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모델 (3)
“그럴 수가……!”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이해한 재러드 리가 무너져 내렸다.
재러드 리는 세 기사의 맹세를 탈퇴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영원의 호수 팀원으로서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에 참가했다.
그때 살아남은 몇 안 되는 팀원 중 하나인 재러드는 점점 신뢰를 쌓아 서브 팀 마스터 자리에 올랐다.
그래도 그가 세 기사의 맹세 출신이며, 그를 모델로 한 에너미가 목우람을 노렸고 그 에너미를 만들기 위해 지력을 약탈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반응을 보니 재러드 리는 상관관계에 관해 전혀 몰랐던 것 같네.’
목우람이 바닥에 주저앉은 재러드 리를 부축해 소파에 앉혔다.
재러드 리는 거의 몸을 가누지 못했는데, 목우람은 가볍게 그를 일으켜 세웠다.
재러드 리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다가 겨우 목우람에게 고맙다고 짧게 인사한 후, 질문했다.
“……그자는 알고 그랬을까요?”
저 질문은 나나 목우람에게 하는 게 아니라 두 수장들에게 하는 것 같았다.
대답은 황지호가 했다.
“그 땅이 계속 경고를 보냈을 거다. 상위 존재도 가만히 있지 않았겠지.”
“땅이 경고를……?”
“인과를 무너뜨리는 건 쉬운 일이 아니지. 네 사지와 정신 건강이 멀쩡한 걸 보아하니 지력을 끌어다 쓰는 데에 직접 협력하지 않은 게 분명하군.”
황지호는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지만, 저 말에 함축된 의미는 무거웠다.
인과가 무너질 정도로 지력을 사용한 이는 사지나 정신 건강이 멀쩡하지 않다는 것처럼 들렸으니까.
방금 물그림자의 기사와 마주했던 서돌이 한마디 덧붙였다.
“멀리서 물그림자의 기사를 봤을 땐 이상이 없어 보였는데. 멀리서 본 데다 중무장 중이라 제대로 확인이 안 됐지만.”
“물그림자의 기사는 전신을 전부 가립니다. 항상 갑옷을 입고 다녔죠. 입단할 때 얼굴을 보긴 했으나 그 뒤로는…….”
재러드 리가 말꼬리를 흐렸다.
막상 그렇게 말하고 나니 떠오르는 게 있는 모양이었다.
워낙 특이한 성향의 플레이어가 많으니 플레이어가 신체를 드러내지 않고, 풀페이스 헬멧을 쓰고 다녀도 그렇게 이상하게 여기진 않는 시대다.
하지만 한때 같은 팀이었던 재러드 리 입장에선 뭔가 이상하게 여겨진 순간이 한두 번쯤 있었을 것이다.
얼굴이 드러날 뻔하자 과하게 화를 낸다거나, 제 갑옷에 손을 대면 상대를 용서하지 않는다거나.
짐작 가는 바가 있는지 재러드 리가 점점 굳어 갔다.
“얼굴을 드러내지 못할 만큼 어디가 망가졌나 보군. 네가 탈퇴하기 전, 꽤 예전부터.”
재러드 리를 관찰하던 황지호가 단정 지었다.
노친네가 남의 표정 읽어 내는 건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으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다들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목우람이 손을 번쩍 들었다.
교실에서 질문을 하기 전 취하는 모션인데, 굳이 이 자리에서 그걸 할 필요는 없었는데.
“그러면 맨체스터 대이계는 세 기사의 맹세 소속 그랜드 크로스, 물그림자의 기사로 인해 발생한 겁니까?”
대화의 흐름상 목우람처럼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다.
단순히 생각하면, 만약 정보가 부족했다면 모든 것을 지력 탓으로 돌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그 정보를 얻지 못했다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겠지.’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뒤에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맨체스터 대이계 사건이 그렇게 커진 건 영국에 다발적으로 발생한 이계와 협회의 기능 마비 탓이다.
프로 플레이어 팀은 영국 각지를 돌며 자잘한 이계를 수습해야 했고, 플레이어 협회 영국 지부는 진족의 습격을 받은 상태였다.
‘영국 지부는 진족에게 습격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긴 했어.’
