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늦가을 소풍 (6)
단체전이라는 말에 의아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보물찾기를 경험하지 못한 아이들은 별생각 없어 보였지만, 보통 보물찾기는 개인전으로 진행되니 저런 반응을 해도 이상한 게 아니었다.
아이들의 반응을 살피던 함근형 선생님이 말했다.
“용제건 선생님이 너희들의 안전을 위해서 단체전으로 진행하자고 제안했다. 나도 동의했다.”
“안전이요?”
“여기가 어디인지 떠올려라.”
눈치 빠른 아이들은 함근형 선생님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눈치챘지만,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었다.
현재 이곳은 황명 그룹이 인수한 테마파크 안.
평화로운 테마파크에서 소풍을 즐기던 중에 갑자기 안전 이야기가 나오면 어색하게 느껴질 거다.
“석촌호수의 비극을 잊었나?”
“……아.”
그 말에 아이들이 잠잠해졌다.
이곳의 손님은 우리뿐이고, 직원도 없다.
아직 황명 그룹에서 테마파크에 직원을 배치하지 않았고, 어트랙션을 가동하고 조명을 조정하는 건 전부 로봇이 담당하고 있으니까.
테마파크가 이렇게 된 건 테마파크의 매각 탓이긴 하지만,
이곳에 우리밖에 손님이 없는 이유는 석촌호수 주변에 발생한 이계로 인한 참극 탓이다.
“이곳은 그 사건 이후로 이계가 발생한 적이 없다. 이계 다발 구역은 아니므로 경계도는 낮지만, 이곳에서 일어났던 일을 잊지 마라.”
이 세계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이계가 발생할 수 있다.
희귀도가 높은 이계의 경우 위성이 사전에 전조 현상을 포착한다지만, 예외의 경우도 있었다.
올해 들어 몇 번이나 전조 없이 이계가 나타나지 않았던가.
조금 분위기가 숙연해졌을 때 용제건이 디바이스로 홀로그램을 하나 전개했다.
홀로그램에는 랜덤 제비뽑기 애플리케이션이 떠 있었다.
“나랑 함근형 선생님이 계속 순찰할 예정이긴 하지만, 너희들이 단독 행동 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자, 조부터 정하자.”
“한 조에 몇 명씩 들어가요?”
“지금 1열세 명이네. 한 조에 두 명씩, 마지막 조는 세 명씩.”
애플리케이션에 인원수, 아이들의 이름 등을 입력한 용제건이 설명을 덧붙였다.
“아, 참고로 세 명이 들어간 조에는 패널티를 부여할 거야. 사람이 하나 많으니까.”
용제건이 웃으면서 패널티라는 단어를 뱉자 긴장하는 아이들이 속출했다.
대놓고 2인 1조 그룹에 들어가고 싶다는 아이들이 꽤 있었다.
“……두 명 들어간 조였으면 좋겠다.”
“용제건 선생님이 준비한 패널티…….”
한편, 용제건이 홀로그램 화면에 띄운 애플리케이션 구동 과정을 지켜보던 송대석이 미묘한 얼굴을 했다.
잠시 무언가를 말할 듯 말듯 입을 벙긋거리며 생각에 잠겨 있던 송대석은 결국 타이밍을 놓쳤다.
곧 조 편성 결과가 발표되었다.
“자, 그럼 한 조씩 순서대로 발표할게. 먼저 1조부터.”
[1조: 김유리, 맹효돈]
“어, 효돈이랑 같은 조다! 1조니까 1등 할 수 있을 것 같아.”
“어…….”
김유리가 웃으면서 다가오자 맹효돈이 뻘쭘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맹효돈은 김유리를 비롯한 우리 반 여학생과 대화하는 데에 크게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럿 사이에 섞여서 대화를 하는 게 아니라, 단둘이 대화를 하며 개별 행동 하는 데에는 여전히 젬병인 것 같았다.
맹효돈은 김유리의 보물 쪽지 수색 계획을 들으며 뻣뻣하게 굳어 있었는데, 저 꼴을 보니 쪽지를 한 개라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다.
“다음은 2조 차례야.”
[2조: 민그린, 옹길동]
이 발표에 희비가 엇갈렸다.
“파트너가 되지 못해 아쉽군. 이렇게 된 이상 선의의 경쟁을 하자.”
자리를 이동하기 전, 옹길동이 구슬비에게 말을 걸었지만 반응이 없었다.
구슬비는 당연히 옹길동과 자신이 같은 조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놀라서 말도 못 했다.
“뭐! 저놈하고?”
