선생님이 조례를 하러 오신 후, 우리 반에서는 ‘가을 소풍 D-1 다과회’를 열었다.
딱히 명분이 없어도 간식을 먹고 차를 마시지만, 이름이 붙으면 더 기분이 나긴 한다.
오늘의 메뉴는 MITRON에서 사 온 사과가 듬뿍 들어간 샤를로트 드 폼므.
음료는 크림 휘핑이 올라간 자색 고구마 라떼였다.
여전히 수능 한파의 영향으로 날이 추운 탓에 따뜻하고 든든한 느낌을 주는 메뉴를 고른 것 같았다.
문제는 메뉴가 전부 달다는 점이었다.
“…….”
‘당뇨병 주의’의 쇼크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이가 포크를 들고 고뇌에 빠져 있었다.
샤를로트 위에 눈처럼 소복이 쌓인 슈가 파우더, 자색 고구마의 색이 보이지 않을 만큼 얹힌 생크림 휘핑은 척 봐도 설탕으로 가득해 보였다.
한이는 샤를로트를 꺼내기 전에도 달달한 디저트를 몇 개나 먹긴 했지만, 평소 같았으면 아무렇지 않게 디저트의 접시를 비웠을 텐데.
한이가 슬픈 얼굴로 디저트를 응시하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팠다.
송대석이 그 모습을 보며 뭐라고 한마디 하려 했지만, 그 전에 민그린이 등짝을 때려 저지하였다.
민그린은 송눈새가 당뇨병 쇼크를 지우는 건 어렵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그때, 또 다른 눈새가 나섰다.
저 눈새는 진짜 눈치가 없다기보다는 일부러 눈치 없이 행동하는 거겠지만.
“걱정하지 말고 들어라. 지나친 당분이 몸에 해롭긴 하나 스트레스도 건강을 해친다.”
“황지호…….”
황지호가 웬일로 한이를 놀리지 않는 거지?
한이가 조금 감동한 얼굴로 포크를 쥐었다.
주저하면서 샤를로트를 포크로 찌르려 할 때였다.
“만약 당뇨에 걸리면 명의를 소개해 주마. 그러니 마음껏 먹어도 좋다.”
황지호의 입 모양을 읽은 한이의 손이 멈췄다.
한이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포크를 내려놓았다.
자색 고구마 라떼가 들어간 잔을 잡으려던 한이는 대신 생수병을 쥐고 깡생수를 들이켰다.
황지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 ‘하하하하!’ 하고 처웃었다.
저 장면을 보는 반 아이들이 내게 말을 걸었다.
“부반장, 지호도 황눈새로 하는 게 어떻습니까?”
“이모티콘 ‘ㅡ.ㅡ’가 마음에 든 것 같으니 두 개를 합쳐서 ‘황눈새ㅡ.ㅡ’로 해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저 새끼는 일부러 저러는 거 아니냐.”
‘황눈새ㅡ.ㅡ’도 노친네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이번 건은 도인의 제자 맹효돈의 말 대로라고 생각했다.
독고미로가 등교한 이후, 정확히는 독고미로와 한이가 대련한 이후부터 한이가 조금 변했다.
크게 눈에 띄진 않지만, 가까이 지내는 이들이라면 다소 신경 쓰일 수준의 작은 변화였다.
‘한이는 평소에도 단 음식을 잘 먹지만, 요즘 들어 당분 섭취량이 전보다 늘었어. 한 1 .5배 정도 더 달게 먹는 것 같은데…….’
한이는 대련의 결과에 승복해서 별다른 내색은 안 하고 독고미로와도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고 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 실제로 한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내색을 잘 안 하는 타입이니 티가 나질 않지만, 어쩌면 당분 섭취량을 늘려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단 음식을 지나치게 먹으면 건강이 상하게 되니 자칭 친우인 황지호 입장에선 그게 걱정되었을 거다.
플레이어가 일반인에 비해 튼튼하다고 하지만, 다치기도 하고 병에도 걸린다.
지나친 당분 섭취는 혈당을 조절하는 인슐린의 기능 저하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치유 이능을 쓰는 방법도 있지만, 큰 병을 치유 이능으로 낫게 하면 반동이 커. 이능파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어.’
황지호는 걱정 반, 장난 반을 담아 저렇게 한이를 놀려 먹는 듯했다.
걱정이 담겨 있다 한들 저렇게 말하면 딱히 좋게 받아들여지진 않을 텐데.
뭐, 옛 친우를 놀려먹은 결과 호감도가 바닥을 치더라도 그건 노친네가 알아서 하겠지.
“이 차에는 설탕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건 정말로 걱정하지 않고 마셔도 된다.”
황지호는 달지 않은 차를 한이에게 내밀었다.
한이는 고통, 슬픔, 떨떠름함이 뒤섞인 얼굴로 주저하다가 찻잔을 받아들였다.
* * *
서울시 양천구 소재의 서서울호수공원.
영원의 호수가 소유한 팀 빌딩의 최상층.
적적한 밤 호수를 내려다보며 권제인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고 있었다.
한파 속의, 그것도 해가 진 이후의 호수를 보고 연주한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권제인의 선율은 다정하고 애틋했다.
권제인의 연주를 듣는 이들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대략 짐작했다.
권제인으로부터 저런 소리를 끌어낼 수 있는 건 현재 그녀의 조카 권레나 한 명뿐이었으니까.
“레나가 가을 소풍을 앞두고 반 친구들이랑 단체 티셔츠를 맞췄대. 티셔츠에는 각자가 붙여 준 문구가 들어갈 예정인데, 그 문구를 오늘 정했다고 해.”
