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17화 (515/925)

74. 모델 (1)

느루의 앰배서더.

황명 그룹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핵심 모델.

어느 쪽도 하겠다고 답한 적이 없는데, 두 진족의 수장이 나잇값을 못 하고 떠들기 시작했다.

“황명 그룹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핵심 모델? 황호가 직접 하면 되잖아.”

“이 몸은 이미 황명 그룹의 중심에 있으니 굳이 모델을 할 필요가 없다. 이미 느루의 앰배서더가 여럿 있는데 조의신까지 넘보다니 욕심이 많군.”

“그건 그렇네. 황호가 다 해 먹고 있으니까.”

“그래, 황명 그룹은 내가 장악하고 있다.”

황지호가 광오하게 대답했지만, 서돌은 저 말에 납득했다.

황명 그룹을 황지호가 장악 중인 건 다른 진족도 인정하는 부분인가 보다.

서돌은 황지호의 말에 납득하고도 아직 포기하지 않는 것 같았다.

“계절이 바뀌면 계약 만료되는 모델도 있어. 어차피 검은색 이능파를 쓰는 플레이어가 없어서 새로 뽑아야 돼.”

“검은색 이능파를 쓰는 이가 드물긴 하나 없는 것도 아니거늘. 꼴을 보니 조의신에게 거절당한 것 같은데 왜 구질구질하게 구는 건가.”

황지호의 말대로였다.

과연 구질구질함의 대명사 홍규빈에게 가호를 내린 서돌다웠다.

그러고 보니 서돌은 권제인과도 연이 있는데, 설마 권제인도 저런 경향이 있는 걸까.

권레나 한정 팔불출 성향이 있는 것 같긴 한데…….

“후보로 몇 명 추천받았는데 내 눈에 안 차. 그리고 같은 검은색이라도 전혀 달라.”

서돌은 그렇게 말하며 홀로그램을 띄웠다.

홀로그램 화면 위, 검은색이 가득한 색상표가 보였다.

미묘하게 밝기가 다른 수준인 검은색들이었는데, 디자이너의 눈에는 전부 다르게 보이는 듯했다.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데…….’

하지만 이 부분에 있어선 나를 제외하고 다들 같은 의견인 듯했다.

“후보가 저렇게 많으면 고민이 되겠군요.”

“제인이 드레스 고를 때에도 늘 시간이 오래 걸려. 비슷해 보여도 막상 입고 나면 전혀 다른 느낌이 나니까.”

목우람과 재러드 리에 이어 황지호도 고개를 끄덕였다.

황지호는 저 말에 동의는 했으나 서돌이 탐탁지 않은 건 여전한 것 같았다.

“이능파의 색은 미묘하게 다르지. 무모하군. 먼저 색을 정해 두고 거기에 맞는 플레이어를 찾으려면 100년이 걸려도 모자랄 거다.”

“무모하지 않아요. 조의신이 있잖아요.”

서돌은 색상표에 나온 수많은 검은색 중 하나를 가리켰다.

그 검은색 옆에 붙어 있는 체크박스에는 색이 칠해져 있었는데, 아마 눈여겨본 검은색을 체크한 것 같았다.

아니, 잠깐.

방금 서돌이 갑자기 존댓말을 쓰지 않았나?

서돌의 시선이 내 쪽으로 고정되는 바람에 꺼림칙한 기분이 배가 되었다.

“먹물 같은 검은색도 있고, 흑단 같은 검은색도 있죠. 하지만 제가 원하는 건 밤하늘 같은 검은색이에요. 마침 조의신의 이능파 색이 딱 그렇고요.”

“조의신의 이능파가 밤하늘의 색 같다라. 그 말에는 동감한다.”

“그렇죠? 다음 시즌 느루의 메인 컨셉은 밤하늘이에요. 그리고 조의신이 느루의 앰배서더가 되면 한반도 한정으로 무명의 초신성을 모티브로 한 액세서리 한정 세트를 발매할 건데…….”

“괜찮군. 액세서리 라인업을 보니 은광고 교복과 매치가 될 것 같기도 하고.”

방금 전까지 각을 세우던 진족의 수장들이 갑자기 의기투합한 것처럼 보였다.

서돌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 둔 것 같았다.

서돌에게 부탁했던 건도 있고 앞으로도 가능한 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기에 계속 칼같이 거절하기 어려웠다.