화면에 뜬 건 민그린과 옹길동의 이름인데 송대석이 제일 격하게 반응했다.
옹길동은 그런 송대석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열의에 찬 목소리로 민그린에게 말을 걸었다.
“꼭 한 번 이야기 하고 싶었다. 한국 미술계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신동과 같은 조가 되어 영광이다. 분명 두 명의 천재가 모인 이 조가 우승을 거머쥐겠지.”
“……어, 보물찾기에 우승도 있었나?”
“가장 많은 보물을 찾아 승리를 쟁취하는 것. 그것을 우승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민그린은 낯선 관종의 열렬한 반응에 당혹스러워하면서도 마음을 다잡는 것 같았다.
이 기회에 낯선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익히고 같은 반 아이와도 친해질 모양이었다.
옹길동은 민그린이 자신과 눈을 맞추기 시작하자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림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에 은광고의 미술부, 동양화 소모임과 합동전을 준비한다고 들었다. 은광고 축제가 벌써 기대되는군. 반드시 가서 민그린 화백의 신작을 직접 볼 생각이다.”
“어…… 합동전에 관해 알고 있었어?”
“물론이다. 계속 민그린 화백의 신작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예술을 사랑하는 괴도, 옹길동은 민그린 화백의 팬이다.
괴도 네온으로서 빅 벤에 거대한 예고장을 남기고 맨몸으로 포모르 마족의 경매에 뛰어 들어가 ‘이무기의 귀천’을 되찾아오겠다 할 정도로.
그런데 모처럼 이번 소풍에서 같은 조가 됐으니 할 이야기가 넘칠 거다.
민그린은 미술부와 동양화 소모임의 열렬한 팬들을 상대하는 데에 익숙해서 그런 걸까.
작품 이야기가 나오니 자연스럽게 대화가 이어졌다.
훈훈한 팬미팅 광경이었지만, 이를 노골적으로 고깝게 보는 인물 둘이 있었다.
“……뭐야.”
“……저놈 말은 잘하네.”
구슬비와 송대석이었다.
그 둘을 보던 용제건이 아주 밝은 얼굴로 말했다.
“다음 조도 발표할게.”
[3조: 구슬비, 송대석]
구슬비와 송대석이 홀로그램을 한 번, 도란도란 얘기하고 있는 민그린과 옹길동을 번갈아 봤다.
송대석은 민그린이 미소를 띤 걸 보자 울컥한 얼굴로 용제건에게 항의했다.
“애플리케이션이 뭔가 이상한데, 조작한 거 아닙니까?”
“뭐야, 조작 가능성이 있어?”
“저 타입의 애플리케이션을 다뤄 본 경험이 있는데, 아까 부담임이 손가락을 움직이는 순서가 뭔가 이상했다.”
구슬비는 솔깃한 얼굴로 송대석에게 계속 말할 것을 재촉했다.
송대석은 옹길동과 민그린이 같은 조를 하는 걸 막고 싶은지 필사적으로 말했다.
“보통은 변숫값을 좌측에서부터 입력하는데, 우측의 버튼을 누른 후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뭔가 이상해! 결과가 조작됐을 수도 있다!”
“……증거라고 하기엔 미묘한데.”
구슬비가 냉정하게 판단했다.
내 생각에도 그랬다.
의문을 품을 수준은 됐지만, 조작되었다고 단언할 만한 목격 정보라고 볼 수는 없었다.
역시나 송대석이 제기한 의문은 용제건의 짧은 항변에 간단히 분쇄되었다.
“홀로그램의 조도가 낮아서 변숫값 입력 전에 조작해서 올렸던 거야. 우측에 조도 조절 패널이 있어.”
용제건이 홀로그램을 회전해 애플리케이션 조작 화면을 보여 주며 말했다.
눈을 크게 뜨고 조도 패널을 확인한 송대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용제건은 송대석이 더 할 말이 있는지 기다려 주었지만, 송대석은 다른 단서를 잡지 못한 듯했다.
“아쉽네. 하지만 재미있는 의견이었어.”
용제건이 씨익 웃고, 송대석은 분한 얼굴을 했다.
송대석에게는 민그린의 타박이 덤으로 얹어졌다.
선생님을 의심하는 송대석의 모습이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나 보다.
용제건이 그간 한 짓이 있으니 의심해도 어쩔 수 없다고 여긴 건지 크게 화를 내진 않았지만.
‘조작 여부는 둘째치고, 3조는 의외로 나쁜 콤비는 아닌 것 같은데.’
구슬비와 송대석은 나란히 서서 민그린과 옹길동의 팬미팅을 응시했다.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두 사람이었다.
