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528화 (526/925)

75. 바꿀 수 없는 것 (2)

성시완이 언급한 ‘그때 일’이 무엇인지는 굳이 되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얼마 전, 옛 한국 지부장이 남긴 단서를 얻기 위해 비밀 통로 속의 이계 시뮬레이터의 보스 룸을 공략한 일을 말하는 걸 거다.

정확히는 그날 얻은 것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게 분명했다.

‘지부장이 남긴 단서에 관해 물으려는 거겠지.’

그날 성시완은 옛 지부장의 정신 공격에 패배했다.

정확히 어떤 과정을 거쳐 패배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날 옛 지부장이 했던 말을 바탕으로 추측은 할 수 있었다.

―내 손주가 품은 공포의 이미지는 막연해서 그 아이의 기억 외에도 ‘어둠의 시대’ 때의 기억을 참고하여 구현했다.

옛 지부장은 두 가지 패턴으로 공격했다.

첫째, 과거와 후회.

둘째, 미래와 공포.

옛 지부장이 공포의 이미지에 관해 언급한 걸 보면, 성시완은 두 번째 공격에 무너진 듯했다.

옛 지부장이 건네는 단서를 손에 얻었을 때 맞이할 수 있는 가상의 미래의 앞에서.

‘그걸 보고도 이 자리에 온 거구나.’

성시완은 은광고에서 무려 지익회장을 역임한 우수한 플레이어다.

이계 시뮬레이터 가동 중에 보인 성시완의 전투 능력을 고려하면, 그가 얼마나 많은 이계를 공략하고 에너미를 쓰러뜨려 왔는지 어렵지 않게 짐작이 갔다.

옛 지부장은 그런 성시완을 무너뜨릴 만큼 선명한 공포를 정신에 새겨 넣었다.

‘어둠의 시대’를 참고하여 구현한 공포의 이미지는 내가 본 것보다 더욱 끔찍하고 잔혹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시완은 그걸 보고도 이 자리에 왔다.

‘어쩌면 이대로 계속 묻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3학년인 성시완은 그날 이후에 수능과 기말고사로 바빴다.

그래도 그날 일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았기에 어쩌면 이대로 성시완은 이 건에서 손을 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 생각과 달리 성시완은 시험을 치르는 동안 각오를 굳힌 것 같았다.

“아, 내일 수업이 있으니 너무 늦는 건 그런가? 지익회 애들이랑 저녁만 먹고 바로 올게. 안 될까?”

성시완은 지익회 뒤풀이가 끝나자마자 바로 만나 이야기하고 싶은가 보다.

성시완이 사람 좋은 표정을 지으며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선뜻 그러겠다고 답할 뻔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오늘은 별 일정이 없고, 저녁에 만나는 건 문제가 없고, 황보윤 교장과 만나 정보를 얻은 후에 성시완에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이대로 성시완과 약속을 잡아 정보 공유를 하는 게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도 성시완을 마주 보고 있으니 도저히 그러겠다고 답할 수 없었다.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속에서도 각오를 굳힌 캐릭터들이 저런 눈을 했었어.’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속에서 성시완은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지익회가 전멸했다는 코멘트에 그 최후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날 눈 아래에서 성시완은 저렇게 각오를 굳힌 눈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에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뵙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아니야, 내가 너무 갑작스러웠지. 그럼 다음에 볼까? 의신이가 편한 날에 맞출게.”

내 말에 성시완은 기분 상한 티 없이 부드럽게 답했다.

성시완에게는 아직 내 의도가 전해지지 않은 것 같았다.

“죄송하지만, 다음에 만나도 선배님과 그날 일에 관해서 이야기하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 말에 성시완이 동요했다.

이렇게 강경하게 대화를 거부할 줄은 몰랐나 보다.

“의신아……?”

지금 내가 상당히 무례한 태도를 취하는 걸 알았다.

성시완은 당혹스러워하다가 그럴싸한 가설을 머릿속에서 세웠는지 ‘아.’ 하고 짧게 감탄사를 뱉고 말했다.

“그날 얻은 데이터에 문제가 있었어? 그런 거라면 함께 분석을 해 보는 게 어떨까.”

“아뇨, 데이터 해석은 완료했어요. 단서를 바탕으로 관계자 분을 찾아 말씀도 들었습니다.”

성시완은 정보 공유를 하지 않겠다는 내 뜻을 읽어 낸 건지 말을 잇지 못했다.

입학 이후부터 죽 좋은 선후배 관계를 유지하던 후배가 이런 태도를 취할지 상상도 못 한 것 같았다.

건방지다, 무례하다고 한마디 해도 이상하지 않은데, 성시완은 그저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실 이렇게 말은 했지만 성시완과 협력 관계를 끝낼 생각인 건 아니었다.

