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07화 (505/925)

72. 늦가을 소풍 (7)

플레이어 협회 한국 지부 본관 앞에 위치한 플레이어 회관.

에어 스테이지형 리무진 창문 너머로 권제인이 회관 입구와 주차장을 응시했다.

권제인의 푸른 눈동자에 이곳저곳에 진을 친 수많은 기자들이 비추어졌다.

손에 카메라를 든 기자들과 플레이어 회관 주차 요원이 입씨름하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비공개 회담으로 진행될 예정이었는데.’

리무진을 주차할 장소를 찾던 영원의 호수 소속 간부도 기자들을 발견했다.

간부는 푸른 눈으로 가만히 기자를 바라보는 권제인을 달래듯이 말했다.

“한국 4대 플레이어 팀의 마스터들이 모이는 자리니 다들 주목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이렇게 넷이 모이는 건 오랜만이니까요.”

현존하는 세계 10대 플레이어 팀 중, 한국인이 팀 마스터인 곳은 총 넷.

홍염의 제왕 염방열이 이끄는 붉은 사자.

푸른 바이올리니스트 권제인이 있는 영원의 호수.

그리고 절흑풍림과 수국향기.

보통 대중들은 이 네 개의 플레이어 팀을 한국 4대 플레이어 팀으로 꼽았다.

영원의 호수는 팀 주요 간부 중에 외국인이 여럿 있었고 그동안 영국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한국 팀으로 분류해도 되는가에 관한 논란이 많았다.

그러나 최근 영원의 호수가 한국에 정착하며 그 논란은 완전히 식었다.

권제인이 한반도에 머물게 되자 염방열이 회합을 제안했고, 권제인은 이에 응했다.

회합이 조용히 진행됐으면 하는 생각에 비공개 회담을 제안했으나 결국 일이 이렇게 됐다.

‘어느 나라에 있든 언론은 똑같구나. 아니, 여기가 더 심할지도…….’

기자들은 플레이어들의 보복이 두려운 건지 회관 내부로 진입한 것 같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기삿거리를 잡아내고 싶은 건지 주변을 점거하고 죄 없는 주차 요원을 몰아붙였다.

회관 건물 내부에는 플레이어 출신의 경비와 직원이 있지만, 주차장을 비롯한 일부 구역을 담당한 직원 중에는 일반인도 섞여 있다.

기자들은 그 점을 노린 듯했다.

아마 기자들은 주차 요원을 들들 볶아 회합에 참가한 간부들이 이용한 차량이 무엇인지, 아직 오지 않은 차량은 뭐가 있는지 캐내려는 것 같았다.

‘주차장에도 플레이어 출신 경비를 배치해 달라고 협회 측에 건의해야겠어.’

권제인이 생각에 잠긴 사이, 스텔스 모드로 조용히 주차를 마친 간부가 물었다.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저 사이를 뚫고 갈 것인가.

평소 같았으면 재러드 리가 유들유들한 말투로 주의를 끌고 기자들을 상대하는 사이에 권제인이 입장했을 거다.

하지만 오늘 재러드 리는 부재중이었다.

‘곧 약속한 시간인데.’

권제인이 기자들에게 사진 몇 장 찍혀 주고 그냥 들어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

협회 직원들이 제복을 입고 기자들을 향해 척척 걸어갔다.

밖의 상황을 파악한 플레이어 경비들이 등장한 것 같았다.

척 봐도 산전수전을 헤쳐 나온 듯한 험한 인상의 경비가 등장하자 기자들이 다소 얌전해졌다.

플레이어 경비들이 ‘당신들은 현재 사유지를 무단 침입, 점거 중이다.’ 무서울 정도로 정중하게 설명하자 기자들이 해산하기 시작했다.

법과 주먹을 같이 휘두르는 강자 앞에 약한 이들이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주변이 조용해졌습니다. 가 보죠.”

“그래.”

기자들이 없음을 확인한 영원의 호수 간부가 앞장서서 권제인을 안내했다.

회합 장소는 플레이어 회관의 최상층, 연회장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권제인이 가장 늦게 도착한 것 같았다.

권제인은 시계를 재차 확인했는데, 약속한 시각까지는 아직 10분 넘게 남아 있었다.

‘다들 일찍 왔네.’

권제인이 그렇게 생각하며 문 앞에 서자, 그녀의 얼굴을 확인한 직원들이 공손하게 가죽 장정의 방명록을 내밀었다.

“푸른 바이올리니스트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방명록 작성을 부탁드립니다.”

권제인이 플레이어 협회 로고가 들어간 만년필을 들자 직원이 방명록 페이지를 넘겼다.