플레이어 협회 영국 지부는 당시 진족과 대립하는 상태였다.
협회에서 제시한 대(對) 진족 가이드라인을 무시한 영국 지부와 진족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그리고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하루 전, 영국 지부는 진족의 습격을 받아 궤멸 직전에 이르게 되었다.
나는 목우람에게 답했다.
“원인 중 하나인 건 맞아.”
“원인 중 하나……? 다른 원인이 있습니까?”
나는 여전히 고통스러워하는 재러드 리와 별생각 없어 보이는 서돌, 나와 목우람의 문답을 지켜보는 황지호를 돌아봤다.
이 셋은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거다.
이들은 모두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건에 숨은 비밀을 하나 알고 있으니까.
권제인이 호연관에서 내한 공연을 한 밤.
당시 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황지호로부터 그때 나눈 대화에 관해 전해 들었다.
권제인과 재러드 리가 황지호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저희 팀은 당시 습격에 참여한 진족을 생포했습니다. 운 좋게 스스로를 영물이라 칭하는 진족의 조력을 받아 10년이 넘는 정신 조작과 분석 끝에 단서를 잡았어요.
―사로잡힌 진족은 한반도 출신의 웅족이었어요. ‘그분’이라는 존재의 명령을 받고 협회를 습격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습격에 가담한 진족의 정체는 한반도의 웅족.
그것도 예의 ‘그분’의 명령을 받아 움직였다고 한다.
흑막이 그 뒤에서 움직인 거다.
‘목우람에게 흑막에 관한 이야기를 해도 되는 건가.’
내 생각대로라면, 흑막은 세 기사의 맹세에 어떤 식으로든 손을 내밀고 있다.
서로 인식을 하고 움직였는지, 흑막이 일방적으로 지원을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정보를 숨기는 바람에 목우람을 혼란스럽게 하고, 위험에 처하는 걸 막자는 처음 입장을 고수하기로 했다.
“협회 영국 지부 습격을 사주한 자가 있어. 그리고 그자는 전조 없이 이계를 부르는 능력을 갖고 있고.”
흑막에게 있는 능력인 ‘이계 부르기’.
전조 없이 이계를 부르는 능력으로 그는 이미 큰 사건들을 일으켰다.
어린이날 잠실 야구장.
청소년 수련회.
두 곳에서 그는 전조 없이 높은 희귀도의 이계를 부른 바가 있다.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만큼 규모가 크지 않았고, 더 빠르게 수습되긴 했지만.
‘하지만 저 두 곳은 지력이 풍부한 한반도였어. 만약 인과관계가 무너진 곳에 이계를 부른다면 어떨까.’
지력이 고갈되면 그 땅의 인과력과 항상성이 무너진다.
그러면 본래라면 일어날 리가 없는, 일어나더라도 금방 수습할 수 없는 사고가 발생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맨체스터 대이계 발생 당시 플레이어 위성은 어떤 전조도 잡아내지 못했다.
“이계를 부른다고요? 그 정도의 이계를……!”
“그 능력 자체에 그 정도로 거대한 힘은 없었을 거야. 그 땅에 지력이 고갈돼서 인과가 무너지고, 뒤에서 수작을 부려서 사건이 더 커진 거지.”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다.
소방 설비가 잘 되어 있고, 소방서에 인접한 건물에 불이 나는 것.
기름이 뿌려진 건물에 소방 설비가 고장 나고 비상구가 잠긴 상황 속 교통체증으로 소방서 출동이 곤란한 와중에 불이 나는 것.
똑같은 불씨를 던지더라도 후자의 피해가 더 클 수밖에 없다.
흑막은 잔뜩 메마른 땅 위에 퇴로를 다 막고 불씨를 던진 거나 다름없다.
‘이걸로 수수께끼가 하나 풀렸어.’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 전날, 흑막이 웅족이 통해 협회에 손을 쓴 걸 보고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맨체스터 대이계 공략에 등장한 이계의 규모가 지나치게 커 흑막이 직접 힘을 썼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우연히 발생한 대이계를 예지하고 그 틈을 이용해 암약한 게 아니야.’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부리기 위해 인과를 파괴할 생각을 하다니.
