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18화 (516/925)

74. 모델 (2)

사람의 형태와 유사한 에너미를 만드는 이능.

그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다.

에너미를 테이밍하여 권속으로 삼거나 수족처럼 부리는 이들이 있는 걸 생각하면 불가능한 말은 아니다.

그래도 무언가가 이상했다.

‘두 가지가 마음에 걸려.’

첫째는 ‘지력’이다.

물그림자의 기사가 지력을 활용해서 에너미를 다룬다는 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예전에 황지호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지력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건 진족뿐이지. 그 지력 때문에 진족들이 한반도로 몰려들어 온 거고. 인간도 지력의 영향을 받지만, 진족만큼 지력을 사용할 수 없어.

지력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건 진족.

인간은 그 힘을 다룰 수 없다.

그렇다면 물그림자의 기사는 인간이 아닌 걸까?

진족이 프로 플레이어 팀에 들어가는 건 드물지만 없는 건 아니다.

용족이 붉은 사자를 지원하는 것처럼 진족과 긴밀한 관계를 맺은 팀이 있기도 하고.

‘아니, 인간이 지력을 다룰 수 없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어. 지력 터미널을 활용하는 방식도 있으니까.’

지력을 운용하는 시설인 지력 터미널은 은광구 광일동에 세워질 예정이다.

이 시설이 세워지면 인류도 지력을 다룰 수 있게 될 거다.

진족에 비해 훨씬 효율이 떨어지겠지만, 한반도에는 지력이 넘치고 특히 은광구는 지력의 질이 남다르니 크게 문제 되진 않을 거다.

‘그 점을 생각하면 그 부분이 더 마음에 걸려.’

두 번째로 마음에 걸렸던 단어는 ‘영국’이다.

지력을 느끼지 못하는 나로선 한국과 영국의 지력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하지만 해외에서 몰려드는 진족의 수를 고려하면, 한반도가 품은 지력이 크다는 건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간다.

‘저 정도의 에너미들을 생산하려면 지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을까? 영국에 충분한 지력이 있는 걸까?’

이 부분은 전문가를 통해 확인하는 게 좋겠다.

마침 이 자리에는 최근 영국에 다녀온 진족의 수장이 둘이나 있었다.

황지호는 내 생일 즈음에 전용기를 끌고 마중을 나왔고, 서돌은 세 기사의 맹세에 쥐를 심을 겸 핼러윈 파티에 참석할 겸 영국에 들렀으니까.

“그 물그림자의 기사는 인간인가?”

“인간이야. 내 쪽에 공격을 가할 때 기척을 읽었어.”

황지호는 재러드 리에게 물었는데, 답변은 서돌이 했다.

물그림자의 기사가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자 황지호가 경멸 어린 표정을 지었다.

서돌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리석군.”

“저 정도로 멍청할 줄이야…….”

인간이 영국의 지력을 사용한 일에 저 정도의 반응을 보이다니.

보통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영국의 지력에 문제가 있어?”

“영국은 한반도만큼 지력이 풍족하지 않다. 이 몸이 직접 영국에 가 봤기에 단언할 수 있다.”

“풍족하지 않다는 표현은 너무 후한데. 지력이 없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말라 비틀어진 상태야.”

영국에 더 오래 체류한 서돌이 영국의 지력 상황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지력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건 진족뿐이다. 다른 존재들은 특별한 이능이나 도구 없이는 지력을 쓸 수 없어.”

그 말에 의문이 생겼다.

그렇다면 진족은 지력을 쓸 때 스킬이나 광림을 이용해 끌어다 쓰는 게 아닌가?

지력을 쓸 일도 없고, 지력에 관해 배울 기회가 없었기에 감이 잘 잡히지 않았다.

“진족은 지력을 어떻게 써? 이능을 통해 쓰는 건 아닌가 보네.”

“내 설명에 배려가 부족했군. 비유하자면, 그래…… 숨을 쉬는 것과 비슷하다. 인간은 호흡을 통해 생명 활동에 사용할 에너지를 얻지 않나. 지력을 활용하는 것도 비슷한 감각이다.”

황지호의 비유를 듣고 나니 조금 이해가 갔다.

