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보물찾기 (9)
‘용궁 초대권’이라는 단어에 반 아이들이 먼저 반응했다.
용왕신의 총아가 누군가를 용궁으로 부르는 의미의 무게를 깨달은 아이도 있었지만, 별생각 없는 아이가 많았다.
“용궁 초대권……? 뭐냐, 그 중국집 무료 이용권 같은 상품은.”
“효돈아, 용쌤은 진짜 용이잖아! 용족들이 머무는 용궁을 말하는 걸 거야.”
“어, 하지만 우리나라 용족들은 거의 다 염준열 선배님 집에 사는데요.”
“그건 그렇긴 한데…….”
사월세음이 예리한 지적을 했다.
용궁은 용이 머무는 궁전이지만, 우리나라에 머무는 용들은 거의 다 붉은 사자 팀 빌딩에서 사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대화를 나누는 아이들 사이에서 크게 놀란 아이들이 눈에 띄었다.
“용궁이라고…… 진심인가? 아깝다.”
“용궁으로 초대한다니, 1등을 놓친 게 애석하다. 내 힘으로도 쉽게 갈 수 없는 장소이건만! 다음 기회가 있다면 반드시 1등을 노려야겠군.”
구슬비와 옹길동은 용궁에 가고 싶었나 보다.
특히 송대석의 방해로 1등 쪽지를 놓쳤다는 옹길동이 크게 아쉬워했다.
민그린은 다시 한번 미안해하며 말을 걸었다.
“다음에는 나도 도울게. 그런데 용궁에는 왜?”
“용궁은 산해진미, 금은보화가 넘쳐 나는 걸로 유명한 데다가 이 세계에 몇 안 되는 인간계와 신계의 경계니까.”
지금은 상위 존재라는 말이 더 익숙한 신.
그들의 세계는 인간계와 분리되었다.
신화 시절에는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는 가까이 있었고, 신전만 있으면 쉽게 강림할 수 있어 왕래가 자주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두 세계는 완전히 분리되어 이 땅에 상위 존재가 길게 머무를 수 없게 되었다.
아주 한정적인 간섭만 가능할 뿐.
“용궁은 신화의 흔적이 그대로 남은 몇 안 되는 곳이다. 낭만이 있지.”
“1년에 한 번 정도 용왕신이 직접 용궁으로 오긴 해.”
용제건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지만, 다들 탄성을 터뜨렸다.
다들 용궁과 용왕신의 관계성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용제건이 직접 말하니 현실감이 크게 느껴져서 그런가 보다.
“그런 말을 들으니까 갑자기 저 상품이 괜찮아 보이네.”
“저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지호의 상품을 탐낼 생각은 없으니 안심하십시오.”
황지호는 용제건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계속 그를 관찰하는 중인 것 같았다.
용제건은 실실 웃기만 할 뿐, 전혀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바람에 딱히 소득이 없었던 것 같지만.
“양도도 가능하긴 한데, 가능하면 가까운 사람을 불렀으면 좋겠어. 네가 직접 오면 더할 나위 없고.”
용제건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이미 나와 호족 중 한 명은 용왕 출입 자격을 확보한 상태다.
나는 용왕신으로부터 직접 허락을 받았고, 호족 중 하나는 청룡과 황룡의 용새(龍璽)를 받기로 얘기가 되었다.
그런데 용제건은 황지호에게 용궁 초대권을 상품으로 줬다.
‘우리 반 아이들 중 아무나 불러낼 생각이었나?’
보물찾기 1등 상품으로 걸린 걸 보면 그리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1등 쪽지를 찾기 전까지 황지호가 찾아낸 보물 쪽지의 내용을 생각하면 그렇다.
용제건은 마치 황지호가 수많은 꽝 쪽지를 찾아낼 걸 예측한 것 같은 내용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나 목우람이 찾아낸 것도 그렇고.’
내가 찾아낸 건 주로 염준열과 관련된 공식 굿즈였다.
그중에는 기간 한정, 수량 한정 굿즈도 포함되어 있어 현재로선 입수하기 상당히 곤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쪽지마다 염준열의 이름이 쓰여 있는 걸 볼 때마다 기쁨 반, 착잡함 반을 느꼈다.
상품이 마음에 들고 용제건의 뛰어난 쪽지 배치 실력에 감탄했지만, 동시에 용제건 손에 놀아나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었다.
아마 용제건은 황지호가 1등 쪽지를 찾아내도록 유도한 게 분명했다.
‘호족을 한 명 더 부를 생각인가.’
용제건은 처음부터 황지호에게 용궁 초대권을 줄 생각으로 판을 짰다.
그렇다면 왜 황지호에게 용궁 초대권을 준 것인가?
‘……호족을 두 명 불러야 할 이유가 있다고 판단해서인가.’
아니면 유희계 용족답게 ‘그냥’일지도 모른다.
