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모델 (9)
“고생 많았어, 수혁아.”
“아니에요. 고생은 혜지 누나가 했죠.”
오혜지와 주수혁은 다소 멀리 있어서 그런 건지 아직 안다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둘 다 우수한 플레이어니까 시선을 느끼긴 할 테지만, 저 둘이 주목을 받는 건 흔한 일이다.
실제로 안다인 외에도 많은 이들이 두 사람을 흘끗거리며 보고 있었다.
전투 중이라면 모를까, 주수혁과 오혜지는 교내에서 시선을 받는 것 정도에 큰 신경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았다.
“……시험 기간에 계속 마중 온 거 말이야, 혹시 수겸 오빠가 부탁해서 온 거야?”
‘수겸 오빠’라는 단어를 입에 담은 순간 오혜지가 수줍어하는 것 같았다.
이름을 입에 담는 것조차 부끄러워할 정도로 좋아하고 있는 건가!
오혜지는 아직도 그 답 없는 골초 주수겸을 짝사랑하는 중인가 보다.
주수겸이 주오 그룹 늙은이들의 음모를 타파하여 수능 고사장에 오혜지를 바래다준 건으로 더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주수겸이 싫었다.
그때, 주수혁이 눈치 없는 소리를 했다.
“아뇨, 제가 오고 싶어서 온 거예요.”
주수혁의 말에 안다인의 눈빛이 작게 흔들렸다.
물론, 안다인이 주수겸에 관해서는 모를 것이다.
그래도 저 말 때문에 다들 기말고사 기간 내내 주수혁이 자진해서 오혜지를 바래다줬다는 걸 알게 됐다.
주수혁은 한술 더 떠 걱정스러워하는 얼굴로 오혜지를 바라봤다.
“수겸이 형은 기말고사는 괜찮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래도 제가 걱정이 돼서…….”
그건 나도 주수겸과 같은 의견이었다.
주오 그룹의 정신 나간 늙은이들의 목표는 오혜지의 빠른 결혼이다.
그래서 대학 진학도 방해하려 한 거다.
하지만 졸업이 걸린 기말고사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오혜지가 행여 유급이라도 하면 그들의 목표는 더 멀어지는 셈이니까.
‘그 정도로 정신이 나갔으면 고등학교 졸업을 방해할 가능성도 있긴 하지만, 대학은 못 가도 오씨 집안의 아이가 은광고를 졸업했다는 타이틀을 놓칠 수는 없겠지.’
플레이어가 대학을 가지 않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다.
운동선수가 고등학교 졸업 후에 바로 프로 입단을 결정하는 것처럼, 플레이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아무리 플레이어라도 고등학교는 졸업하거나 검정고시는 치르는 게 보통이다.
“그래…… 고마워, 수혁아.”
“아니에요, 혜지 누나한테 별일 없어서 다행이에요.”
비록 기대했던 대로 주수겸의 안배는 아니었으나 주수혁의 마음이 기특한 건지 오혜지가 부드럽게 웃었다.
주수혁도 마주 웃었는데, 그 모습이 지나치게 다정해 보였다.
두 사람의 사정을 아는 내 눈에는 사이좋은 오누이로 보이지만, 안다인의 눈에는 다르게 보일 것 같았다.
안다인이 잠시 슬픈 표정을 짓다가 두 사람에게서 시선을 뗐다.
“헐…….”
그 광경을 보던 문새론이 고구마를 먹은 것 같은 꽉 막힌 목소리로 탄식했다.
나도 속이 얹힌 기분이 들었다.
이제서야 우리를 발견한 주수혁이 말을 걸었다.
“어, 다들 일찍 왔네.”
“왔어? 복도 공기가 찬데 왜 나와 있어. 이만 들어가자.”
그때, 한 발 떨어져서 이 상황을 주시하고 있던 유상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우리에게 짧게 인사한 유상희는 오혜지에게 곧바로 말을 걸었다.
“혜지야…….”
“왜?”
“수능을 망쳐서 상태가 안 좋은 거야? 안 그래도 없는 눈치가 더 없어진 거 같아.”
학생회 후배인 안다인이 슬퍼한 게 마음에 들지 않은 걸까.
유상희는 인자한 목소리로 팩트를 늘어놓으며 오혜지의 마음을 후벼 팠다.
오혜지는 지지 않고 유상희의 말을 받아쳤다.
“지금 나한테 시비 거는 거야? 그리고 안 망했거든? 너도 평소보다 점수 안 나와서 망했잖아.”
“시비는 싸우려고 하는 거잖아. 난 눈치 없는 애랑 싸우는 거 싫어해. 내 성적이 떨어진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혜지의 가채점 성적보단 훨씬 나은걸.”