힘찬 글씨체로 방문 소감을 남긴 염방열.

인쇄된 글씨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또박또박 쓴 수국향기의 팀 마스터.

그에 반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글씨를 휘갈긴 절흑풍림의 팀 마스터.

방명록 페이지가 넘어가는 걸 보니 다른 팀의 마스터들은 권제인이 파악한 대로 먼저 도착한 듯했다.

연회장의 문이 열리자 원탁에 앉은 세 명의 팀 마스터와 그 뒤에 서 있는 동행인이 보였다.

가장 안쪽에 앉아 있던 당당한 풍채의 붉은 사자 팀 마스터, 염방열이 자리에서 일어나 권제인을 맞이했다.

“제인아, 어서 와라.”

최고 연장자인 염방열이 자리에서 일어나니, 각각 옆쪽에 앉아 있던 후배인 다른 둘도 따라 일어났다.

“……간만에 뵙소.”

여전히 검은색으로 온몸을 휘감은 절흑풍림의 팀 마스터가 검은 죽립 사이로 눈을 마주하며 말했다.

절흑풍림의 팀 마스터, 흑림(黑林)의 검성.

절흑풍림의 팀 마스터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유일한 20대로 가장 어렸는데, 가장 현대인답지 않은 차림과 애늙은이 같은 말투를 썼다.

그는 중학교 시절 읽었던 무협지의 영향을 크게 받는 바람에 늘 무림인 같은 차림과 하오체를 사용하곤 했다.

타고난 광림과 스킬도 무림인에게 어울리는 것들뿐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선택받은 협객이라며 쉬지 않고 무(武)를 갈고 닦아 이 자리에 올랐다.

참고로 은광고 출신인 그는 면접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0반행이 결정되었다.

“오랜만이에요, 제인이 언니.”

흑림의 검성에 이어 인사한 건 수국향기의 팀 마스터, 백화난만(百花爛漫).

그녀는 각종 꽃이 아름답게 흐드러지도록 핀 모습을 칭하는 말을 이명으로 가지고 있었다.

수국향기의 팀 마스터 백화난만은 은광고 출신은 아니지만, 간부들 중에 은광고 출신이 꽤 있어 은광고인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중에는 권제인도 포함되어 있었고 늘 마주칠 때마다 살갑게 인사하곤 했다.

권제인은 부드러운 표정으로 맞인사했다.

“오랜만이에요, 다들.”

“그러면 앉지.”

염방열의 권유로 권제인이 자리에 앉자 동행한 간부가 그녀의 뒤에 섰다.

다른 팀 마스터들도 전원 동행인을 한 명씩 대동한 상태였다.

동행인 중에 권제인이 모르는 이도 있었지만, 팀 로고가 들어간 의상이나 액세서리를 착용한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해당 팀의 간부로 추정되었다.

“본론부터 듣고 싶소. 이 몸은 한 문파를 짊어진 장문인으로서 수련과 문파 관리에 다망하오.”

흑림의 검성은 오늘도 컨셉을 유지하는 데에 충실한 것 같았다.

자신의 플레이어 팀을 ‘문파’, 본인을 ‘장문인’이라고 칭하는 것도 그렇고, 말투도 그렇고.

염방열은 복잡한 얼굴로 무림인 같은 후배를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봤으니까 이야기하고 싶은 게 많아. 조금만 시간을 내 줘.”

“백화난만 소저…….”

“소저라는 말은 들을 때마다 어색하네.”

백화난만의 부드러운 제지에 흑림의 검성이 검은 죽립을 눌러쓰며 팔짱을 끼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잠시 목소리를 가다듬던 흑림의 검성이 진중하게 말했다.

“소저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군. 내가 생각이 짧았소.”

백화난만은 흑림의 검성을 다루는 데에 익숙한 건지 생글생글 웃으며 염방열과 권제인을 바라봤다.

검은 무림인을 처리했으니 이제 이야기하자는 뜻인 것 같았다.

“후배가 바쁜 것 같으니 나도 짧게 이야기하지. 디바이스에 보낸 자료를 확인했나?”

“네. 첫 번째 파일은 플레이어 협회에서 발표한 플레이어 위성 SAT-K의 관측, 통계 자료였고, 두 번째 파일은…….”

본래 말수가 적은 권제인과 과묵한 무림인 컨셉을 유지하려는 흑림의 검성을 두고, 대화는 홍염의 제왕과 백화난만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한반도의 이계 발생 양상과 플레이어 위성의 상태 등이 논의의 주 내용이 되었다.