‘서돌이 흔쾌히 내 제안을 받아들인 건 ‘세 기사의 맹세’에게 한 방 먹일 기회가 생겨서 그런 건 줄 알았는데…….’

느루의 앰배서더 건을 받아들이기 쉽도록 먼저 내 제안을 들어준 걸지도 모르겠다.

눈에 띄어 봤자 득 될 일이 없고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인데 느루의 앰배서더나 황명 그룹의 모델이 될 겨를이 없다.

‘……시나리오에 따라서는 그만한 지위를 가지고 있어야 움직이기 편할 수도 있긴 한데.’

플마고의 타이틀 히어로 주수혁.

이대로 가면 그는 언젠가 염준열의 뒤를 잇는 스타 플레이어가 될 거다.

게다가 주수혁은 주오 그룹의 자제이기도 하다.

주수혁이 유명인이기에 발생하는 시나리오가 있고, 시나리오가 진행되는 장소에 출입하기 위해선 그만한 명성이 필요할 수도 있다.

황지호의 도움을 받으면 못 들어갈 장소가 거의 없긴 하겠지만, 억지로 꽂아 넣은 낙하산이 그 자리에 있으면 오히려 눈에 띌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엔 환몽 경매 때처럼 염준열의 얼굴을 빌려야 할지도 몰라. 그건 피하고 싶어.’

결국 답이 나오지 않았다.

어느 쪽도 장단점이 있으니 처음엔 그냥 거절했던 거다.

저렇게 집요하게 나오니까 생각을 한 번 더 해 보긴 했지만.

“매력적인 제안이지만, 조의신이 승낙하지 않는군. 포기해라, 아니, 보류하는 게 낫겠군.”

실컷 서돌을 부추기던 황지호가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처음부터 저렇게 말할 것이지, 왜 떠본 건가.

황지호는 내가 받아들일까 말까 조금 고민했던 것도 꿰뚫어 본 것 같다.

서돌은 몇 번 더 구질구질하게 굴었으나 황지호가 강력히 말을 끊었다.

“오늘 왜 이 자리에 왔는지 잊었나? 남은 귀도 밤말을 못 들을 정도로 박살 나야 정신을 차릴 생각인가.”

세 기사의 맹세에 의해 소멸된 쥐 얘기를 꺼내자 서돌이 표정을 바꿨다.

신나게 존댓말로 떠들던 서돌이 결국엔 꼬리를 내렸다.

“……조의신,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지 연락해.”

저 반말을 들으니 겨우 안심이 되었다.

서돌이 어떨 때 존댓말을 쓰는지 잘 아는 재러드 리도 안심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 얘기를 시작하는 게 좋겠군.”

황지호가 신호를 보내자 호족 부하가 거대한 캐리어를 몇 개 끌고 왔다.

테마파크에서 습격자들을 욱여넣었던 캐리어였다.

캐리어 안에 이능파를 흘러 넣어 안의 상황을 확인한 호족 부하가 신중하게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캐리어의 문이 열리자 구깃구깃하게 신체가 접힌 금발의 습격자들이 드러났다.

몇몇 습격자들의 관절과 뼈는 어색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저렇게 몸이 꺾였는데도 살아 있다니.”

목우람이 습격자들의 생명 반응을 확인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냉정한 얼굴로 캐리어 안을 살피던 황지호가 물었다.

“선글라스를 쓴 놈들은?”

“그자들은 정신을 차린 바람에 힘으로 제압해 결계 안에 뒀습니다. 수석 주술사가 관리하는 중입니다.”

금발이 아닌 자들, 즉, 재러드 리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기사들은 여기 있는 자들보다 우수한 모양이다.

그런데 죽호도 이번 일에 가담했나?

제자인 김유리가 소풍을 가는데 어떤 놈들이 습격을 시도했으니 자원해서 참석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못 차리는군. 지나치게 쇠약한데…….”

황지호는 금발의 습격자들을 자세히 살피다가 재러드 리를 응시했다.

재러드 리는 날이 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장하며 역변한 바람에 그렇게 닮은 것 같진 않으나 이 습격자들은 재러드 리의 젊은 시절과 판박이다.

반응을 보니 재러드 리는 뭔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가까이에서 천천히 살피니 감이 잡히는군. 이건 인간에 가깝지만,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무언가다.”

황지호가 그 말을 뱉자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똑같이 생긴 금발의 습격자들이 캐리어에 처박혀 있는 것도 기괴했고, 황지호가 그자들을 ‘인간이라고 할 수 없는 무언가’로 단정 짓자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한편, 황지호의 말에 금발의 습격자들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서돌도 캐리어 안을 관찰했다.