한 명이 오는 것보다 둘이 오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저런 짓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상품을 수령할 차례가 다가왔다.
“자, 의신아. 준열이가 준비한 상품을 모두 찾았구나. 우리 준열이가 기뻐할 거야.”
“염준열 선배님이 직접 준비한 상품인가요?”
“응. 1학년 0반 아이들과 보물찾기를 할 예정이라고 했더니 이것저것 준비해 줬어.”
이 상품은 용제건이 아니라 염준열이 준비한 거였구나!
어쩐지, 용제건이 개인 소장 중인 굿즈를 걸 리가 없는데 뭔가 이상했다.
어쩌다가 재고를 구한 건가 싶었는데, 염준열이 준비한 거였다니!
내 선배, 내 제자가 우리 반 소풍을 위해 이런 좋은 상품을 마련해 주다니.
상품 자체도 마음에 들었지만 선배와 제자의 마음이 기특하여 더욱 뜻깊은 선물이 되었다.
염준열의 굿즈가 들어 있는 상자는 제법 무게가 나갔지만, 전혀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의신아, 상품이 마음에 들어?”
“네, 감사합니다. 염준열 선배님께도 인사드릴게요.”
“우리 준열이가 기뻐하겠다.”
용제건은 흐뭇해하며 웃다가 갑자기 운을 뗐다.
“이번 소풍에 나에게 부탁했던 일도 그렇고, 상품도 그렇고…… 나 정말 잘하지 않았어?”
그야 용제건은 잘하긴 했다.
보물찾기를 준비해 아이들에게 놀 거리를 제공하고, 아이들을 습격 장소로부터 떨어뜨린 것도, 서돌을 서포트한 것도, 상품의 내용 자체도.
이번 소풍 때 용제건의 활약은 가히 칭찬할 만했다.
“그러면 내 부탁 하나 들어줄 수 있을까?”
그야 물론, 이렇게나 열심히 해 준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를 위해 뭔들 못 하겠는가.
하지만 선뜻 알았다고 답변하기 어려웠다.
묘하게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에서 바로 고개를 끄덕이면 후회할 것 같았다.
좀처럼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있을 때, 황지호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다음은 목우람 차례로군. 아이템 카드를 많이 찾았던데.”
“운이 따라 줘서 꽤 찾았습니다. 당분간 소모 아이템 걱정은 안 해도 될 것 같습니다.”
용제건이 황지호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자 황지호는 당장이라도 처웃을 것처럼 입꼬리를 올렸다.
노친네는 꽝 쪽지에 쓰인 문구들을 계속 마음에 뒀나 보다.
어쨌든 덕분에 자연스럽게 용제건의 문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었다.
이렇게 용제건의 뜻을 헤아릴 수 없는 채로 레크리에이션 시간이 끝났다.
그 이후로는 자유행동 시간이 되었지만, 반 아이들은 다 같이 놀러 다녔다.
각종 어트랙션을 즐기고 슬슬 소풍 종료 시각이 다가왔다.
다들 원 없이 논 것처럼 보였지만, 은근히 아쉬움을 표했다.
“기념품 파는 곳이 없네…….”
“마스코트와 로고를 교체 중이라니까 어쩔 수 없지.”
“온라인숍도 문을 전부 닫았더군. 그래서 우리는 직접 만들어 왔다.”
현재 기념품 판매점은 물론 자판기를 비롯한 무인 매대도 모두 문을 닫은 상태였다.
열려 있는 기념품점이라곤 목우람을 유인하기 위해 준비했던 인공섬의 성 1층.
호구 목우람이라면 기념품점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롤러코스터 정점에서 찍은 사진을 프린팅한 컵, 유령의 집을 돌아다닌 영상 기록을 적외선 카메라로 녹화해 재생하는 미니어처 등등.
권레나를 뮤즈로 삼는 목우람이 그녀와의 추억이 담긴 기념품을 그냥 지나칠 리가 없다는 계산이었다.
‘목우람은 권레나와 사월세음의 비명 소리에 반응한 것 같지만.’
유령의 집을 돌아다니면서 두 사람이 비명을 몇 번 지르다 미니어처에 녹음이 됐는데, 목우람은 그게 신경 쓰였나 보다.
목우람은 인공섬에 있는 기념품점에 관해 말할까 말까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입을 떼지 않았다.
위험한 장소에 반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게 꺼려진 모양이었다.
결국, 기념품은 옹길동이 만들어 주기로 하며 다들 아쉬움을 삼켰다.
옹길동이 모든 반 아이들에게 기념품을 준다는 말에 구슬비가 잠시 서글픈 얼굴을 하긴 했으나 반 아이들이 기뻐하는 걸 보고 납득했다.
“귀가도 소풍 일정의 일부다. 다들 조심해서 해산하도록.”