그자가 사용한 막대한 힘의 원천이 무엇인지 정체를 조금 알 것 같았다.
플마고 속의 불합리한 상황과 강력한 악역들.
이것들은 그저 밸런스가 붕괴된 망겜의 잔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흑막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철저히 밸런스부터 파괴했을 뿐.
‘저자도 철저히 한 수, 한 수씩 쌓아서 온 거야.’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부조리한 힘이 우연히 발생했다는 것보다 누군가가 정교하게 판을 짜고 수를 둬 이런 국면을 유도했다는 게 더 소름 끼쳤다.
이미 상대가 홀로 수십 수를 둔 체스판에 앉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도 상대의 수가 보이기 시작했어.’
내 말이 끝난 이후에는 목우람도 입을 다물었다.
태평한 목우람도 흑막이 늘어놓은 수의 존재를 느낀 걸까.
황지호가 무거운 침묵을 깼다.
“지력에 관한 이야기는 충분히 한 것 같군. 이제 네 얘기를 듣겠다.”
황지호는 재러드 리를 보며 말했다.
혼란에 빠졌던 재러드 리는 시간이 흐르자 침착해졌다.
간만에 재러드 리가 일류 플레이어답게 보였다.
“제가 막 플레이어가 되었을 때의 일입니다.”
재러드 리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가족을 잃었다고 한다.
한국에 먼 친척이 있긴 했으나 왕래가 적었고, 가끔 마주칠 때마다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했기에 기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자들이 재정적으로 문제가 있진 않았을 텐데.’
아마 재러드 리가 이쪽을 의지해 오면 귀찮아질까 봐 미리 약을 쳐 둔 거겠지.
권레나의 양부모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면서 제 이익을 챙겨 먹는 데 도가 트지 않았던가.
그 양부모 중에 재러드 리를 완강한 방법으로 밀어낸 이들 중 하나가 있을 테니 이상하지 않았다.
어쨌든 의지할 곳이 없던 재러드 리는 플레이어가 되자마자 곧바로 세 기사의 맹세의 스카우트를 받아들였다.
재러드 리가 세계 10대 플레이어 팀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저도 기사의 일원이 되어 이계를 공략하고, 에너미를 퇴치하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제가 입단한 지 1년이 지났을 때, 그자들이 제게…….”
입단 1년이 지난 시점.
재러드 리는 세 기사의 맹세에 적응하고, 실적을 냈다.
그는 기사들과도 잘 어울렸고 팀 마스터인 그랜드 크로스들과도 몇 번 마주쳐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랜드 크로스들이 그를 불러냈다.
“그랜드 크로스들만 출입이 가능한 곳에 초대받아 몹시 들떠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습니다. 뭔가 이상했는데도요.”
재러드 리가 말하는 속도가 빨라졌다.
한국어가 조금씩 꼬이기 시작했는데, 아직 말을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뭣하면 영어로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는데, 재러드 리는 꿋꿋이 한국어로 말했다.
“물그림자의 기사가 광림을 써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재러드 리는 그날, 물그림자의 기사가 한 제안을 승낙했다.
그 결과, 재러드 리는 그가 만드는 에너미의 모델이 되었다.
세 기사의 맹세가 소유한 아지트의 중앙에서 그들은 맨체스터의 지력을 끌어다가 에너미를 만들었다.
밸런스가 좋은 능력치를 가진 재러드는 모델로 삼아 에너미를 만들기 편했다고 한다.
“아무리 복제해도 광림은 못 쓰고 스킬 능력치에 한계가 있고 의사소통도 잘 안 됐죠. 그리고…… 제가 미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재러드 리의 상태는 불안정하게 변해 갔다.
모델이 될 때마다 지력을 뒤집어써야 했고, 자신의 얼굴을 한 에너미들이 우글거리는 장면을 목도해야 했다.
가끔 에너미들은 기사들의 통제를 벗어났다.
재러드 리의 얼굴을 한 에너미들은 서로 죽이기도 하고, 재러드를 죽이려고도 했다.
재러드 리는 자신이 에너미인지, 에너미가 자신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재러드 리는 권제인의 연주를 듣게 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