그렇다면 지력은 산소 농도 같은 건가?

아니, 그 비유를 사용하면 조금 문제가 생기는데…….

황지호의 설명이 계속 이어졌다.

“물론 이 비유가 완벽한 건 아니다. 차이점도 있어. 고농도의 산소 속에선 신체가 망가지지만, 지력은 다르다. 넘칠수록 좋다.”

지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점은 이해했다.

하지만 그 설명을 듣고 나니 걸리는 점이 있었다.

‘어째서 물그림자의 기사에게 어리석다고 한 거지?’

영국의 지력은 상당히 부족한 상태다.

그 상황에서 물그림자의 기사는 지력을 끌어다가 재러드 리와 유사한 형태의 에너미를 생성했다.

오히려 칭찬해야 할 상황 아닌가?

하지만 황지호와 서돌 모두 세 기사의 맹세를 경멸하고 비웃었다.

여전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그 무언가는 진족과 인간의 지력을 다루는 방식의 차이점에서 비롯된 것 같은데.’

그렇게 판단한 나는 질문했다.

“물그림자의 기사가 지력을 사용한 게 문제가 있는 거야?”

“거의 답을 찾은 것 같군.”

물그림자의 기사 이야기가 나온 후 계속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던 황지호가 흐뭇해하며 웃었다.

그런 소리는 됐으니까 빨리 대답이나 해 줬으면 좋겠는데.

또 내 표정으로부터 생각을 읽은 건지 황지호가 씨익 웃으며 답했다.

“진족이 지력을 끌어다 쓰는 데에는 제한이 있다. 그 땅에서 지명도가 높을수록, 체류 기간이 길수록 지력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지.”

호족은 이 땅의 건국신화인 개천신화에 등장했다.

게다가 5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땅에 머물렀다.

그렇다면 호족은 지력을 쓰는 데에 최적화된 건가.

호족에게 있어서 저 제한은 디버프가 아니라 버프인 것 같은데.

저런 조건이 존재하는데 한반도에서 지명도가 낮은 진족들이 이 땅에 몰려드는 걸 보면 이 땅의 지력이 정말 풍족한가 보다.

“하지만 그것도 지력이 풍족할 때의 이야기이다. 지력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면 우리의 방식으로는 사용할 수 없어.”

황지호는 자신의 설명이 상당히 모호하다는 걸 알고 있는지, 이능파를 부려 허공에 무언가를 그렸다.

“물이 3분의 1 정도 차 있는 물컵을 떠올려 봐라.”

말이 물컵이지 황지호가 그린 건 황금빛의 와인잔이었다.

와인잔에는 금빛의 이능파가 3분의 1 정도 차 있었다.

“한반도의 지력 수준을 비유하자면, 컵의 내용물이 많아 넘쳐 흐르는 모양새다. 하지만 대부분의 땅은 지력이 이 정도 수준으로 남아 있지. 진족의 방식으로는 이 내용물을 사용할 수 없어. 덧붙이자면 영국은…… 잔에 내용물이 거의 없는 상황에 가깝지. ”

그때, 지켜보고만 있던 서돌이 허공에 손을 놀렸다.

그러자 쥐색의 이능파가 이리저리 모습을 바꾸다가 빨대와 망치 모양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능이나 도구를 쓰면 이야기가 달라. 빨대를 꽂거나 망치로 컵을 부순다고 생각해 봐. 그럼 지력을 삼키고, 손을 적실 수 있겠지.”

진족의 방식이 아닌 방법으로는 얼마 안 남은 지력도 쓸 수 있는 거구나.

황지호와 서돌이 한 설명과 비유를 바탕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영국의 지력 수준은 바닥이나, 진족이 사용하는 것과 다른 방식으로 지력을 끌어다 쓸 수 있긴 하다.

물그림자의 기사는 인간이고, 영국의 지력을 사용해 재러드 리와 유사한 형태의 에너미를 창조했다.

그리고 황지호와 서돌은 물그림자의 기사를 어리석다 표현하고 경멸했다.

‘진족도 하지 못하는 일을 해냈는데, 경멸당하고 어리석다 칭해지는 이유…….’

지력을 끌어다 써서일까?