“누가 들으면 20점은 더 나온 줄 알겠다. 겨우 2점 갖고 유세 부리는 것 봐.”
“혜지는 만점을 받겠다고 했잖아. 만점에 비해서 혜지 점수는 많이 떨어지지.”
오혜지가 성을 내고 싶은 걸 꾹 참으면서 말하고, 유상희는 생글생글 웃으며 받아쳤다.
슬슬 말려야 할 것 같은데, 후배 입장에서 나서기 미묘했다.
사실 동급생이라도 저 박력 넘치는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쉽지 않을 거다.
그나마 친동생인 유상훈이 끼어들기 쉽겠지만, 유상훈은 친누나가 동급생과 말다툼을 하는 걸 질린 눈으로 보고만 있었다.
끼어들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더 목소리가 커지면 나라도 나서야겠다 싶었을 때였다.
“후배 앞이다. 그만해라.”
도원우의 말에 두 사람이 바로 조용해졌다.
3년 가까이 0반을 상대해 온 전 학생회장답게 다툼을 말리는 솜씨가 상당했다.
도원우는 주변에 몰려 있는 아이들에게도 일갈했다.
“곧 학생 대표 회의가 시작된다. 이만 들어가라.”
도원우의 말에 입구 주변에 몰려 있던 아이들이 하나둘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 학생 대표 회의를 진행하는 건 2학년이라 학생 자치 기구 소속 3학년들은 단상으로 가는 대신 따로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가 1학년 옆쪽이다 보니 이동하는 중에 오혜지와 도원우가 대화를 나누는 게 들렸다.
“많이 변했네.”
“뭐가.”
“평소에는 상희 편을 들다가 오히려 상희한테 한 대 얻어맞았을 텐데.”
“…….”
오혜지가 도원우의 추한 과거사를 언급했으나 그는 반응하지 않았다.
무뚝뚝한 얼굴로 자리에 앉았을 뿐이었다.
도원우의 옆얼굴을 보니 턱선이 날카로워졌는데, TC 집안의 우환 탓에 살이 빠진 걸지도 모르겠다.
‘홍규빈이 남궁 쪽에 손을 떼고 TC 쪽에 전념하게 됐어. 압박이 심하겠지.’
홍규빈은 현재 TC 연구소의 인공 강림 프로젝트를 후원한 자금책을 추적하는 중이다.
도원우는 현재 협회에 협력하는 중인데, TC 내부의 반발을 누르고 방해 공작에 대응하며 움직이느라 고생이 많은 듯했다.
유능한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답게 잘 해결하고 있긴 하지만.
‘TC 건은 홍규빈이 맡고 있으니 괜찮겠지.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는 따로 있어.’
지금 플마고를 끝까지 한 썩고 고여 버린 유저 입장에서 봤을 때.
지금 가장 중대한 위기를 맞이한 건 우울한 눈을 한 안다인과 현재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르는 주수혁이었다.
안다인이 질투를 한 건지,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리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다.
수습할 틈도 없이 그 상황은 지나가 버렸고, 뒤늦게 누가 끼어들어서 주수혁과 오혜지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어필하는 건 더 이상했다.
이 위기 상황을 타파할 수를 떠올리려 할 때.
두두둥!
드럼 소리와 함께 트럼펫 소리가 들렸다.
어디에선가 전차들의 행진(Parade of the Charioteers)이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문이 열리며 온몸에 정체불명의 전단지를 붙인 금찬솔과 왕찬솔이 등장했다.
“2학년 0반 반장, 금찬솔 등장!”
“2학년 0반 부반장, 왕…….”
하지만 그들의 대사와 웅장한 배경음은 일시에 중단되었다.
화륵!
염준열의 불꽃이 대회의실 이곳저곳에서 타올랐다.
의장석에 서 있던 염준열이 원격 점화로 여기저기 숨겨져 있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불태웠다.
“준비에 바빠서 찬솔이들을 잊고 있었네. 학생회 허락 없이 학생회관 내에 배치한 설치물은 임의 철거가 가능하다는 건 알지? 왔으면 자리에 앉아.”
염준열은 부드럽게 말했지만, 블루투스 스피커를 불태우는 불꽃은 그렇지 않았다.
스피커가 잿더미가 된 후에야 불꽃이 완전히 사라졌다.
금찬솔과 왕찬솔은 스피커가 탄 것보다 또 화려한 등장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 듯했다.
“아악! 거의 다 됐는데! 또 걸렸어!”
“아니야, 어쨌든 성공했어. 완전히 주목받으면서 제일 마지막에 입장했잖아!”