직접 만지기는 싫은지 쥐색의 이능파를 부려 습격자의 신체를 들어 올리며 살피던 서돌이 말했다.

“겉보기에는 재러드 리의 어린 시절과 닮았는데, 속은 그렇지 않네. 신체 내부 구조나 이능파의 흐름이 인간 같지 않아.”

“그럼 혹시 저자들은 진족이나 후예입니까?”

“그럴 리가. 감히 이것들을 우리랑 엮지 말아 줄래?”

목우람의 질문에 서돌이 짜증을 내며 답했다.

목우람은 즉각 고개를 숙이고 사과했다.

긴 사과를 받은 후에야 서돌이 짜증을 조금 풀었다.

모를 수도 있지 왜 우리 반 애한테 저렇게까지 짜증을 내는가.

황지호도 서돌에게 적당히 하라며 말리긴 했으나 저 습격자들이 진족이나 후예 취급 받은 점에 못마땅한 건 마찬가지인 듯했다.

‘인간도, 진족도, 후예도 아닌 존재. 같은 취급 받으면 불쾌할 만한 것. 그렇다면 저건…….’

이계 충돌 이후 이 땅을 구성하게 된 존재들에 관해 떠올리니 금방 답이 나왔다.

가끔 나에게 욕을 한답시고 ‘그것’에 비유해 소리치는 동급생도 있었으니까.

나는 답을 입에 담았다.

“여기에 있는 것들은 ‘에너미’로군요.”

이계의 틈에서 나타나 인간을 공격하는 존재, ‘에너미’.

에너미는 처음 등장했을 당시, 괴물이나 몬스터로 불리는 게 일반적일 만큼 흉측하고 괴상한 형태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그러나 인간보다 더 인간답고, 예술품보다 더 아름다운 형태의 에너미도 존재한다.

그래서 정부와 협회는 이계에서 온 것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괴물이나 몬스터가 되지 않도록 온 힘을 기울였다.

외형이 괴물답지 않은 에너미에 대한 경계가 느슨해지는 걸 막기 위해서.

‘에너미를 테이밍하는 술사를 옆에 붙인 건, 괴물처럼 생긴 에너미를 옆에 둠으로써 저것들이 더더욱 인간처럼 보이게 하려던 거겠지.’

세 기사의 맹세 습격자 중에선 에너미를 테이밍해 부리는 이가 있었다.

만약 그 옆에 제법 수려한 외모를 한 금발의 습격자가 있다면, 누구도 그 습격자를 에너미라 생각하기 어려웠을 거다.

“……그래, 저것들은 에너미야.”

황지호와 서돌이 답하기 전에 재러드 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게 남아 있을 줄은 몰랐어. ‘세 기사의 맹세’를 나오기 전 다 죽여 버렸으니까.”

재러드 리가 음산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여기에 죽지 않은 에너미들이 있다. 네 허술함에 소풍이 엉망이 될 뻔했다.”

황지호가 호족의 수장다운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대화의 주제는 소풍이었고, 여전히 ‘ㅡ.ㅡ’가 새겨진 반 티를 입고 있는 바람에 그리 위엄 있지는 않았다.

“네 모습을 한 에너미가 내 영역에서 우리 학교의 학생을 습격했다. 자초지종을 말하라.”

목숨 빚을 졌으니 재러드 리로선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재러드 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세 기사의 맹세에 스카우트된 이유부터 말씀드려야겠군요. 저는 남들과 차별화된 특출난 이능은 없지만, 종합 능력치가 고르게 높고 신체 능력과 공격 스킬이 그럭저럭 쓸 만합니다. 밸런스가 잘 잡힌 타입이죠.”

“즉, 기준으로 삼기 좋은 타입이었던 거로군.”

“네, 그래서 그자들은 저를 모델로 에너미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세 기사의 맹세 중 ‘물그림자의 기사’의 광림이 물그림자에 실체를 부여했죠.”

재러드 리의 설명에 황지호가 의문을 표했다.

“이상하군. 인간의 광림으로 이렇게 정교한 에너미를 만들 수 있다고?”

“……그자들의 힘만 있던 게 아니었으니까요.”

“상위 존재가 힘을 빌려줬나? 복수의 상위 존재가 가담한다면 가능하겠군.”

재러드 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들이 사용한 건 영국의 지력입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18)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