“성시완 선배님께서 그분께 직접 데이터를 받아 온 후에 정보 공유를 하고 싶어요.”

“……응?”

선의와 각오만으로는 예정된 배드 엔딩을 바꿀 수 없다.

플마고를 하며 절절하게 느꼈다.

선량한 캐릭터들이 시나리오에서 어떻게 무너졌는지 잘 알고 있다.

악랄한 조작 난이도의 게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의지만으로는 안 된다.

“그 보스 룸을 공략해 주셨으면 합니다.”

옛 한국 지부장의 AI는 최적의 대련 상대다.

이쪽의 약점을 훤히 꿰뚫어 보고 있는 데다 한반도에 닥친 위기의 존재를 알고 있다.

내가 성시완을 그곳으로 보내면 옛 한국 지부장은 성시완을 철저히 단련시켜 줄 것이다.

“지금의 나로는 안 된다는 거구나. 그럼 이담이도 클리어하기 전까지는 너와 정보를 공유할 수 없겠네.”

그러고 보니 ‘계’새끼가 있었지.

얼굴만 봐도 불쾌해서 잠시 머릿속에서 그 존재를 지우고 있었다.

성시완은 내 말을 듣고 웃으며 답했다.

“알았어! 공략해 올게. 얼마나 걸릴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아무리 늦어도 크리스마스이브 전까지 부탁드릴게요.”

“하하하, 기한이 정해져 있는 거야?”

퍼스트 크리스마스 시나리오 속 지익회는 흑막의 계략에 전멸했다.

지금의 성시완으로는 안 된다.

성시완이 옛 한국 지부장을 상대해서 성장한다면 이는 전력 증강으로 이어질 거다.

“……그래. 그럼 다음에는 그분께 인정받아서 돌아올게. 이담아, 당분간 시간 좀 내 주라.”

계이담은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성시완을 사실상 공포 속으로 떠민 것이나 다름없다.

내 무례한 태도에 성시완이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은데,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아, 수능 전에 달토끼떡 찹쌀떡 보내 준 거 잘 먹었어. 맛있더라. 다음엔 답례로 밥 살게.”

오히려 성시완은 지난 일을 갖고 고마움을 표했다.

성시완은 후배 복이 없는 게 아닐까?

나와 계이담에게 공통점이 있다는 게 말도 안 되긴 하지만, 어쨌든 둘 다 성시완에게는 참 부족한 후배인 게 분명했다.

“……잠깐 이야기하다가 가겠습니다.”

“그래? 그럼 먼저 가 있을게.”

계이담이 남았다.

저놈은 또 뭔 개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건지 모르겠다.

기록기기의 사각, 복도 구석에 인기척이 전혀 없는 걸 확신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

“뭐.”

“……크리스마스 어떻게 할 거냐?”

“알아서 할 건데.”

“…….”

적어도 계이담의 도움이 필요 없는 건 확실했다.

저놈이 뭘 하고 안 하고 달라지는 건 없다.

크리스마스에는 저놈이 내빼든, 내빼지 않든 관계없는 수를 둘 생각이다.

성시완이 위험에 처했으니 방해를 하지는 않겠지.

저 ‘계’새끼가 방해하지 않을 거라는 가정을 세운 것만으로도 나로서는 참으로 관대하고 과분한 대우를 해 준 거다.

내 말을 듣고도 아직 할 말이 있는지 계이담은 꺼지지 않았다.

슬슬 꺼지라고 하려고 할 때였다.

“네가 올렸던 공략 말인데.”

저 ‘계’새끼가 내 공략을 봤나.

하긴 저놈이 자기 힘으로 플마고를 공략했을 리가 없지.

저 악플러가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계정 차단을 하든가 뭔 수를 썼었을 텐데 아쉽게 됐다.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 공략도 올렸었냐?”

악플러와 대화할 때 소모하는 시간과 열량이 아까웠지만,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와 관련된 사항이라면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플마고에는 숨겨진 시나리오와 퀘스트가 여러 개 존재했고, 당연히 메인 주인공인 주수혁과 안다인의 히든 퀘스트가 존재했다.

나는 두 사람의 몫은 물론, 모든 종류의 히든 퀘스트를 발견하는 즉시 공략을 정리해 올리곤 했다.

나는 곧바로 답했다.

“올렸는데.”

“…….”

계이담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 꼴을 보니 저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짐작이 갔다.

“설마 내가 공략을 올리지 않은 퀘스트가 있어?”

계이담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계’새끼에게도 이 세계에 온 의미가 있던 건가!

인정하기 싫었지만, 계이담으로부터 정보를 캐낼 수밖에 없었다.