“우리가 마지막인 거 맞아? 3학년 0반 선배놈들 없는데? 왕찬아, 어떻게 된 거야!”
“어, 온 줄 알았는데 없네…….”
금찬솔과 왕찬솔은 이번에도 제일 마지막에 등장하려고 했는데 또 실패했나 보다.
3학년 0반 우기환 일당은 오늘 등교해서 기말고사는 치렀다는데 회의는 그냥 빠질 생각인가?
그러면 어쨌든 3학년 0반이 안 왔으니 금찬왕찬이 마지막에 등장한 셈이다.
금찬왕찬이 그렇게 정신 승리를 하려 했으나 뒤늦게 우기환과 국악부 소속인 3학년 0반 부반장이 등장하고 말았다.
올해 학생 대표 회의에 마지막으로 등장해 주목을 받은 인물들은 우기환 일당이 되었다.
“공기가 왜 이래? 환기 좀 해.”
연기 냄새가 마음에 안 드는지 우기환이 손부채질을 하자 금찬솔과 왕찬솔이 입을 오리처럼 내밀면서 구시렁거렸다.
대충 ‘빨리 졸업해!’, ‘기말고사 쳤으면 집에나 가셈!’이라고 떠들고 있었다.
쾅!
염준열이 의장석 위의 의사봉을 내리쳤다.
묵직한 이능파가 퍼져 나가자 소란스러웠던 회의실에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지금부터 4/4분기 학생 대표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이능파가 실린 염준열의 목소리가 그 뒤를 이으니 모두 그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아직 도원우만큼 능숙하지 않지만, 과연 은광고가 선택한 새 학생회장다운 모습이었다.
개회 선언 후의 진행은 순조롭게 흘러갔다.
회의를 이끄는 염준열의 모습을 보며 3학년들이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오늘 꼭 칭찬의 메시지를 보내야지.’
후배로서, 스승으로서 염준열의 활약을 칭찬할 말을 고르고 있는 사이에 학생회와 학급 임원의 보고가 끝났다.
그 뒤로는 선도부의 보고가 있었는데, 선도부장 천동하는 일말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보고를 마쳤다.
총동아리회장 허채아는 보고 사항이 많아서 그런지 보고하다가 가끔 목소리가 떨릴 때가 있었는데, 그 외에는 흠잡을 곳이 없었다.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들의 활약에 흐뭇해하고 있을 때, 갑자기 기분이 땅에 처박혔다.
“다음은 지익회에서 발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말에 지익회장 ‘계’새끼가 등장했다.
지익회의 보고를 들으면 들을수록 기분이 나빠졌다.
은광고의 기숙사 학생들은 대체 무슨 죄가 있어서 저런 악플러를 대표로 삼아야 하는가?
꼴에 좋은 선배한테 잘 배워서 보고는 그럭저럭했는데 지익회장의 존재 탓에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다인 쪽을 보는 거 같은데.’
계이담이 보고를 마치고 내려가기 전, 수심에 가득 찬 안다인을 잠시 보는 것 같았다.
주제를 모르고 안다인을 걱정하는 것 같았다.
내 손이 닿는 곳에 계이담이 있었다면 그 눈을 찔렀을지도 모른다.
각 자치 기구가 정기 보고를 마친 후에는 주요 안건을 다루기 시작했다.
“첫 번째 안건은 은광고 학생 홍보 대사의 선정에 관해서입니다.”
‘학생 홍보 대사’라는 말이 나오자 시선이 이쪽으로 쏠린 것 같았다.
본의 아니게도 후보로 거론되고 있는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
의장석에 서 있는 염준열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학생회장이 아닌, 이번 해에 학생 홍보 대사를 맡았던 입장에서 제안할 게 있습니다.”
그때, 염준열이 예상치 못한 말을 했다.
“현재 학생 홍보 대사는 두 명으로, 은광고의 규모에 비해 그 수가 굉장히 적습니다.”
은광고의 재적 학생 수는 약 1,500명.
학생 자치 기구가 학생들을 대표한다고 하나, 홍보 대사도 엄연히 학생을 대표하는 존재이다.
고작 두 명이면 부담이 클 법했다.
염준열은 그 과중한 짐을 짊어지면서도 활약을 했다는 게 참 대견스러웠다.
염준열은 홀로그램을 띄우며 말했다.
“그래서 올해부터는 더 많은 학생 홍보 대사를 선정하여 활동하는 이들의 부담을 줄이고, 적극적으로 학교 홍보에 임할 수 있게 돕고자 합니다.”
홀로그램 위 표시된 정원은 학생 4명, 교사 1명이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