“네!”
소풍 뒤풀이라며 테마파크 주변의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무사히 1학년 0반의 가을 소풍이 끝났다.
‘귀가까지가 소풍이라면 아직 내 소풍은 끝나지 않은 셈이네.’
우리 반에선 나 외에도 몇 명의 소풍은 잠시 더 이어질 것 같았다.
나 외에도 아직 소풍이 끝나지 않은 이는 셋.
황지호, 목우람 그리고 용제건.
이 셋은 해산한 후에도 아직 집에 갈 수 없었다.
“다들 고생 많았어. 쥐덫 많이 모았는데, 혹시 필요해?”
“쥐 퇴치는 내 염원 중 하나지만, 안타깝게도 그 쥐와 내가 동맹 관계라서.”
약속 장소로 향하는 에어 리무진 안.
호랑이와 용이 쥐덫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고 있었다.
나야 그렇다 치고 이 앞에 목우람이 있다는 걸 잊었나?
“쥐와 용, 그렇다면…….”
목우람이 황지호를 응시하며 생각에 잠겼다.
목우람이 자신의 정체를 추측 중이라는 걸 아는데도 황지호는 그걸 방치했다.
노친네는 우리 반 애들에게 정체를 감출 생각이 정말로 없나 보다.
“아, 의신아, 아까 한 얘기 말인데.”
그때 용제건이 갑자기 치고 들어왔다.
아까 하려 했던 ‘부탁’에 관해 이야기하려는 건가?
“부탁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꽤 간절해 보이는데 들어줘도 괜찮지 않을까?
용제건이 고생한 건 사실이고,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고, 오늘 선물도 좋은 걸 줬고…….
“용제건, 낯짝도 두껍군. 용살자에게 죽을 뻔한 걸 잊었나? 네 목숨을 구한 은인에게 부탁을 하다니. 그런 걸 배은망덕하다고 한다.”
황지호가 보물찾기 건으로 쌓인 게 많았나 보다.
황지호의 말이 따지고 보면 틀린 건 아니긴 한데, 교복을 입고 교사한테 그런 소릴 하는 건 좀 미묘했다.
용제건은 황지호의 신랄한 말에도 여전히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알아, 그래서 이렇게 착하게 의신이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잖아?”
“용제건, 인간의 언어를 잘못 이해하고 있나? ‘착하게’라니.”
혼란스러워하는 목우람을 두고 나잇값 못 하는 두 어르신의 입씨름이 한참을 이어졌다.
황지호가 혀를 차며 말했다.
“우리 후예가 고생이 많군. 네 보물찾기에도 어울려 주면 심력이 남아나질 않겠어.”
“그 아이가 ‘우리 후예’라는 말을 들으면 기뻐할 거야. 꼭 전해 줘야겠다.”
용제건의 말에는 묘하게 뼈가 있었다.
황지호는 김신록을 크게 비호할 수 없는 입장이다.
어쩌면 눈앞에서 ‘우리 후예’라고 불러 준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말싸움에서 황지호가 밀리지 않지만, 김신록 건이 얽히면 질 수밖에 없네.’
태만했던 황지호가 호족 내에서 입장이 좋지 않은 김신록과 계속 친우로 지낸 용제건을 이기긴 어려울 거다.
김신록 이야기가 나온 이후부터는 계속 침묵이 흘렀다.
후예라는 단어 덕에 목우람은 황지호가 진족이라는 확신을 굳혔고, 황지호는 김신록 얘기에 마음이 복잡해진 것 같았다.
물론, 이 와중에도 용제건의 기분은 하늘을 찌를 듯 좋아 보였다.
그사이에도 에어 리무진은 계속 달려 호족이 소유하고 있는 건물에 당도했다.
몇 번의 보안 절차를 걸쳐 안으로 들어가자 서돌과 재러드 리가 보였다.
그때, 서돌이 곧장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아이야.”
뭘 말하는 거지?
되묻기 전에 재러드 리가 크게 놀라며 반응했다.
“네가, 의신이가 그…….”
이번에는 보호의 대상이 되었다고 하나 재러드 리도 세계적으로 알려진 일류 플레이어.
어쩌면 이번 건을 계기로 내가 벌여 온 행적 등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목우람처럼 ‘그 단어’를 입에 담을지도 모른다.
복잡한 마음을 삼키고 충격에 대비했다.
“느루의 새 앰배서더?”
“아닌데요.”
재러드 리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오해에 황지호가 덩달아 한마디 덧붙였다.
“조의신…… 네가 눈에 띄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거늘.”
눈에 띄는 것에 호불호는 딱히 없지만, 굳이 따지면 불호다.
내 의사를 입에 담기 전에 노친네가 헛소리를 했다.
“네가 승낙한다면 황명 그룹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핵심 모델로 너를…….”
“싫어.”
황지호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