내가 찾아내지 못한 히든 퀘스트가 존재한다면 정보를 얻어 낼 소스는 계이담 하나뿐이니까.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무슨 내용이야?”

“……2학년 때 있던 일인데, 안다인이 별로 등장하지 않아서 잘.”

……모르는 건가!

보나 마나 안다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나리오 파트 페이지를 넘긴 게 분명하다!

스킵 기능도 없으니 다 읽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걸 또 대충 넘기다니.

나는 계이담을 한 대 치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지만, 밖에서 이 악플러를 후배랍시고 기다리고 있을 성시완을 생각해 참기로 했다.

“꺼지고 보스 룸 공략이나 해라. 그 퀘 내용 생각 못 해 내면 말 걸지 마.”

“아, 그러니까…….”

“말 걸지 말라고.”

나는 그대로 계이담을 지나쳐 갔다.

계이담은 정말로 떠오르는 게 딱히 없었는지, 끝까지 말을 하지 못했다.

‘안다인 히든 퀘스트에 중요한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는데.’

그 히든 퀘스트가 몹시 신경 쓰였지만, 현재로선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계이담이 한 대 처맞을 각오로 거짓말을 했다 해도 김신록에게 부탁해 고문이라도 하지 않는 한 진위 여부를 파악하기도 어렵다.

그 말이 진짜라면 여러 리스크를 감안하고 확인할 길이 있긴 하지만.

‘안다인이 2학년 때 겪는 일이니 아직 시간이 있어. 그 건은 나중에 생각하자.’

기숙사에 도착하니 내 앞으로 택배가 세 개 도착해 있었다.

진정할 겸, 택배나 확인하기로 했다.

첫 번째 확인한 택배는 옥토연으로부터 온 수리취 찹쌀떡 세트였다.

딩동.

택배를 받을 때를 노린 것처럼 옥토연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옥토연] 은인아, 은인아!

[옥토연] 토윤 언니한테 들었는데, 은인이 그동안 주문한 건 다른 사람 줄 선물 세트였다면서?

[옥토연] 은인한테 줄 수리취 찹쌀떡 세트 보내 놨어. 감상 말해 줘!

수능을 보는 선배들 용으로 준비한 달토끼떡 세트가 내가 먹을 게 아니란 걸 이제야 알아챘나 보다.

다음에 감상을 물으면 어떡하나 조금 고민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저녁 대용으로 수리취 찹쌀떡을 먹으며 옥토연에게 감상을 전했다.

덧붙여 선물을 준 선배들의 감상도 전했다.

옥토연은 시간이 많은 건지, 농땡이를 치는 건지 바로바로 답장을 했다.

은호의 후예들에게 줄 고등학교 입학시험 선물까지 같이 고른 후에야 메시지를 끝낼 수 있었다.

다음 선물은 서돌로부터 도착한 거였다.

‘……12지 수장들이 요새 한가한가?’

서돌이 보낸 건 느루에서 발매한 액세서리 목록이 정리된 아트북과 얇은 넥타이핀이 있었다.

검은 타이 바의 뒷면에는 느루의 로고와 함께 ‘Unnamed Supernova’라고 작게 새겨져 있었다.

첨부된 검은 카드 안엔 하얀 글씨로 서돌의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길게 미사여구가 붙어 있긴 했지만, 대충 느루의 앰배서더가 되어 달라는 말이었다.

‘말로 안 되니 실물을 보여 줘서 권유할 생각인가……!’

확실히 넥타이핀에 흠잡을 곳이 없긴 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교복 넥타이와 함께 착용해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실용적인 디자인을 하고 있었다.

서돌에게 ‘선물은 고맙다. 모델을 할 생각은 없지만.’이라는 뜻을 담은 메시지를 적당한 말로 포장해서 보낸 후.

가장 화려한 빛깔의 택배 박스를 열었다.

‘이건…….’

박스 안에는 옹길동이 제작한 테마파크 기념품이 들어 있었다.

오로라빛을 띤 기념품들은 척 봐도 그날 간 테마파크를 연상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어 있었다.

유원지의 성 모양을 한 풍선, 마스코트 캐릭터가 떠오르는 머리띠, 메르헨 풍 입구와 비슷한 디자인의 액자 등등.

옹길동은 액자 안에 그날 찍었던 단체 사진을 넣어 뒀다.

사진 속에선 반에서 단체로 착용한 후드 티를 입고 있는 1학년 0반 구성원들이 웃고 있었다.

그 사진을 가만히 보던 나는 각오를 굳혔다.

옹길동에게 택배 잘 받았다는 감사 인사를 전한 후, 나는 사진 속에 있는 내 플레이어블 캐릭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 용제건 선생님.

내가 보낸 메시지는 금방 읽음 처리되었다.

명문고 EX급 조연의 리플레이 (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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