이 상태로 이계의 수가 늘어나면 현재 한반도에 주재한 프로 플레이어 팀만으로는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 온다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제인이 네가 한국으로 와 줘서 다행이다. 덕분에 이쪽에도 여유가 생겼어.”

“아뇨, 영원의 호수는 이계 공략에 그리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은걸요.”

권제인은 마침 자신 쪽으로 화제가 돌아온 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잠시 머리를 돌려 영원의 호수 간부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자, 간부가 홀로그램을 하나 전개했다.

포모르 마족의 동향에 관해 조사한 보고서였다.

보고서 안에는 포모르 마족이 영국 영토에서 철수하여 자취를 감추었는데, 한반도로 이동할 가능성이 시사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다누 신족과 대치 중이던 포모르 마족이 한반도로?”

“아직 가능성의 이야기지만.”

마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잠자코 있던 흑림의 검성이 분개했다.

“감히 이 땅을 점거하고 있는 마교의 잔당들이 한둘이 아니거늘. 몇 놈이 되었건 상대할 수 있게 더더욱 방비를 철저히 해야겠소.”

절흑풍림은 다소 특이한 컨셉을 잡고 운영되는 프로 플레이어 팀이었다.

흑림의 검성은 절흑풍림 문파의 장문인이며, 문파의 지상 목표는 사악한 마교의 척살.

여기에서 그 사악한 마교란, 인간과 적대하는 마신을 섬기는 마족들을 칭했다.

“든든하네. 마족 건은 검성에게 맡겨도 되겠다. 도울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맡겨 주시오!”

사실상 백화난만은 마족 건에는 개입하지 않고 흑림의 검성에게 떠넘기겠다고 의사 표현을 한 셈인데, 흑림의 검성은 의욕에 불타 보였다.

흑림의 검성은 이미 마족과 어찌 대항할지 계획을 세운 건지, 앞으로의 대책을 줄줄 읊었다.

“서방에서 수행 중인 제자를 불러들일까 하오. 아직 연배는 그리 차지 않았으나 이미 마교와 대결해서 공을 몇 번이나 세운 몸. 도움이 될 것이오.”

흑림의 검성에게 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들은 팀 마스터들과 동행인들이 놀라움을 표했다.

그가 평소에 유지하는 컨셉을 고려하면 제자가 있으리라 생각하는 쪽이 더 이상했다.

수많은 제자를 두고 있는 염방열은 껄껄 웃으며 축하 인사를 했고, 권제인은 그냥 듣기만 했다.

‘어떤 제자를 두었든 우리 레나보다는 못하겠지.’

권제인은 갑자기 치밀어오르는 권레나를 향한 자부심과 걱정에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최근 이여름과 다시 연락이 되어 안정을 찾은 권레나는 이능 바이올린을 다루는 데에 몰두했다.

무기로 이능 바이올린을 다루는 이는 전 세계에서 손으로 꼽을 만큼 적은데, 권레나가 이를 느리지만 조금씩 해내는 걸 볼 때마다 권제인은 벅차오르는 기분을 느꼈다.

백화난만을 제외한 다른 팀 마스터들이 제자 생각에 잠시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었다.

“그러면 포모르 마족 건은 절흑풍림에서 맡는 걸로 해 두지. 또 할 말이 있나?”

흑림의 검성, 백화난만은 고개를 저었고 권제인은 침묵했다.

그러자 염방열이 회의를 마무리 짓기 전, 한마디 했다.

“내년 초에 자리를 비울 생길 일이 생길 것 같다.”

“내년 초요?”

“그래, 용궁에 잠시 들를 일이 생길 것 같군. 그사이에 붉은 사자가 담당한 이계 다발 구역을 나눠서 맡아 줬으면 한다.”

용궁이라는 말을 한 염방열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이대로 가면 한반도가 이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측을 말할 때보다, 포모르 마족이 이 땅에 오리라는 말을 들을 때보다 어두운 얼굴이었다.

용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염방열이 용궁에 방문하는 건 이상하진 않았으나 어쩐지 좋은 일로 방문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백화난만은 염방열의 그 어두운 얼굴을 알아채지 못한 척 웃으며 말했다.

“그럼 홍(紅)이와 함께 용궁에 다녀오시겠네요. 부디 조심해서 다녀와 주세요.”

백화난만은 ‘홍(紅)’이라고 불리는 용왕신의 무녀와 연이 있었고, 염방열도 이를 알고 있었다.

염방열은 어느 사이엔가 어두운 표정을 지우고 평소의 호방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걱정하지 마라.”

염방열은 웃으며 덧붙였다.

“나는 나의 가족을 지킬 것이다.”

그 말에는 가족이 아닌 자는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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