정말 어쩌면 용제건이 저 장면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조를 저렇게 짠 걸지도 모르겠다.
“그럼 발표를 계속할까.”
[4조: 이레나, 한이]
“한이랑 같은 조다! 한이야, 우리 츄러스 자판기 있는 쪽으로 돌지 않을래?”
“좋아.”
권레나는 한이 옆에 가서 어디부터 돌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이는 점심시간 때 달달한 음식을 많이 먹은 탓에 조금 망설이긴 했지만, 권레나의 메뉴 설명에 그만 넘어갔다.
어쩐지 두 사람은 보물찾기보다는 테마파크 구경과 간식 쇼핑을 우선할 것 같았다.
한편, 독고미로가 그 광경을 다소 아쉽게 보긴 했지만, 송대석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다음 조가 발표되었다.
[5조: 독고미로, 사월세음]
“잘 부탁드려요! 아까 잠깐 비행하면서 어디부터 돌지 생각해 봤는데요…….”
“사실 나도 아까 루트를 생각해 놨어.”
독고미로는 한이와 파트너가 되고 싶던 눈치였지만, 곧 사월세음과 의기투합했다.
패왕은 승리를 향한 의지를 불태웠다.
패왕의 기동력은 익히 들은바니, 저 팀에서 가장 많은 보물 쪽지를 찾아낼지도 모르겠다.
“남은 조는 굳이 발표하지 않아도 알겠지만, 일단은 화면으로 띄울게.”
[6조: 목우람, 조의신, 황지호]
“저희 셋이 같은 조군요. 패널티가 걱정됩니다.”
목우람은 나와 황지호 쪽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반 아이들은 우리 조에 어떤 패널티가 걸릴지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그럼 패널티에 관해 설명해 볼까.”
그 패널티에 관해서 미리 알고 있는 입장에선 왜 저리 뜸을 들이는지 알 수 없었다.
그 패널티란 건 알고 보면 별거 아닌 내용이었으니까.
용제건은 아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의미심장하게 웃다가 말했다.
“6조의 수색 범위는 인공섬으로 제한할게.”
“인공섬…… 밖은 추운데.”
이 테마파크는 실내와 실외로 나뉜다.
여전히 수능 한파의 여파로 추웠던 탓에 현재 우리 반 아이들은 실내 어트랙션만을 이용하는 중이었다.
실내 시설만 돌아도 하루를 다 소진할 만큼 넓었기 때문에 불만을 표하는 아이들이 없었다.
구경 정도는 해 보자는 말이 나오긴 했지만.
“그러면 작전을 짤 시간을 10분 정도 줄게. 자, 그럼…….”
“조별로 행동하기 전, 의견을 제시해도 되겠습니까?”
민그린과 한참을 이야기하던 옹길동이 말했다.
옹길동이 의견을 제시한다는 말에 구슬비와 송대석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용제건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왜? 조 편성에 불만이 있어?”
“비슷합니다.”
옹길동은 설마 이제 와서 조를 바꾸자고 할 건가?
아니면 괴도답게 용제건의 수작을 파헤친 것일까?
옹길동은 심각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이름이 적힌 조 편성 화면을 보며 입을 열었다.
“옹길동 대신 루이스 페레나라고 써 주시겠습니까? 저는 루이스 쪽이 더 익숙하고 귀에 와닿습니다.”
“…….”
구슬비가 대놓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옹길동은 그런 시선을 받는 것조차 모른 채, ‘옹길동’ 이름 석 자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용제건은 지금 반 아이들이 어떤 분위기인지 파악하고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다음 기회가 있으면 그렇게 써 줄게.”
“감사합니다!”
“하하하하!”
노친네는 결국 이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황지호처럼 처웃진 않았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세상 최고의 멍청이를 보는 듯한 표정으로 옹길동을 바라봤다.
몹시 서운해 보이는 구슬비의 원망 속에서 아이들은 조별로 이야기를 나눴다.
3조 송대석과 구슬비는 2조 옹길동과 민그린을 쫓아다니기로 암묵적인 합의를 한 것 같았다.
마침내 출발 시간이 되었다.
“자, 그럼 출발해 볼까. 제한 시간은 2시간. 그럼 보물을 찾아서 돌아와.”
용제건의 출발 신호에 반 아이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인공섬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달리는 동안, 목우람이 들뜬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그럼 가 보죠! 어떤 보물을 찾을 수 있을지 기대됩니다.”
앞서 달리던 황지호가 개폐 버튼 앞에 도달하고, 곧 문이 열리며 찬바람이 쏟아졌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