그건 아닐 거다.

만약 그랬다면 황지호가 은광구 광일동에 지력 터미널 건설 계획을 막았을 거다.

그렇다면 그들이 지력을 사용해 사람을 해하려 해서일까?

그것도 아닐 것 같았다.

황지호는 몰라도 서돌의 윤리 관념은 그리 건전하지 못한 것 같으니까.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야.’

후보로 생각한 답을 하나하나 지운 후, 결론을 내렸다.

“지력이 바닥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는구나. 진족의 수장들이 어리석다고 칭할 만큼 큰일이 터지나 봐.”

내 말에 황지호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지력이 사라지면 그 땅의 인과력, 항상성이 무너진다. 세계에 기록이 남을 법한 폐해가 남겠지. 땅은 황폐해지고, 상상도 못 한 재난이 닥칠 거다.”

황지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섬뜩한 말이었다.

그 땅의 인과관계가 무너진다는 말은 예고 없이 천재지변이 닥칠 수도 있다는 말과 일치한다.

지진파가 관측되지도 않고 대지진이 발생할 수도, 대도심에 예고 없이 뇌우를 동반한 토네이도가 발생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 정도로 지력이 떨어졌다면, 이미 사고가 크게 났겠네.”

“남 얘기처럼 말하는군.”

“남 얘기니까.”

서돌은 영국과 나름 연고가 있는 걸로 아는데 그리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래도 서돌이 한 ‘이미 사고가 크게 났을 것이다’라는 말이 몹시 마음에 걸렸다.

재러드 리가 세 기사의 맹세를 탈퇴한 건 꽤 이전의 일이다.

영원의 호수가 명성을 얻기 전이니, 지금 은광고 1학년 아이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10년이 넘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어도 이상하지 않다.

‘이 세계의 영국에, 이전 세계와 달리 발생한 대재난 사태가 있었나?’

대답은 금방 나왔다.

이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의 운명을 바꾼 대재난 사태가 있었다.

그 사건으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가 가족을 잃었으니 잊을 수 없었다.

나는 재러드 리와 목우람 쪽을 돌아보았다.

재러드 리와 목우람은 지력에 관한 개념이 생소해 이야기를 따라가기에 바쁜 것 같았다.

“세 기사의 맹세가 지력을 끌어다 쓴 지역은 맨체스터인가요?”

생각을 정리하느라 미동도 안 하던 재러드 리가 번뜩 고개를 들었다.

내 질문을 듣긴 한 건지 곧바로 대답했다.

“맞아, 내가 나온 후에 본거지를 옮겼지만…….”

한국어로 유창하게 답하던 재러드 리가 얼굴을 딱딱히 굳혔다.

현재 대화의 흐름에서 왜 맨체스터 이야기가 나왔는지 깨달은 것 같았다.

“맨체스터에 대규모 이계 발생 사태가 있었죠.”

플레이어계의 전설로 회자되는 유명한 이계 공략 사례,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그 당시 영국 각지에 동시다발적으로 이계가 발생하고, 협회의 영국 지부는 반목하던 진족의 습격을 받았다.

지원이 끊긴 와중 영원의 호수는 단독으로 싸웠다.

영원의 호수는 일주일 만에 다섯 개의 던전과 한 개의 타워, 두 개의 미궁을 공략했고, 팀 마스터 권제인은 플레이어 최초로 영국 여왕으로부터 명예 훈장을 하사받았다.

‘영국의 땅에 동시에 그 정도로 이계가 발생하고, 특히 맨체스터가 그런 상황이 됐다면…….’

우연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다.

이계 충돌 이후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시대가 되었지만, 그때의 일은 플레이어계에서 전설로 꼽힐 만한 사건 아닌가.

황지호와 서돌은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재러드 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때 세 기사의 맹세에 속했고, 지력과 연관된 사건에 연루되었던 입장에선 내 결론이 그리 달갑지 않을 거다.

“맨체스터의 대이계는 지력의 고갈로 발생했을지도 모릅니다.”

맨체스터에 발발한 대이계.

권레나의 가족을 비롯한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던 대재난 사태.

이는 세 기사의 맹세가 벌인 지력 약탈로 인한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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