연주를 마친 권제인이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예상하던 답을 말했다.
권제인은 오늘 권레나에게 레슨을 하며 들었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반 아이들이 레나에게 ‘백금의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별명을 붙여 줬어. 나랑 나란히 비슷한 이명이 붙은 것 같아서 기뻐.”
권제인의 이명은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푸른 이능파를 다루고, 푸른 몸체의 바이올린을 고집하여 붙은 이명이었다.
권제인은 그동안 자신의 이명에 그리 큰 감흥이 없었지만, 조카에게 비슷한 이명이 붙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새삼 남다르게 느껴졌다.
그 생각만으로도 권제인의 바이올린이 멋대로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다시금 권제인이 활을 들어 올렸을 때였다.
“제인아, 잠깐. 내일 일정부터 이야기하고 계속하자!”
권제인의 라이브를 두 시간 넘게 듣던 재러드 리가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옆에서 같이 연주를 듣던 영원의 호수 간부들이 온몸으로 불만스러움을 표출했지만, 간신히 이를 억눌렀다.
“간단하게 두 가지 안건만 이야기할게. 나도 제인이의 연주를 더 듣고 싶으니까.”
“빨리 말하세요. 전 당장 다음 연주를 듣고 싶습니다.”
“사족은 필요 없다, 얼른!”
간부들의 재촉에 재러드 리가 급히 홀로그램을 몇 개 켰다.
첫 번째 홀로그램에는 영국에 파견된 영원의 호수 팀원들의 보고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권제인이 홀로그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 협회 영국 지부에서 파견을 요청한 건이네. 잘 해결됐어?”
“그쪽에선 제인이나 내가 오길 바라고 있었으니까 말은 많았는데…… 뭐, 어쨌든 일은 마무리됐어.”
며칠 전, 플레이어 협회 영국 지부에서 영원의 호수 측에 파견 요청을 했다.
영국 영토 내에서 대대적인 마족의 움직임이 포착되어 이를 추적하는 데에 힘을 빌려 달라는 게 그들의 요청이었다.
재러드 리는 홀로그램에 적힌 내용을 요약하며 말했다.
“우리의 결론은 포모르 마족이 영국에서 철수했다는 것. 움직임이 포착된 것도 그들이 본거지를 이동시키며 흔적이 남은 거지.”
“포모르 마족이라…… 핼러윈에 파티를 여는 걸 빼면 조용히 지내던 것 같았는데.”
“이번 핼러윈 파티에서 경매가 열리기 전 문제가 발생했잖아. ‘괴도 네온’이 경매를 노리는 듯한 발언도 했고. 그것 때문에 본거지를 옮긴 건가?”
다누 신족과 포모르 마족의 힘겨루기는 암암리에 퍼져 있는 사실이었다.
협회에는 이에 개입할 이유가 없으니, 특정 상위 존재나 마족과 인연이 없는 한 대부분의 인류는 중립을 지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저번 핼러윈 파티를 계기로 포모르 마족이 영국이 아닌 다른 국가로 이동했다.
“포모르 마족은 켈트 신화 영향권 내에서 지명도가 높아. 여전히 다누 신족과도 대립하고 있는 것 같고. 그런 그들이 영국을 벗어난다면 아마…….”
“강대한 지력을 품은 땅이겠죠.”
간부들의 목소리가 어두워졌다.
이계 충돌 이후 지력을 노리고 진족들이 몰려드는 곳 하면 이곳, 한반도였으니까.
“포모르 마족이 본거지를 옮긴 건 확실하지만, 어디로 왜 움직였는지는 파악이 안 돼. 아, 참고로 협회의 영국 지부와 영국 정부는 그들이 영국 땅을 떠났다면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어.”
재러드 리와 간부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하던 권제인이 입을 열었다.
“본거지를 옮기는 건 하루 이틀 내로 되는 일이 아니야. 당분간 주시하기만 해도 괜찮겠지. 그들이 한반도에 오는 게 확실해진 이후에 경계해도 늦지 않아.”
“제인이 말에 동감해.”
“하지만 신경 쓰이는 게 하나 있어.”
권제인은 푸른 눈을 빛내며 말했다.
“왜 굳이 영국 지부에서 우릴 부른 걸까. ‘세 기사의 맹세’도 있는데.”
그 말에 재러드 리가 홀로그램을 하나 더 띄웠다.
홀로그램에는 영국의 유명 프로 플레이어 팀과 팀원들의 목록이 나와 있었다.
“파견된 팀원들이 우리 외에도 몇몇 플레이어 팀이 추적 과정에 참가한 걸 확인했어. ‘세 기사의 맹세’는 없다는데.”
영원의 호수 팀원들이 그 말에 석연치 않은 표정을 지었다.
‘세 기사의 맹세’가 권레나의 클래스메이트를 노린다는 걸 안 이후, 영원의 호수는 줄곧 그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권제인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말했다.
“그러면 두 번째 안건을 설명해 줘.”
“아, 두 번째 안건은 내일 소풍 건이야. 테마파크에서 논다고 했지?”
“네, 소풍을 가게 되었으니 마스터 크래프트맨의 제자가 긴 외출을 하게 되겠군요.”
권제인의 얼굴이 흐려졌다.
하필 이날, 한반도 내의 프로 플레이어 팀의 회합이 있다.
오래전부터 잡은 일정이기에 팀 마스터인 권제인이 갑자기 빠지기 어려웠다.
재러드 리는 불안해하는 권제인을 안심시키듯 말했다.
“테마파크에는 내가 갈게.”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